김포공항의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뻗어나온 덤불과 황무지, 콘크리트 벽돌로 얼룩진 폐허가 있다. 이 지역은 타원형으로 김포공항이 세워진 일대를 모조리 포위하고 있어서, 공항으로 들어가는 모든 버스는 마치 순례자처럼 이 지역의 구석구석을 거쳐야만 한다. 어떤 때는 김포공항은 무질서와 야만, 빈곤함이 구체화된 황무지로부터 문명을 보호하는 요새화된 성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지역이 마음에 든다. 이곳은 부천시에 대한 메타포와 같다. 현대과학의 상징인 항공기의 안식처를 뿌리 삼아 뻗어나온 고도로 발전한 상가, 그 끄트머리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은 이 땅은 고도제한과 기타 여러 경제적, 지역적 이유로 버림받은 채 수십 년을 홀로 잔류해왔다. 이 헐벗은 땅은 이 나라가 지닌 깊은 상처를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위정자에 대한 원색적인 증오를 뿜어내며 과거를 향해 몸부림친다. 이 땅의 외견은 천박하지만, 동시에 박해받는 성자의 앙상한 알몸처럼 모든 이를 숙연케 하는 숭고함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땅이 가진 역사다. 한때 이 지역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백이십년 전 이곳은 부천 상공업의 젖줄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이곳, 이 부천에 한국 최고의 문학가가 살았었다. 그의 이름은 <이학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조선땅으로 쇄도하던 서양 문물에 경도되었다. 그는 특히 버클리에 매료되었고, 우주의 공시성을 추종했으며, 오로지 관념의 힘만으로 쓰여진 모든 현대 소설들을 사랑했다.
그가 남긴 소설들이 여러 권 있지만, 사실 현대 문학계에서 이학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학림이 문학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은 일제강점기였으며, 동시에 카프문학이 횡행하던 때였다. 그 당시 문학은 한없이 정치적이고 폭력적이었다. 문학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가담하거나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짖어야만 했다. 이학림같은 걸출한 문학가가 잊혀지는 건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시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가장 먼저 파괴된다.
그러나 이학림의 몰락은 그가 잊혀지거나 붓을 꺾어서 이뤄진 게 아니었다. 그의 문학적 자살은 순전히 그가 의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학림은 끝에 가서 변절했다. 당시 이학림과 친하게 지내던 민족운동가 채영은 이학림의 창작 능력을 아깝게 여겼다. 그는 끊임없이 이학림에게 영미식 현대소설은 그만두고, 카프문학을 하여 주류 문학가가 될 것을 권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학림은 문장을 벼려내고 플롯을 설계하는 능력이 당시의 그 어떤 작가들과도 비교를 불허했다. 만약 그가 카프문학을 썼더라면, 아니, 카프문학의 형식을 흉내만 냈더라도 최고의 문학가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학림은 채영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는 비상할 수 없다면 공룡이 되길 원했다. 역사의 지층이 그의 거대한 재능까지도 모조리 침식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함께 이학림의 생각도 변했다.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무참한 거세의식은 당대의 현실에 그리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이학림조차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학림은 채영과 함께,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희대의 서사시를 지었다. 이 서사시는 하나의 가상 신화다. 이 시는 한때 동방의 초강대국으로써 강림했던 '환국' 의 파라만장한 역사적 굴곡을 노래하고 있으며,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져 간 덧없는 노제국과, 그 제국의 피를 이은 현세의 후예들의 투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학림은 단순히 서사시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조작'하고자 했다. 거미줄처럼 미려한 플롯을 짜는 그의 치밀한 상상력과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설득력을 바탕으로, 조밀한 사건들의 연계로 이뤄진 역사의 틈새로 가상의 국가를 밀어넣고자 했다. 한때 장미십자회는 4가지 핵력이 온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우주에 새로운 혹성을 창조하고자 했다. 국가를 만드는 일은 적어도 그것 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위업이리라.
생애 최대의 역작 '환단고기' 를 완성한 이학림은 그 책의 두 번째 수정본을 채영에게 전달했다. 채영 이유립은 그 책을 자신의 명의로 출판했다. 환단고기의 마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 책이 싣고 있는 팩트가 튼튼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서사시이며, 본질적으로 허구이다. 중요한 건 이 책이 가진 설득력이다. 환단고기는 당시의 무뢰배와 지식인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을 매혹시켰다. 현실을 뛰어넘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넘어 현실을 대체하는 아름다움. 이학림은 모든 문학가들이 바라마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째서 이학림이 이 책을 이유립에게 넘긴 것인지, 또 어째서 환단고기 집필 이후 붓을 내려놓은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관념론을 숭배하는 문학가로서 현실이라는 정부와 몸을 섞었다는 수치심이 그에게는 그토록 큰 상실감으로 다가온 것일까? 게다가 그의 역작 환단고기는 이유립과 그의 제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본래의 문학적 마력을 영원히 상실했다. 이 책이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까닭은, 원본을 쓴 이학림의 눈부신 문장이 화석처럼 몇몇 이본들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7월 10일은 이학림이 숨을 거둔 날이다. 최고의 재능을 지녔음에도 시대가 맞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한 문학가, 새로운 역사의 발명가, 희대의 사기꾼, 그 모든 명예와 불명예를 한 몸에 지닌 이학림은 그 누구의 문병도 받지 못한 채 자택에서 고요히 숨을 거뒀다. 그가 우리 학계에 남긴 파문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