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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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11-22 22:26:45 KST | 조회 | 325 |
제목 |
흡혈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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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추운 날 밤, 나는 몸을 덥히려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걸쳤다.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앉아 튀김을 시켜 먹었는데, 곁눈질로 보니 피부가 유난히 창백한 여자였다. 나는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저는 흡혈귀 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칸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1주일 전에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실천이성비판 해제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글이 읽혀지지 않아 그냥 가져다주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처음 여자가 입에서 '흡혈귀'라는 단어를 토해냈을 때 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히 단어를 엄선해서 신중하게 말했다.
"참 안타까운 소식이로군요."
그러나 내 말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여자에게 최악의 효과를 가져다 준 듯 했다. 나는 여자의 새하얀 얼굴이 수심에 물드는 걸 보았다. 나는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모든 사람이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건 아니지요."
"정말로 그래요."
그녀는 수긍해 주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화제를 돌리고자 했다.
"언제부터 흡혈귀가 되셨나요?"
"3년 전에 저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그만 정부의 감시망을 빠져나온 드라큘라에게 걸리는 바람에 이렇게 됐죠. 내가 너무 경솔했어요. 그 남자에게 너무 친절하게 굴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때 당신은 젊었어요."
"정말로 그랬죠."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그런 사건을 한 번쯤은 경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 나라에서 드라큘라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성인 인구의 비율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는 않겠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우리는 모두 비흡혈귀입니다. 언제라도 흡혈귀가 될 수 있잖아요?"
"사실 그렇게 나쁜 경험만은 아니에요."
여자가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앳되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흡혈귀가 된 이후로 사람들이...뭐라고 해야되나, 좀 더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물론 이건 정당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호의를 느끼는 건 언제나 약간은 기분이 좋죠."
"정말로 동의합니다."
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술에 취했고, 외로웠고, 키츠의 말대로 아름다움은 최상의 기쁨이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태양만 조심하면 당신은 언제나...젊음의 활력을 느낄 수 있어요. 사실 흡혈귀들은 나이도 거의 먹지 않는데다 조금만 주의하면 영생이 보장되죠. 신체도 가볍고 말이죠. 그러니까 흡혈귀가 된 사건은...어떻게 보면 저에게 새로운 기회와 시각을 주었다고나 할까. 저는 제 인생에 만족해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혹시 그녀가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기쁨을 내게도 나누어 주려고 결심한 걸까? 하지만 난 흡혈귀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물론 나는 흡혈귀들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굳이 정상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마다하고 흡혈귀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지나쳤다.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튀김이 담긴 접시를 내놓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녀가 팔을 위로 뻗자, 아주머니의 둔중한 몸이 가벼운 봉제인형처럼 위로 떴다. 여자는 너무나 홀가분하게 아주머니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그녀의 주름진 검은 목에 머리를 박아넣었고, 금수처럼 헐떡이며 그녀의 피를 빨았다. 그리고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피 묻은 입가를 연분홍 혀로 닦아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엇다.
"씨1발!"
"나를 비난하면 안되요."
여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난 비난할 생각 없어요! 단지 이건...어...비이성적이잖아요?"
"살인마가 사람을 죽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할까요?"
"당신은 살인마였나요?"
"아뇨. 난 흡혈귀죠. 난 그냥 도움이 필요하고, '정상인'들과는 좀 다를 뿐이에요."
나는 비좁은 포장마차의 통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음을 추스렸다. 바깥에서 찬 바람이 희미하게 새어들어왔다. 마치 얼음을 띄워놓은 물로 얼굴을 적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취기가 좀 진정되는 걸 느꼈다.
"후...맞아요. 미안해요. 사람을 차별하면 안되는 건데..."
"생리적인 거예요. 누구나 자기와 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싶어하죠."
"아뇨...아니에요. 난 교육받은 사람이라구요. 난 사람을 액면 그대로 판단하지 않아요. 당신이 아주머니를...어...흡혈했다는 건, 그냥 당신 자신의 흡혈귀적 본능 때문에 그런거죠. 그게 당신의 인간...-나는 다시 말을 멈춰야만 했다.-유사인간으로서-나는 '써' 라고 발음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의 존엄성과 숭고한 자아에 손상을 입힐 순 없는 겁니다."
우습게도, 나는 그때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무한한 자부심이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문명화된 인간 종족의 선량한 면을 열광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흡혈귀라는 것도 굉장히 차별적인 용어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피를 좀 빨 뿐이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어요. 당신에게는 좀 더 적합한 명칭이 필요해요. 음..."
그때, 누군가가 난폭하게 포장마차 문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경찰이었다.
"경찰이다. 꼼짝 마라!"
나는 우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내가 비무장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아니긴 뭐가 아냐! 네놈들이 선량한 시민을 죽였어!"
"여기 이 아가씨는 혈액 보급을 위해 다른 사람과 접촉해야만 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 분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이 일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죽었잖소?"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은 건 부작용이죠. 이 아가씨의 목적은 단순히 혈액을 보급받는 것 뿐이었습니다.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동의는 사후에 받으려 했죠."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저 여자가, 이 시민을, 죽였다는 거요."
경찰은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마음 속에서 정의감이 울컥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당신들 경찰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
"뭐라구?"
"당신들은 애초에 인간을 지키는 대상으로 보지 않잖소? 당신들은...그저 우리를 분류할 뿐이야. 범죄자와 비범죄자로 말이지. 그런 냉혹한 시각이 당신들을 비관적으로 만든 거야. 당신은 인간의, 살아남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당신들에게 인간은 모두 못미더운 대상이고, 남의 금품을 갈취하려 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반란분자로만 보일 뿐이지."
"아냐...우린 그렇지 않아!"
"사실이야. 그렇지 않다면, 이 여성분이 단순히 흡혈귀라는 이유만으로 잡아가려 할 리가 없지 않소?"
"뭐! 이 여자가 흡혈귀라고!"
"사실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경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관은 모자를 푹 눌러써 눈가를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로 당신이 흡혈귀라서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모두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합당한 취조를 받아야..."
"바로 그런 마음이!!"
나는 불을 토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당시 나는 용기와 정의감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그런 인식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겁니다! 뭐가 잘못된 겁니까? 국가도, 사회도, 관료제도 없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쓰잘데기없는 이데올로기와 편견으로 얼룩진 전문적인 범죄학이 없었던 태고의 시절을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살인마도, 강간마도, 흡혈귀도 그 시절에는 모두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 누구도 죄인과 비죄인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린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우린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다른 특정한 사람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차별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여자가 내게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안되요."
"하, 하지만...그럼 법은 어떡합니까? 정의는 어떡하구요?"
경찰은 이제 흐느끼고 있었다. 여자가 미끄러지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경찰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나요? 원시 상태가 되면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여자는 경찰의 목을 깨물었다. 나는 석류쥬스같은 피가 온 바닥에 흩뿌려지는 걸 보았다. 경찰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고, 나는 심란해졌다.
"잘 모르겠군요. 벌써 두 명이나 죽었어요."
"어머, 이 사람들은 죽은 게 아니에요."
"네? 안죽었다구요?"
"물론이죠. 이 사람들은 내일 밤이 되면 부활할 거예요. 그것도 흡혈귀가 되서 말이에요. 영원한 젊음과 넘치는 힘이 이들에게 보장되어 있어요."
"하지만...어떤...부작용은 없나요?"
"자유의지가 없어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겠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은 다시 편안해졌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 날, 인간의 선한 마음이 아직 이 냉혹한 시스템에게 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온 인류가 차별받지 않고 살 날이 올 것임을 진지하게 믿게 되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윤리적으로도 껄끄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가? 한때 동성애 로맨스물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어야만 했다. 어째서였을까? 그건 우리의 마음 속에 동성애는 '죄악' 이라는 편견이 뿌리 깊게 잠식해 있었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이 서로 자유롭게 사랑하는 문학을 쓴다 할지라도, 끝에는 그들에게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주어 자신의 죄책감을 정화하려 했다. 어쩌면 내가 겪은 일과 이 이야기는 같은 맥락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흡혈귀는 여전히 잔혹하고, 강인하며, 사악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내가 흡혈귀 여성과 맺은 유의미한 관계를, 우리의 무의식은 어떻게든 부정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망막에서 편견을 한꺼풀 벗기고 나면, 순수한 원시의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차별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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