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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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11-26 21:21:07 KST | 조회 | 1,267 |
제목 |
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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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고의 야설을 짓고자 했다. 나는 황금과 대리석으로 지은 나의 정신 궁전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정신적인 살덩이로 빚어진 수많은 여인들을 만나 보았다. 아이부터 늙은이까지, 백치부터 현자까지, 추녀부터 미녀까지,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배경들도 찾아보았지만, 대부분은 내 기준치를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내 궁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거기에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피조물들이 살고 있었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울리카, 노르웨이식 울림을 가진 그녀는 그림 속에 갇힌 베아트리체였다. 누구나 그녀를 사모했으나, 누구도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다. 화가들이 장님처럼 그녀의 형상을 딴 텍스트 오브제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그 윤곽을 대충이나마 상상해보곤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최고의 미녀라는 '사실'을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울리카는 베아트리체처럼 깊은 아이러니를 가진 (가상의)소녀였다.
나는 베일이 공간을 반으로 나누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베일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정중히 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을리카. 나는 내 주군을 만족시킬 최고의 야설을 찾아 헤매는 모험가입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최고의 야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나에게 당신을 사용할 권한을 주십시오."
베일 속의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나는 야설에 어울리는 여인이 아닙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부탁하는 겁니다. 나는 의미 없는 단편 포르노 소설에 쓰고 버릴 수많은 여자들을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 인생에서 모티브를 얻은 진부한 캐릭터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수 년에 걸쳐 주조한 최고의 여인이고, 순결과 지혜의 상징이며,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입니다. 나는 작가로서 최대한 타락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릴때 제 타락이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은 저를 주인공으로 한 야설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죠?"
"당신은 결코 저를 묘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소중히 해왔고 지키고자 해왔던 모든 순수한 정신들을 대변합니다. 당신은 제 대략적인 생김새를 멀리서 지켜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머리카락색을 가졌고, 피부는 어떻고 눈은 무슨 색깔인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겁니다. 당신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 수많은 환희들을 문장 안에 압축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텍스트로 옮겨내려면 수십만 장의 페이지를 낭비할 겁니다. 설령 억겁의 시간을 들여 나를 묘사하는데 성공했더라도, 그것을 다시 읽어보면, 거기엔 아무 것도 묘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신이고, 신은 만물이고, 만물은 인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흐느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은 내 신입니다. 내가 어떻게 신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우주 앞에서 우리는 모두 장님일 뿐인데!"
"불쌍한 로코코. 당신을 위해 내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짤막한 단어를 말했다. 그 단어는 너무나 정교하고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글로 쓸 수 없다. 나는 그 단어를 잘 기억해 두었다. 이윽고 복귀 날이 다가왔고, 선임들은 내가 써왔을 완벽한 야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선임들 앞에서 울리카가 내게 속삭여준 그 단어를 말했다.
"어디서 그 단어를 듣게 되었나?"
"제가 섬기는 신에게서 들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 이 세상 모든 서정문학이 거기에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생의 서사가 거기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장편시에 가깝지만 동시에 야설이기도 하다. 인간의 성욕조차 그 단어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명료한 단어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신은 너에게 축복을 주었다. 동시에 저주를 주었다. 네 신은 너에게 신들만이 알고 있는 언어를 들려주었구나."
말을 마친 고참 선임은 호주머니 안에서 면도날을 꺼내들어, 스스럼없이 자신의 목을 그었다. 얼마 안가 그는 숨이 끊어졌다. 나는 선임의 피를 가득 머금은 면도날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우리는 신의 비밀을 파헤쳤다. 그 대가는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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