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XP

서브 메뉴

Page. 1 / 3590 [내 메뉴에 추가]
글쓰기
작성자 프징징
작성일 2010-11-25 21:11:27 KST 조회 2,545
첨부
제목
[감동]믿거나 말거나-임진왜란의 숨은 명장 김충선(BGM)
파일포켓 이미지

부산진이 순식간에 함락됬다.. 같은 표현인데요.
당시 부산진을 막았던 정발장군은 필사적으로 왜적들을 막았으며 성내군민들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저 문장을보고 조선의 장수들이 무기력하게 패배하였을거라 생각하시는 분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속적인 허위 신고시 신고자가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고 사유를 입력하십시오:

발도장 찍기
베플 아이콘 아사달제1연대 (2010-11-25 21:18:45 KST)
12↑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김충선 말고도 수많은 투항 왜인이 있었으나
정말 현명하기 그지 없으신 선조병신전하께서는
이들을 아주 후하게 푸대접 해주셨습니다

광해군당시 괜찮은 요직에 오른 항왜군인도 상당수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강등 당하고 사선(死線)에 배치되 사실상 죽을자리를 보직으로 받았죠
더해, 인조 반정당시 푸대접 받아 빡친 이괄 장군이 항왜군을 앞장세워 관군을 패배 시켰죠
이괄의 난의 실패 이후 항왜군인들은 씨가 말랐습니다
김충선(샤야가)장군의 경우 이괄에 난에 참여 안하고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을 이끌며 청군과 싸웠습니다.
베플 guardunit (2010-11-25 21:48:46 KST)
5↑ ↓1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1. 전쟁에 대한 대비를 했습니다. 겨우 부사관이던 이순신을 몇단계나 끌어올려 장군급으로 만들어 전라좌수사로 배치한것이 선조입니다. 조정 대신들이 유래가 없는 특급승진이라며 엄청난 반대를 했지만 선조는 그만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것이니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조선 조정이 임진왜란의 전쟁준비에 임함에 있어 착각한것은 일본군의 규모였습니다. 일본은 30만 대군을 상륙시켰으나 조정은 고작해야 3~5만 수준 아무리 많아야 10만미만의 군대를 상정하고 준비햇습니다.

2. 조총은 이미 조선조정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전에 이미 대마도주가 진상한 조총을 조정대신들과 선조가 구경했으며 그 효용성과 배치비용등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다만 조선의 화포에 비해서 비효율적이라는 평가가 높았기에 당시엔 그다지 높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인조던가? 북벌을 외치던 왕이 조총부대 3만을 준비했었죠.

3. 김충선이 누구인가는 아직까지 확실히 답이 나오진 않았음.
다만 여러 조사를 통해서 사야가와 또한명의 인물이 유력인물로 낙점되었으나 확실하진 않음.
김충선은 애초에 조선에 넘오온 이유가 망명을 위해서 였으며. 혼자가 아닌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대량 망명을 선택했음.
오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은 사야가=김충선이란 결론으로 소설을 씀.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야가=김충선이란 존재를 빼면 그다지 재미있는 소설은 아님.

4. 조선과 명군이 일본군에게 가장 두려워했던것은 조총이 아니라 긴 일본도를 사용한 근접 백병전이었음.
임란 이후 조선과 명은 군대에 일본도를 받아들이고 체계적인 훈련법과 전술체계를 개발함.

5. 김충선은 전쟁당시 이순신에게 조총의 설계도를 보내는등 초기 항왜의 지도적인 역할을 함.
임란 당시 항왜의 숫자는 수만에 달했다고 함.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만 항왜가 1만에 달했흠.

6. 김충선은 전후 대구 달성군에 정착. 모하당 문집등 조선인으로 살다 감.
김충선 혼자 정착한 것은 아니며, 그를 따르던 세력이 정착한것으로 추정됨.
베플 아이콘 프징징 (2010-11-25 21:25:04 KST)
3↑ ↓0
센스 이미지
선조부터 좌파 우파 나워서 싸우다가 왜군이 친입할
신하들이 모두 한목소리 낸적이 있습니다 그건 모두 도망가자 였죠
지금도 다를게 없습니다 전쟁나면 제자리 지켜서 일할 국회의원이 몇이나 될까요?
아이유[257] (2010-11-25 21:18:41 KST)
0↑ ↓1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김충선 장군의 존재는 알았는데 일본인이라는 건 처음알았네요...............
원숭이 중에도 사람이 나는 경우도 있구나
아이콘 아사달제1연대 (2010-11-25 21:18:45 KST)
12↑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김충선 말고도 수많은 투항 왜인이 있었으나
정말 현명하기 그지 없으신 선조병신전하께서는
이들을 아주 후하게 푸대접 해주셨습니다

광해군당시 괜찮은 요직에 오른 항왜군인도 상당수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강등 당하고 사선(死線)에 배치되 사실상 죽을자리를 보직으로 받았죠
더해, 인조 반정당시 푸대접 받아 빡친 이괄 장군이 항왜군을 앞장세워 관군을 패배 시켰죠
이괄의 난의 실패 이후 항왜군인들은 씨가 말랐습니다
김충선(샤야가)장군의 경우 이괄에 난에 참여 안하고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을 이끌며 청군과 싸웠습니다.
아이콘 MovS_Kane (2010-11-25 21:22:15 KST)
0↑ ↓0
센스 이미지
선조부터시작해서 신하들의 병맛짓은 답없음 지금도 바뀐거없음
아이콘 프징징 (2010-11-25 21:25:04 KST)
3↑ ↓0
센스 이미지
선조부터 좌파 우파 나워서 싸우다가 왜군이 친입할
신하들이 모두 한목소리 낸적이 있습니다 그건 모두 도망가자 였죠
지금도 다를게 없습니다 전쟁나면 제자리 지켜서 일할 국회의원이 몇이나 될까요?
아이콘 무일푼-스타트렉 (2010-11-25 21:25:35 KST)
0↑ ↓0
센스 이미지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막장 테크는 그야말로 전통.

하여튼 그 동방예의지국이 지금은...미국물 먹고...부칸은...에라이
아이콘 sad.zeratul (2010-11-25 21:32:55 KST)
0↑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왜란을승리하기까지 타국의 숨은공신이 둘있는데 한명은 위에서나온 김충선이고
다른한명은 명나라사람으로 후에 귀화한 해주석씨의 시조 석성이란인물입니다
당시역관 홍순원과의 은혜를갚으려고 명이 조선에 파병하는데 큰힘이되어줬고
그때문에 멸문을당해 조선으로 귀화해 해주석씨의 시조가 되었죠
석성 스토리도 알고나면 감동적임
아이콘 지나가던카미씨 (2010-11-25 21:34:10 KST)
0↑ ↓0
센스 이미지
김충선 그 맹꽁이서당이랑 같은사람이 그린 겨레의 인걸 100인에도 나오죠... 좋은사람
아이콘 날카로운빌드 (2010-11-25 21:38:35 KST)
0↑ ↓0
센스 이미지
아 군대에서 정신교육시간에 한번 봤었는데..............
guardunit (2010-11-25 21:48:46 KST)
5↑ ↓1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1. 전쟁에 대한 대비를 했습니다. 겨우 부사관이던 이순신을 몇단계나 끌어올려 장군급으로 만들어 전라좌수사로 배치한것이 선조입니다. 조정 대신들이 유래가 없는 특급승진이라며 엄청난 반대를 했지만 선조는 그만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것이니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조선 조정이 임진왜란의 전쟁준비에 임함에 있어 착각한것은 일본군의 규모였습니다. 일본은 30만 대군을 상륙시켰으나 조정은 고작해야 3~5만 수준 아무리 많아야 10만미만의 군대를 상정하고 준비햇습니다.

2. 조총은 이미 조선조정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전에 이미 대마도주가 진상한 조총을 조정대신들과 선조가 구경했으며 그 효용성과 배치비용등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다만 조선의 화포에 비해서 비효율적이라는 평가가 높았기에 당시엔 그다지 높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인조던가? 북벌을 외치던 왕이 조총부대 3만을 준비했었죠.

3. 김충선이 누구인가는 아직까지 확실히 답이 나오진 않았음.
다만 여러 조사를 통해서 사야가와 또한명의 인물이 유력인물로 낙점되었으나 확실하진 않음.
김충선은 애초에 조선에 넘오온 이유가 망명을 위해서 였으며. 혼자가 아닌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대량 망명을 선택했음.
오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은 사야가=김충선이란 결론으로 소설을 씀.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야가=김충선이란 존재를 빼면 그다지 재미있는 소설은 아님.

4. 조선과 명군이 일본군에게 가장 두려워했던것은 조총이 아니라 긴 일본도를 사용한 근접 백병전이었음.
임란 이후 조선과 명은 군대에 일본도를 받아들이고 체계적인 훈련법과 전술체계를 개발함.

5. 김충선은 전쟁당시 이순신에게 조총의 설계도를 보내는등 초기 항왜의 지도적인 역할을 함.
임란 당시 항왜의 숫자는 수만에 달했다고 함.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만 항왜가 1만에 달했흠.

6. 김충선은 전후 대구 달성군에 정착. 모하당 문집등 조선인으로 살다 감.
김충선 혼자 정착한 것은 아니며, 그를 따르던 세력이 정착한것으로 추정됨.
아이콘 뉴비두기[바퀴] (2010-11-25 21:49:04 KST)
2↑ ↓0
센스 이미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보면

동인과 서인이 도망가는곳도 서로 단합이 안되니깐

"너네는 도망가는것도 합의를 못보냐!!"
아이콘 진유온 (2010-11-25 22:48:28 KST) JinYuOn@Kalimdor (Lv.0)
0↑ ↓0
센스 이미지
선조가 능력은 있으나 이상한데 써서 존나게 욕을 처먹지요...
아이콘 아사달제1연대 (2010-11-26 00:19:28 KST)
0↑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1. 파격적인 인사 이동을 주장한것은 선조가 아니라 유성룡 이였죠 동래부사 송상현도 천거 받아서 임명 된거고요
맨처음 전라좌수사로 이순신이 임명되자 사간원에서 옩갖 이순신에 대한 탄핵 상소가 올라왔지만 선조가 거절했다기 보다는 유성룡이 중간에 사간원의 탄핵상소를 컷한게 더 공이 큽니다

2. 일본은 당시 조선보다 인구수가 적었고 반모병제적 성격인 일본군보다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병농일치제의 대량 인력동원이 가능한 조선보다 병력이 더 적습니다 세조시설 당시 가용 병력수가 약 50만 이였습니다. 문제는 중종반정이후 공신전이 너무 많아지고 공신전 인구에 대한 가용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았기에 병력 숫자 평가가 낮은거죠
인구상이나 생산력,과학기술상 당시 일본은 조선을 이길 국력이 안됬습니다.

3. 조총에 대해 경시한건 신립장군이 확신 때문이였죠 여진족이 사용하던 조총이 워낙 후졌고(일본군이 쓰던것은 머스킷 수준에 가까웠지만 여진족은 아케부스급의 화포수준 이였습니다)
조선군의 사수 병력이면 상대 가능한 정도 였습니다. guardunit님이 말씀하신대로 조선군이 후달리는건 단병전이엿죠
guardunit (2010-11-26 01:21:06 KST)
0↑ ↓1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아사달제1연대//
1. 전쟁 위험을 감지하고 대규모 군 인사이동은 선조의 교지로 시행된 것임.
실록엔 쓸만한 무인을 천거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여러 신하들이 무장을 추천했고 그중에 두사람이 중복으로 이순신을 천거함.
처음부터 전라 좌수사로 올라간게 아니라 정읍현가을 거쳐 5~6단계의 파격적 승진을 거침.
유성룡이 사간원의 탄핵 상소를 컷한게 사실이면 유성룡은 역적으로 죽어야 함.
신하가 왕에게 올라가는 상소를 지맘대로 손대다니...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거나 도움을 줬다거나 하는 내용은 오로지 유성룡 본인이 작성한 사료에서만 나타남. 실록엔 전쟁전 유성룡과 이순신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없음.

2. 현재나 지금이나 한반도보다 일본이 면적이 넓음.
당연하게도 인구도 더 많았고. 다만 당시의 지리적 지식상 조선이나 일본 모두, 조선이 더 크고 일본이 더 작은줄 알고 있었음.
당시 일본은 도요도미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직업잃은 무사들이 넘처났음.
정확한 인구는 모르지만 전국시대를 막끝낸 일본쪽이 (개국이래 300년가까이 평화중이던 조선보다) 인구비율상 정예 군인이 더 많을수밖에 없음.
세조시절 조선 병력과 공신전 남용은 맞음.
생산력 또한 일본의 각영주들로 인해 조선과 비등했거나 많았을수 있음. 다만 지방영주들로 인해서 그것이 조선처럼 분배가 되지 않는것은 확실함.
아이콘 DogDRAKE (2010-11-26 08:28:14 KST)
0↑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조총이 당시 혁신적이긴 했어도, 조선에는 더 진보한 화약무기가 당시 존재했습니다. 천자총통이나, 신기전같은 물건이요. 이건 고려시대부터 쭉 존재했던 물건인고 계속 발달되어 왔는데, 그동안은 조선의 화학무기 발달을 경계한 중국의 외압 때문에 대량생산, 무기계랑이 힘들었는데.. (신기전을 스스로 봉하는 등...)

임진왜란 터지고 나서 화약무기가 반짝 쓰이기 시작했죠..
끝나고 나서 다시 중국의 외압이나, 전후 복구 때문에 다시 묻히긴 했지만요..;
아이콘 DogDRAKE (2010-11-26 08:34:18 KST)
0↑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당시 일본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일본열도보다 조선반도가 더 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뭐랄까, 황하 문명에서 시작되는 중국 문물을 조선이 받아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형식이었기에,
일본은 중국에 대한 동경이 굉장히 컸더군요. 일본이 직접 중국과 교류했다는 기록도 증거자료도 많지만, 거리가 너무 멀고, 위험해서 조선반도를 통해 넘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 초반, 고려 때까지의 지도를 살펴봐도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1/3 정도 크기로 묘사 돼 있고 일본열도는 그 절반정도로 표현 돼 있죠 -_-;;; 임진왜란 전후로는 인식이 바뀌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조선인의 일본인에대한 무시는 사라지지 않더군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에만 안주했던 조선은 망했습니다. 이런 전처를 우리는 밟으면 안되겠죠..
플라시보효과 (2010-11-26 11:46:27 KST)
1↑ ↓0
센스 이미지
오호~유식한 사람 댑빵 많네...존경...(__)
댓글을 등록하려면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로그인 하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롤토체스 TFT - 롤체지지 LoLCHESS.GG
소환사의 협곡부터 칼바람, 우르프까지 - 포로지지 PORO.GG
배그 전적검색은 닥지지(DAK.GG)에서 가능합니다
  • (주)플레이엑스피
  • 대표: 윤석재
  • 사업자등록번호: 406-86-00726

© PlayXP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