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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5-18 10:34:53 KST | 조회 | 3,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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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당시 ROK 해병대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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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paran.com/oldbook/23545476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서정근 군사전문지 D&D Focus 기자
> 전대갈이 왜 광주에 해병대를 안 보내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군....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전대갈. 장세동 일당들이 일으킨 12.12사태 때 그냥 해병대가 '정치와 군은 별개다.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쌩까고 일당들 진압을 위해 투입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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