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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6-21 00:42:58 KST | 조회 | 3,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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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晟不敗 구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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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에게 붙는 최고의 칭호.. 불패..
내가 아는한..자신의 이름뒤에 불패라는 단어를 붙인 클로저는 임창용 구대성 단 두명뿐이다..
그만큼 구대성은 30년 프로야구 역사중에서도 가장 독특했고 뛰어났다..
올시즌 잘해주고 있지만.작년까지만 해도 마운드에서 벌벌떨던 한환 신인투수들을 볼때마다..
난 구대성을 떠올렸다...
지켜보는 팬들조차.. 살떨리는 상황에서도.. 모자는 대충 머리위에 얹어놓고..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마운드로 터벅터벅 등장... 거만하게 상대타자를 노려보던 모습..
그 위기를 해결하면 포효한번 할만할텐데 씨익 미소한번 짓고는 다시 터벅터벅 내려가는모습..
이글스 팬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이름.. 대성불패.. 구대성이다...
93년 입대한 구대성은.. 사실.. 더 일찍 이글스에 올수 있었다...
88년 빙그레 운영부장이 다리밑 움막에 살던 대전고3학년 구대성을 직접 찾아가 당시로서는 꽤 거액인 3000만원을 제시하며 영입의사를 밝혔지만..
야구로 돈 벌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며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치료비 부담과 대전고생3명의 동시 진학을 조건으로 내 건 연세대를 마다하고 한양대로 진학하는데...
그이유는.. 한양대에서 아버지의 치료비 전액 부담에 더해, 당시 대전고 3학년생 전부의 진학을 보장했기 때문...
가난했지만.. 마음 씀씀이만은 넓은 대인 구대성의 면모가 엿보인다...
사실.. 구대성의 마음씀씀이를 볼수 있는 일화는 여러개 있다..
송진우 양준혁이 선수협을 만들기위해 고생했던 그때.. 활동자금을 선수들 사비로 해결해서
활동비문제로 힘들어하던걸.. 송진우의 전화 한통에 일본에 있던 구대성은
다음날 구대성은 말없이 천만원을 송금해왔다고 한다....
롯데의 아픈손가락인 임수혁선수.. 임수혁선수가 그라운드애서 쓰러지고 나서
2003년 잠시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의 사무실에 들려 아무것도 묻지말고 임수혁선수의 지원금으로 전해달라고 2000만원을 건내주었다..
15년 롯데의 팬인 친구와 역시 15년 한화의 팬인 내가 구대성의 은퇴식에서 같이 눈물을 흘린 이유이다...
이처럼 구대성의 마음씀씀이는 참으로 넓었다.. 아직도 14평대의 아파트에서 살았고.. 10년이 넘은 차를 타고 다녔다.. 모은돈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던 그는 그동안 그가 던진 스트라이크보다 더한 스트라이크를 던지며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한화의 레전드들이 그러하듯.. 구대성역시 혹사를 원망하기보단..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빙그레를 마다하고 진학한 한양대에서 조차.. 좌대성 우민태라 불리며 정민태와 함께 리그를 평정했지만..매번 150개가 넘는 공을 하루걸러 등판하며 뿌려댔고..
한화에 입단했을때 이미.. 누워버렸단 평가를 들었던 그 팔로 이글스의 불펜을 지탱했다...
생각해보면.. 이글스 역사를 통털어서도 불펜이 강했던 적은 없었던것 같다..하지만...아이러니 하게도.. 이글스 불펜이 약했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다.. 구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대성의 마무리는 지금의 상식을 파괴한다.. 6회부터 9회까지 던지고.. 다음날 선발로 나왔으며 다시 다음날 7회에 등판하는 식이었다..
그의 휴식일은 에이스 정민철이 등판하는 날뿐이었다.
1996년 18승 24세이브 방어율 1.88 탈삼진183개..
보직이 마무리 투수인 선수가 세운기록이다... 믿겨 지는가?....
이글스의 단 한번뿐인 우승..정민철-송진우-이상목- 구대성 딱 네명의 투수를 가지고 우승을 한건.. 쉼없이 등판해서도..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공을 뿌린 구대성 덕분이었다.
유독 그해 우승이 감격스러운건.. 마지막 순간에 가장 영광스런 자리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다...
우승후 일본에 이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돌아온 구대성 하지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세월이 흐름이.. 더이상 내 기억속의 구대성으로 남지 않을까봐였다..
하지만.구대성은 구대성.. 예전과 다름없이 자신만만했으며 배짱좋은 독수리의 수호신이었다..
예전의 구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에는 없던 노련함으로.. 상대타자를 돌려세웠다.
2006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삼성의 젊고 팔팔한 투수들이 줄줄히 나와도.. 홀로 맞서 막고 막던 그 모습은 팬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전해 주었다.
고1시절 3타자 연속볼넷후 3타자 연속삼진을 잡고는 감독에게 본인을 시험했다는 일화부터
IMF한파가 몰아치던 90년대 후반..구대성과의 연봉협상에서 구대성은 구단 최고 연봉을 요구 하지만.. 구단은 IMF로인해 이를 줄수 없었고.. 구단은 모그룹 자금 상황을 구대성에게 얘기한다.. 그러자 구대성은 한화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세워주기로한 9천8백이 아닌 전년도 연봉의 동결액인 9천3백에 사인한다.
오히려 구단이 돈을 더주겠다.. 선수는 싫다고 하는 초유의 사태..
나중의 인터뷰에서 "뭐.. 돈 때문에 야구하는거 아니지 않나. 구단에서는 재정 보충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나는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수 있어서 좋다"란 한마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마쓰자카와의 대결에서 1회부터 9회까지 156개의 공을뿌리며 일본킬러로써의 명성을 확인시켜준 일이나..
은퇴후 본인의 혹사논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혹사당했다라고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혹사에 정의는 없다라 밝히며 40이 넘어도 뛰었다며.. 만약 보호를 해줘서"50"까지 던질수 있다면 그렇게 해줘야 하지만 이라며 껄껄 웃는 모습...
본인은 감독이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갈수 있도록 준비할뿐이라는.. 그게 프로의 모습이고 팬들에 대한 예의라며 오히려 본인이 일축했다..
항상 후배들에게 기술전수를 아끼지 않던 구대성.. 나이가 본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던 류현진에게 본인의 써클체인지업을 전수해 국가대표 투수로 키워냈으며..
후배들에게 자신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주고 싶다고.. 하지만 후배들이 반드시 잊지 않았으면 하는건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기술을 통해 얻는 자신감 그게 투수의 재산이다라며
항상 자신감을 강조하던 모습.
내가 구대성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두둑한 배짱과 시크함 무심한듯 다정다감한 모습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릴적 아버지와 그의 투구에 감탄하던 모습을 세월이 흘러 더이상 젊징 않는 그의 투구를 역시 아버지와 함께 공유할수 있어서이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이글스에 와 주었다면 만년2인자를 벗어날수도 있었을 테고..
지긋지긋한 호랑이 컴플렉스에 시달리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늦게라도 이글스에 와줘서 슬픔과 영광을 함께 할수 있어서.. 떠나간 후에도 잊지않고 다시 돌아와줘서 너무 고맙다...
NPB 기록
KBO 기록
쿠옹 커리어하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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