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손수건으로 유명한 리더스다이제스트 글 모음 중 하나. 여기서 버큰헤이드는 hms birkenhead를 오역함.
우리 주변에는 많은 전통이 있다. 좋은 전통 나쁜 전통 재미있는 전통 짓궂은 전통. 이 전통은 문화와 함께 종종 우리의 행동 양식을 지배한다.
해난사고 시 두 가지의 전통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함장이 배와 함께 운명을 같 이 하는 것으로 특히 2차 대전 때 일본 해군에서 군함이 적의 공격으로 침몰 할 때 함장은 운명을 군함과 함께 했다.
지금은 이 전통을 지키는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억지로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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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 부분은 잘못된 주장이다.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일화를 생각한 듯 하다. 흔히 Captain goes down with ship이라고 표현되는 이 전통도 다음에 나오는 버큰헤드 경우에 확립되었다. 해난사고 후 책임을 묻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을 때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모두 선상에서 죽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키플링 등 유명인사들이 이 비극을 기리는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도 배와 운명을 함께했으며, 1971년 인도 파키스탄 전쟁 중에 인도해군의 마헨드라 나스 물라 함장은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가장 최근인 2012년 10월 29일에도 HMS Bounty 호의 선장 로빈 월브리지 대령이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배를 버려라"였다.
__________ 두 번째 전통이 바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이다.
이야기는 1852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사병들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백 30명으로, 그중 1 백 30명이 부녀자였다.
2월 27일.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킬로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오전 2시 한 밤중의 일이었다.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선체의 앞부분은 이내 바닷속으로 침몰되었으나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뒷 쪽으로 피신을 했다.
선상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되는 장교들조차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이들 뿐이었다. 남아 있는 구조선은 3 척 밖에 없었는데 1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백 8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이 없을 때의 훈련 시처럼 민첩하게 집합하여 열을 정돈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동안 한쪽 편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 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관병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머리도 모두 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얼마 후에 몇 사람이 수면 위로 떠 올라왔다. 용케 물 속에서 활대나 나무판자를 그러쥘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날 오후 구조선이 그 곳에 도착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4백 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그는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큼지막한 판자에 매달려 있었는데, 가까이서 두 선실 보이가 죽어가고 있는 모양을 보자 판자를 그들에게 밀어 주었다. 판자 하나로는 도저히 세 사람이 매달려 있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두 보이 대신 자진해서 물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었다.
<버큰헤이드호>의 이야기는 영국은 물론 곧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져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에 이 <버큰헤이드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후로 수많은 인명을 살려 낸 것이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다.
이 전통은 다시 한번 그 가치를 발휘하였다. 역시 영국군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호>가 어느 날 아침 6시경 알제리아 해안 약 80킬로미터 해역을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日出을 구경하려고 일찍 일어난 승객들은 그 순간 갑자기 갑판이 흔들리면서 배가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검은 연기줄기가 깨어진 나무 틈 사이로 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우르릉 하는 울림 소리가 배의 중앙부에서 들려 왔다.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선객들에게 밑의 선창 출구로 한 선원이 비틀거리며 올라왔다. 그는 이미 머리털과 눈썹이 타 없어졌고 한쪽 뺨이 불에 익어 벗겨져 있었다.
"불이야!"하고 그 사내가 외쳤다. "보일러실이 폭발했소!"
보일러실에서 일어난 금방 배 중앙부는 불길에 휩싸였다.
윌리엄 윌슨 선장은 불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윌슨 선장은 최후의 단안을 내려 배를 포기하도록 명령했다.
인명구출작업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비관적이었다. 승객과 선원을 합하여 그 배에는 총 1천 5백 1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 여자가 1백 25명, 어린이가 87명 그리고 병약자가 17명이었다. 사용가능한 구명정은 12척이었다.
많은 구명정과 구명대가 불길 저쪽에 있었던 것이다. 구명정은 여러 종류여서 정원이 49명부터 1 백명까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구조대상은 전체 승객에 비해 극히 제한된 숫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역시 물고기밥이 될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승객들은 모두들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명정이나 구명대로 뛰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선군대 사령관 로버트 스코트 대령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금 우리는 <버큰헤이드 연습>을 실시중에 있습니다. 누구든 갑판 위에서 움직이지 말고 서 계십시오. 구명정 지정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승객 중의 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부인이 남편인 영국사관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그 장교는 자기 부인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부 알려 주지는 않았다. 이 말은 배를 포기할 극한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사용되는 말로서 부녀자를 모두 구명정에 무사히 태울 때까지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 위의 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훌륭히 지켰다. 군인들이 갑판 위에 정렬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 민간 선원들은 연기 속에서 절반 장님이 된 채로 자기 위치를 지켰다. 구명정 담당 선원들이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인도하여 구명정에 태웠다. 대열에 서 있는 남편 혹은 아버지들은 구조선이 늦게 도착할 경우 그 동안 아내와 자녀들이 몸을 덮는 데 쓰게 하기 위하여 웃옷을 벗어 구명정 쪽으로 던져 주었다.
이윽고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병약자들이 모두 구명정으로 옮겨 탔다. 그런데 구명정에는 약간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문제는 병사들과 선원들 중에서 누구를 그 구명정에 태울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장교 한 사람이 '어떤 순서로 사람들을 태울까요?"하고 사령관에게 물었다. 스코트 대령은 이와 같은 비상시에 적용해 온 영국의 오랜 규칙을 생각해냈다.
"물론 장례식 순서를 따라야지. 제일 젊은 사람부터!"
장교들이 사열을 하면서 젊은이들을 지명하여 구명정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지만 병사들은 침착한 행동으로 질서를 잘 지켰다. 마지막 구명정에 정원이 다 타고 났을 때 갑판 위에는 아직도 약 3백 명의 군인과 선원들이 남아 있었다. 구명정들이 모선을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들은 전형적인 영국 군인의 자제력을 훌륭히 발휘하여 마음 속의 감정을 조금도 들어내지 않았다.
윌슨 선장은 배를 돌아다니며 혹시 낙오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의 복장은 이제 걸레 쪽이 되어 있었고 구두도 불에 타서 창이 떨어져 나가 발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나무통, 판자 그리고 무엇이든 물에 뜨는 물건은 모조리 바다로 던지게 했다. 부하들과 선원들이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코트 대령이 병사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상의와 구두를 벗고 바다로 뛰어내려라. 그러나 누구든 결코 구명정으로 헤엄쳐 가서는 안된다!"
불길에 쫓긴 병사들은 차례차례 물로 뛰어 들었다. 한 늙은 갑판선원은 의자들을 밧줄로 묶어 물에 빠진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는 임시구명대를 골몰하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그도 물로 뛰어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스코트 대령과 윌슨 선장이 마지막으로 배를 버렸다.
"당황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의 자제력은 과연 훌륭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었다."
윌슨 선장은 후에 그 때의 상황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공교롭게도 사건 현장 주위에는 다른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8시 15분 경이었다. 저 만치 구명정 위에서 요란한 환성이 터져 올랐따. 저 멀리 수평선 위에 한 화물선이 이쪽으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30분 뒤에 다른 배 3 척 또 나타났다.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구조에는 조심성과 시간이 요청되는 법이다. 10시 15분에 최후의 생존가자 구출되었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의 불덩어리가 된 선체는 그 때 물 속으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결과적으로 처음 보일러 폭발 당시 사망한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버큰헤이드 연습>이 성공한 것이다.
버큰헤이드 전통을 이야기함에 있어 저 유명한 <타이타닉 호>의 비극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1912년 4월 14-15일의 일이었다. 2천 3백 명이란 엄청난 수의 승객이 떼죽음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승객들과 선원들은 버큰헤이드의 전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불문율을 어김없이 지켰다.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명사들이 최하등 선실의 이민 가는 가난한 부인들을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였다. 보일러실과 기관실을 맡고 있던 37명의 기사들은 모두 죽는 순간까지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7명의 악사들은 침몰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찬송가를 연주하였다. 그들 역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승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천 5백명의 건강한 남자가 비참하게도 모두 수장되었다.
버큰헤이드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있었던 때문이었다. 자제와 용기―이것은 비상시에 직면할 때마다 영국 국민들이 충실히 지켜 내려온 자랑스런 전통이다.
영국이 선진국인 이유는 경제 대국 때문이 아니다.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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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은?
출처 : http://cafe.daum.net/Europa/3L0P/2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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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배를 버려라!선원도 버려라!승객도 버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