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에 얽힌 일화들.
- 유한양행 설립 당시 조선에 있던 제약회사들은 신문광고를 할 때 제대로 된 효능이나 성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만병통치약 따위로 광고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그런식의 허위과장광고를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제품의 이름과 성분, 용도, 약품 제조를 담당한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만을 광고에 실었다.
- 만주로 시장 조사를 떠났던 회사 간부가 '지금 만주에는 마약성 약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약품을 팔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유일한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해당 간부를 잘라버렸다.
-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0년대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왔다.
- 해방 후 여러 경쟁 제약회사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 회사들은 이른바 '영양드링크' 같은 건강음료를 만들어 떼돈을 벌어들였다. 회사 임원들이 우리도 저런 건강음료를 만들어야 한다고 유일한에게 건의하자 유일한은 '지금 나보고 한강물에 설탕을 타서 국민들에게 먹이란 말인가?' 라며 단칼에 거절하였다.
- 유일한은 박정희 정부의 정치자금 제공 요구를 끝내 거절하였다. 빡친 박정희는 유한양행에 보복성 세무조사를 할 것을 지시. 그러나 유한양행은 정말 샅샅이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탈세를 전혀 하지 않는 회사였다. 당황한 정부는 유한양행이 만드는 약품 성분까지 일일이 검사하였으나 성분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결국 두손 두발 다 든 정부는 유일한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해줄 수 밖에 없었다.
- 1971년 타계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 사회에 기부한 액수가 무려 407억원. (참고로 이때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60원이었다). 딸 유재라 씨에게는 땅 5천평을 물려줬으나, 이 땅에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동산으로 꾸며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유일선 씨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켜줬으니 이젠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서 살아라' 라는 유언과 함께, 손녀가 대학졸업할때까지 쓸 교육비 1만 달러를 제외하면 단 한 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았다. 자식들도 아버지의 뜻을 본받아, 유일선 씨는 그 1만달러중 결국 절반만 쓰고 나머지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유재라 씨도 1991년 타계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 유일한 본인이 평생에 걸쳐 이룬 기업 유한양행은 능력있는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겼다. 현재 유한양행 경영진중에는 유일한 일가가 단 한 명도 없다.
- 더 놀라운 건 근로기준법을 다른 기업인보다 철처히 준수 했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노동자가 열약한 환경으로 노사간의 대립이 이어지자 분신자살을 하려 했을때 이상하게 여긴 유일한이 사측 협상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있느냐 묻자 그런건 사문화라고 답했던 사측 인사 전원을 다음날 전원 해고해버렸다. (왜 해고했는지 묻자 "근로기준법도 모르는 바보들에게 우리 회사의 미래를 맡길 순 없다!"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