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강건포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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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12-08 02:42:43 KST | 조회 | 271 |
제목 |
포니 아청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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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람은 물에 젖은 면도칼처럼 매섭게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나는 옷깃을 굳게 여미며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구렁이의 식도처럼 구불구불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카페테리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하루에도 수 백대의 전철들이 굉음과 함께 질주하는 지하철 역 한복판에 커피와 토스트를 팔 생각을 하다니. 나는 주인장의 안타까운 상업적 센스를 조롱하면서도 내심 고마워졌다. 안그래도 밤새 조잡한 포니 포르노를 보느라 온 몸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토스트와 커피가 어느 정도 피로를 덜어주리라.
"하, 포니 포르노라니."
나는 종이로 포장된 토스트와 미지근한 커피를 들고 카페 좌석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포니 포르노라니. 내 입으로도 '포르노' 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 저속한 애니메이션이 포르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의뢰인 지병규씨의 애처로운 눈동자가 내 뒷덜미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어찌할까. 이건 명백하게 승산없는 게임이다. 그 영상물은 포르노고, 지병규씨는 범죄자이며, 나는 어떻게든 법망을 기만하여 범죄를 은폐하려는 한 달변가에 불과할 뿐이다...
"김노말씨?"
뜨끈한 의식의 흐름 속에 품 담겨져 있던 내 정신을 느닷없이 끄집어 올린 것은 한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시선으로 이리저리 쫓고 있었다.
"김노말씨, 여기에요."
목소리는 내 바로 옆에서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한 여자가 서있었다. 유달리 피부가 희고, 큼지막한 검은 눈동자와 촘촘한 속눈썹을 가진 여자였다. 광대뼈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얼굴선은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했고, 오목하게 들어간 흰 목덜미가 인상적이었다. 정갈하게 댕기로 묶은 뭉툭한 머리카락은 그 여자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말의 갈기처럼 묵직하게 흔들렸다.
"...누구시죠?"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내 시선은 이제 여자의 복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하얀 피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검은 코트와 군청색 목도리. 하의는 청바지였다. 놀라울 정도로 잘 빠진 늘씬한 다리는...잠깐.
"잠깐만요, 아가씨. 방금 내 이름 부른 건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김노말씨.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요."
"왜죠?"
"그들이 오니까요."
"그게 대체 무슨..."
내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내 팔을 낚아채고 강제로 일으켰다. 그녀의 팔 힘은 공업용 프레스처럼 강력하고 무자비했다.
"제길! 뭐, 뭐하는 거요?!"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여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난 카페테리아 문 바깥에 서있는 한 무더기의 남자들을 보았다. 모두들 검은 코트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본 시리즈의 CIA 암살자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복장이었다.
"저 사람들...설마 날 쫓는 거요?"
내가 말을 끝마치자 마자, 검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과 내 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선글라스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난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남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일제히 나를 쳐다보더니, 곧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뛰어요."
여자가 내 팔을 붙잡은 채로 뛰기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달렸다. 어느 순간 ㄱ자로 꺾인 통로가 나타났다. 여자는 옆쪽의 벽으로 돌아 나를 밀치며 말했다.
"어디로 갈거죠?"
"3, 3번 홈이요. 내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소...자문을 구하러."
그 순간 남자 한 명이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자는 기겁할만한 속도로 팔을 휘둘러 날아드는 남자의 주먹을 막아내고는, 그의 팔을 붙잡고 비틀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동시에 여자의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남자의 머리에 직격했다. 남자의 몸뚱이가 태풍에 휩쓸리는 넝마주이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자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거기로 뛰어 가세요. 나도 갈테니까."
나는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여자의 예사롭지 않은 동작을 보자마자 그녀가 비범한 무공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일반인인 내가 그녀의 전투에 결코 이로운 변수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3번홈을 향해 질주했다.
여자가 잘 막아준 덕분인지, 내가 달려가는 동안 아무도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나는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넘었다. 막 전철이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닫혀가는 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승객들이 나를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도착했군요."
"맙소사."
나는 얼떨결에 민망한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내 앞에는 아까의 그 여자가 서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태연하게 내 옆에 섰다. 그와 동시에 전철 문이 일제히 닫혔고, 전철이 익숙한 소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때서야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곧장 여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아까 그 사람들은 뭐요?"
"당신을 쫓는 사람이에요."
"그건 나도 압니다. 중요한 건 저 사람들의 목적이 뭐냐는 겁니다. 대체 뭘 바라고 날 뒤쫓는 거요?"
내 질문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여자를 지켜보았다. 이제 보니 여자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앳된 용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18-20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거에요. 사람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뒤쫓지 않아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나마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추어 자문가 생활을 한지 어언 3년, 내가 누군가에게 원수를 질 만한 일을 했던가? 그런 적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너댓 명의 남자들을 고용해 뒤쫓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으로 옮겨가겠소. 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루나>라고 해요."
여자, 아니 소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
"설마 그게 이름이오?"
"내 수많은 이름 중에 하나죠."
소녀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이제 곧 당신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당신은 무조건 해답을 찾아야만 해요."
그렇게 말한 루나...는 코트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안에서 작은 책 하나가 딸려나왔다. 루나는 그 책을 내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참고가 되길 바랄게요. 김노말씨."
"대체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죠?"
나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내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 사이 열차가 덜컹거리며 멈췄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나는 전철에서 내리는 인파에 휩쓸렸다. 잠시 후 다시 전철 안으로 들어와 루나를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루나가 준 책의 겉표지를 들여다보았다.
<포니 캐릭터와 이퀘스트리아 창조-작가론을 중심으로>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나왔다. 학술서라니. 이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전개다. 하지만 그 실소가 내게 일종의 힘을 실어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루나가 준 책을 꾹 붙잡았다. 아청법, 지병규씨, 포니 포르노, 수상한 사내들, 그리고 의문의 소녀 루나...이 일련의 사건들에는 일종의 소설 플롯과 같은 패턴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굳게 결심했다. <반드시 이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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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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