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강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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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2-01 21:17:44 KST | 조회 | 159 |
제목 |
팩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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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호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어. 그는 살짝 몸을 떨었어. 아니,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는 말이 더 옳겠군. 그는 테이블 위의 투명한 마티니 잔을 들어올렸지. 잔에 담긴 마티니가 약간 흔들렸어. 태아의 숨결같은 희미한 기포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왜냐하면, 나는 잠시 뜸을 들였어. 우리가 감각으로써 지각하는 모든 것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마티니를 입가로 가져가 목구멍 속으로 알코올을 넘겨버릴 때의 느낌...미뢰가 감지하는 맛의 화학반응들. 세포의 떨림.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조작된 것입니다. 자연은 진공상태를 싫어합니다. 그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자연은 우리의 관찰을 날조합니다. 즉, 모든 관찰은 허구입니다. 따라서 팩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험주의의 몰락.
위대했던 영국인들에게 건배를. 지성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표류한 모험가들을 위하여. 나는 내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어. 다시 그가 말했어.
하지만 우리의 문명은 팩트를 기반으로 세워졌어. 저항체에 전류를 흘려주면, 저항체에서 열이 발생하고 온도가 높아지며 백색광의 빛을 내네. 열복사, 전자의 진동, 빛. 이게 바로 팩트가 아니고서야 뭔가?
전체적인 걸 보셔야 해요.
딱딱. 나는 LED 전광판이 둘러쳐진 테이블을 툭툭 쳐. 전자와 정공, 두 극점이 서로를 애무하면서 발하는 찬란한 광명.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팩트는 입증 가능한 관찰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완벽한 입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을 세워왔고, 그걸 입증했고, 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입증했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창조적 파괴입니다.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해 패러다임을 부수죠. 우린 무엇이 사실인지 모릅니다. 다만, 대자연의 철저한 왜곡적 의지가 흘리는 미약한 지식에 기생해 사는 것에 불과하죠.
이제는 슘페터까지 인용하는 건가? 자넨 취했어.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며 말해. 하지만 나는 계속 말한다.
관찰은 조작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조작되듯이 말이죠. 사실, 역사적 관점에서는 조작이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수백, 수천 년 된 고서나 동굴벽화 따위만으로 과거의 공기와 접촉할 수 있죠. 여기서 팩트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자료의 나열. 그게 핵심입니다. 어떤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걸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조작될 수 있습니다...엄격히 말하자면 그건 조작이 아닙니다. 사실을 재배열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습니다. 팩트를 재구성하는 거죠.
어떻게 말인가?
이를테면...이제부터 당신은 포니입니다.
그가 아미를 찡그렸어. 그의 거대한 동공이 가볍게 전율한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독자들은 당신과 나의 대화를 오로지 문자를 통해서만 엿들을 수 있죠. 그리고 나는 언어를 이용해 문자를 나열할 수 있어요. 재구성이죠. 나는 위에서 당신의 모습을 묘사한 적 없어요. 만약 지금 내가 당신을 <포니>의 도식에 입각해서 묘사한다면, 그 정보는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독자는 당신을 포니라고 인식할 겁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기도 없어요. 그저 관찰이죠. 재구성과 함께.
헛소리 하지말게!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다. 그는 보라색 말발굽으로 테이블을 내려친다. 나는 그의 갈기를 보고 있다. 부드러운 그의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검정색 갈기다. 그가 웨이터를 부른다. 그는 이마에 난 작은 뿔로 염력을 부린다. 볼펜이 자의를 가진 것 마냥 스스로 계산서 위에서 춤춘다. 그는 네 발로 걸어 내 곁을 떠난다. 나는 지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그의 꼬리는 파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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