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노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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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6-17 10:19:02 KST | 조회 | 201 |
제목 |
세희씨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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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희씨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맑은 노랑 햇빛에 잠을 깼다. 커튼을 걷자 연보랏빛 하늘에 남색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붉은 빛의 향기를 맡으며, 세희씨는 주말의 나른함을 즐겼다.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짜 불도 아니니까. 그녀의 색채시각은 끊임없이 번득였다. 그녀의 눈은 곧 피로해졌고, 그녀 또한 피곤해졌다. 세희씨는 캡슐을 입에 올리고 잠시 젤라틴의 우울한 약국의 맛을 보다가 삼켰다. 곧 모든 것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안세희씨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독신의 작가였다. 우울증은 아름다운 이름의 병이고 그녀는 그 병에 걸리기를 선망했지만, 실제로 다가온 우울증은 그녀를 매일같이 아래에서 피를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개년으로 만들었다. 프로작을 포함한 그 어떤 안정제와 그 어떤 우울증 치료제도 그녀의 형언할 수 없는 우울함과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창작의 집이었던 카페를 포기하고, 평생 버켓리스트로만 남을 것 같았던 멋진 하얀색 노트북을 샀다. 물론 그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했지만.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그녀는 지각의 영원한 종말을 50년 정도 앞당기는 것을 포기했다. 생각보다 동맥은 질겼고, 손목에 하는 칼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현대약학은 신경안정제를 수십 알을 동시에 먹어도 신경을 영원히 안정시켜주지 않을 정도까지 발달시켰다. 목을 매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서웠다. 포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자살 시도를 할 때마다 세희씨가 스스로 119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구조대원들은 세 번째부터 안세희씨의 방 비밀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세희씨는 자신이 자살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구조대원들이 자신을 변덕스런 미친년으로 생각하리라고 지레짐작했고 그것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또 혼미한 의식 속에서 그녀의 몸에 이것저것 달리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을 계속 달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끝없는 슬픔과 불편하기까지 한 울음 발작을 제외한다면 우울증은 평생 달고 살만한 병이었다. 하지만 햄버거를 먹던 와중에 그녀의 우울증은 과거 시제가 되었다. 햄버거를 반쯤 먹었을 때 쯤이었다.
“나를 먹지 말아줘요.”
그녀가 햄버거를 떨어뜨리지 않은 것은 괄목할만한 의지라기보다는 너무 놀라서 근육을 긴장시킬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햄버거가 말했다. 30년 이상 살았고, 나름대로 박사 학위까지 있는 엘리트지만, 그녀는 햄버거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공포와 놀람은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업정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네가 말한거니?”
“보면 모르겠나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우리도 말할 줄을 알아요. 다만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을 뿐이지요. 나는 그러지 않고. 내 친구들은 그저 먹혀서 이 세상의 질긴 끈을 놓는 것을 선호하지만, 저는 그렇지가 않네요. 어차피 이대로 놔둬도 곧 당신이 내게 전해준 수많은 미생물의 즐거운 휴양처가 되겠지만, 내게 그 정도 시간은 허용할 수 없나요? 나는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많아요.”
그, 그녀, 혹은 그것은 꽤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목소리는 중성적이었으나 날카로웠다. 그리고 안세희씨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고로 햄버거는 인간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사실은 인간이 사라지기 전까지 천 년 만 년 자명하리라. 그녀는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것은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조금의 불평을 유언으로 남겼다. 세희씨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고 그것은 또 지독한 울음 발작으로 이어졌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울면서 햄버거집을 나가는 세희씨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하얀색 노트북으로 우울증의 증상을 찾아보았다. 우울장애의 증상: 우울감, 자살 사고, 의욕 상실, 무기력감, 피로감, 수면 장애, 성기능 장애, 집중력 저하, 식욕 장애. 확실한 것은 우울증이 음식과의 소통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초자연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저주 받을 무신론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환각을 보았다는 자가진단을 내렸다.
다음 날, 신경외과에서 세희씨는 많은 약을 받았다. 굉장히 많은 약들이 추가되었다. 환각을 구별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중증의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어쩌면 우울증 약들이 정신분열을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이후로도 가끔 그녀와 음식의 소통은 일어났다. 음식의 목소리는 한결같은 중성적이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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