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끝나고 집에 왔는데 누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방에 앉아서 책보고 있고 엄마는 복잡한 기분인 듯 식탁에 앉아 있는 겁니다. 또 뭐 가지고 나를 혼내려나 생각하면서 제 방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따라오더니 갑자기 묻더라구요.
"너 시집에 끼워둔 그림들은 뭐야?"
그 순간 저는 인생 최대의 위기와 당혹을 맛봤습니다. 시집 중에서 손바닥 크기만한 미니시집이란 게 있는데, 뚱그림을 하나하나 오려서 끼워두고 자기전에 감상했었거든요(아직 뚱취향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 때라서 보면 기분이 좋다고만 생각함). 중1짜리가 취향에 관련된 질문을 갑자기 당하면 당황해서 말이 안나오잖아요? 그랬더니 그 그림들을 일일이 꺼내고 나선 저한테 이러는 거에요.
너도 이렇게 되고 싶냐고.
원래 기분 같았으면 당연히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겠지만, 전 엄마가 커밍아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먼저 떠보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약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그냥 물어보는 거라고 대답을 했겠죠. 근데 예상대로 엄마는 이런걸 왜 모으냐고, 제정신이냐부터 시작해서 안 그래도 뚱뚱한 녀석이 이런 그림들을 시집에 끼워두고 보는 이유가 뭐냐까지 속사포로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그림들을 제가 보는 앞에서 4등분해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금쪽같은 짤들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 아까워했지만, 일단 지금은 넘어갑시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나서, 누나가 저한테 할 말이 있는 듯 해서 누나방으로 갔습니다.
역시나 누나도 그런 취향이 있다는 걸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한테 무슨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일 있나고 묻습디다. 그래서 저는 느꼈죠.
'아, 우리 가족은 이성애 이외는 전부 정신병으로 보는구나.절대로 내 취향을 밝히면 안되겠다,'고 말이죠.
이틀 동안 그런 상태가 쭉 지속되다가 저는 호구같은 근거를 생각해내서 왜 뚱짤을 모았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정도로 뚱뚱해지기 않기 위해서 매일밤 자극을 받는 것이다, 라고요.
좀 억지가 심하지만 그럴싸한 이유로 들렸는지 그 이후로는 제 취향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하더라구요.
5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저는 무성애자로 무사히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