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늑대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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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2-02 17:07:13 KST | 조회 | 1,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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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번 스토리는 지금봐도 나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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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의 영민함이란!
자연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아이번 브램블풋은 룬테라 전역의 숲을 돌아다니며 생명을 가꾼다. 반은 인간, 반은 나무의 형상을 한 그는 자연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땅에서 자라고, 하늘을 날고, 초원을 달리는 모든 것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다. 아이번은 자연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신만의 지혜를 나누어 주고, 숲을 풍성하게 가꾸며, 때로는 입이 가벼운 나비들에게 비밀을 맡기기도 한다.
프렐요드의 초창기 시절, 아이번은 강철 같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무자비한 전사였다. 하지만 냉기의 화신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아이번은 힘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번을 비롯한 인간을 반란을 꿈꾸기만 하는 불쌍한 필멸자로 치부했다. 마법을 부리며 지배자로 군림하는 냉기의 화신을 타도하기 위해 아이번은 다른 군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마법의 원천이라 알려진 머나먼 땅을 향해 냉기 수호자의 꽁꽁 언 항구로부터 항해를 시작했다. 함선이 수평선을 넘어감과 동시에 아이번 일행은 사람들의 기억을 떠나 설화가 되었다. 겨울눈 속에 파묻힌 길처럼 자취를 감추고 프렐요드의 역사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다는 아이번 일행의 숭고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잡아 삼킬 듯한 파도를 일으키며, 창천했던 군사들의 기세를 흔들었다. 아이번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비겁한 부하들을 검으로 처단하고 몇 남지 않은 부대원과 함께 아이오니아의 해변에 정박한 뒤 저항하는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원주민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세계의 심장으로 알려진 신성한 정원 오미카얄란으로 아이번 일행을 인도했다. 일행 대부분은 이를 정복자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충성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이한 그 푸른 정원에서 그들은 가장 극심한 저항에 직면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인반수 형태의 괴물들이 몇 안 되는 부대원에게 다가와 가차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 아이번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맞서 싸웠고, 괴물에게 쫓기던 군사들은 아이오니아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나무의 이름은 ‘신의 버드나무’로 가녀린 잎이 푸른 금빛을 발하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부대원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동안 아이번은 꼼짝 않고 서서 신비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적의 사기를 꺾을 요량으로 전투용 도끼를 들어 장정 열 명의 힘으로 나무를 쳤다. 아무런 여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의 버드나무를 넘어뜨리고 그 안의 모든 생명력을 꺼 버렸을 때, 그의 주변엔 오직 눈부신 빛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번의 두 손이 전투용 도끼와 신의 버드나무와 한데 뒤섞인 것이다. 팔다리가 자라나면서 울퉁불퉁하고 거칠어졌다. 온몸이 그렇게 변하는 동안 아이번은 망연자실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순식간에3미터의 거구가 되어 있었고 발치엔 목숨을 잃은 전우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이번은 심장이 뛰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깨어 있었고 지각하고 있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봐.” 목소리가 말했다.
눈 깜짝할 새에 군사들의 시체가 부패하면서 색색의 버섯과 윙윙거리는 곤충들이 생겨났다. 새와 늑대가 다가와 썩은 고기를 먹었다. 남은 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고, 시체 속에 있던 과일의 씨앗이 싹을 틔워 나무로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들숨으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허파처럼 언덕이 솟아 올랐다. 생명력으로 고동치는 나뭇잎과 꽃잎들은 마치 알록달록한 심장 같았다. 주변을 온통 둘러쌌던 죽음으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생명체가 태어났다.
살아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삼라만상의 생명체가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아이번은 그동안 저지른 실수와 만행이 불현듯 떠올랐고, 슬픔에 복받쳐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자 나무가 된 몸에 껍질이 생겨나고 이파리가 피어났다. ‘내가 신의 버드나무가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몸 속의 목소리가 또 다시 말을 했다. “들어봐.” 아이번은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수많은 짐승이 훌쩍이고, 강물이 통곡하고, 나무가 울부짖고, 이끼가 눈물 짓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신의 버드나무의 죽음을 숲 전체가 애도하고 있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회한 속에서 아이번은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자그마한 다람쥐가 다가와 그의 발을 토닥였다. 동물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식물들은 뿌리를 뻗어 다가왔다. 온 자연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용서의 온기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아이번이 몸을 다시 움직였을 땐 백 년 남짓한 시간이 흘러 있었고, 세상은 새로워져 있었다. 폭력과 잔혹 행위로 점철됐던 과거는 희미한 잔영이 되어 있었다. 파괴를 일삼던 그 옛날의 사내는 더 이상 아이번이 아니었다. 아이번은 몸 속의 목소리에게 물었다. 왜 하필 자신이냐고, 왜 자신을 구해줬냐고.
목소리는 말했다. “자라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자라나야 하는 건가? 아니면 세상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건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좀 자라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이번은 고개를 숙여 몸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나무 껍질 같은 피부, 팔에 달린 버섯, 칼집을 차던 자리에 모여 앉은 다람쥐 가족까지. 참으로 경이로운 몸이었다. 발가락을 흙 속 깊이 넣으면 식물들의 뿌리와 곤충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흙도 이야기를 했다.
아이번은 우선 세상의 생명체를 모두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쳐 그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정확히 몇 세기가 걸렸는지 아이번은 알 수 없었다. 즐거울 때엔 시간이 워낙 빨리 흐르는 법이니까. 아이번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모든 생물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사소한 습성에 즐거워하며, 때로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벌레에게 지름길을 알려 주고, 개구쟁이 덩굴정령과 장난을 치고, 가시투성이인 엘마크를 안아 기쁘게 해 주었다. 시들어가는 할아버지 버섯과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아이번이 가는 곳마다 숲은 영원한 봄이 되어 활짝 피어났고 짐승들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포악한 천적에게 공격 당한 동물을 구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상처 입은 골렘을 발견했다. 골렘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번은 강가의 자갈로 새 심장을 만들어 주었다. 모든 광물이 그러했듯이 골렘은 아이번의 충직한 평생지기가 되었다. 아이번은 암석 같은 골렘의 몸에 알 수 없는 연유로 피어난 꽃의 이름을 따 데이지라 골렘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날부터 데이지는 아이번이 위협을 받을 때마다 재빨리 곁으로 뛰어와 방패가 되어 주었다.
인간 종족을 마주치기도 했다. 대부분은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이번을 브램블풋이나 자연의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의 기이한 선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앗아가는지, 얼마나 잔인하고 ‘인간스러울’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아이번은 인간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몸 속의 목소리가 다시 말을 했다.
“보여줘.”
아이번은 숲을 떠나 인간들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굳은 의지가 돌아왔지만 이번엔 악의나 적의가 아니었다. 과거에 자신이 취했던 것들을 되돌려 놓고 싶었다. 새로운 신의 버드나무가 되려면 인간 세상을 가꾸어야 했다. 인간들이 보고, 듣고,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임을 한 때 인간이었던 아이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웃는 얼굴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마지막 태양이 지기 전까지 임무를 완수해 보기로 했다. 그에겐 아직 시간이 있었다.
독이 준 선물
이끼와 숙주인 바위와의 오랜 분쟁을 해결했고, 겨울 다람쥐 가족이 미처 챙기지 못한 가을 도토리를 찾아 주었으며, 울음 소리가 날카롭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한 늑대가 무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아이번은 뿌리 형태의 발가락을 땅 속 깊이 내려 예민한 덩이 줄기와 둔한 지렁이 사이를 지나 다른 나무의 뿌리와 소통했고, 그럴 때마다 숲은 한층 더 울창해졌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일을 했지만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번이 한 세기를 얼마나 보람차게 보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사사프라스 나무들이 숲 속 언저리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사냥꾼이야!’ 나무들이 뿌리를 통해 소리치자 온 사방이 긴장감에 휩싸였다.
아이번은 사사프라스 나무가 길 잃은 작은 소금달팽이를 보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뭇잎을 곤두세울 만큼 걱정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사냥은 그렇게 나쁜 짓이 아니었다. 생명의 순환에 있어 쓸모 없거나 무의미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사사프라스는 개똥지빠귀에게 걱정을 늘어 놓았고, 개똥지빠귀는 나비에게 말을 옮겼다. 나비가 비밀을 알게 되면 숲 전체가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집게 개미가 대대손손 살던 집을 건드리는 바람에 먼저 사과를 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마른 나무껍질이 몸에서 떨어졌고, 땅을 밟는 족족 꽃이 탐스럽게 피어났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숲 속의 긴장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세 명이나 있대!’ 다람쥐가 찍찍거리며 말했다.
‘충, 충혈된 달 같은 눈이 달렸어!’ 게들이 횡설수설하며 강 속으로 허겁지겁 숨었다.
‘엘마크보다 피를 더 좋아하는 놈들이야!’ 엘마크가 외쳤다.
송골매는 사냥꾼이 자신의 알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백색 국화는 수려한 꽃잎이 망가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러자 자신의 꽃을 무척이나 아끼는 데이지도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아이번은 이들을 하나하나 진정시킨 뒤 상황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했다. 데이지가 따라왔지만 아이번은 모른 척했다. 데이지는 자기가 미행을 엄청 잘하는 줄 알고 있었다.
샤그야크가 풀밭 위에 죽어 있었다. 목 아래쪽에 튀어나온 두꺼운 근육에 화살 세 대가 깊이 박혀 있었다. 아이번의 눈에서 진액 같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나오자, 그가 미커스라 이름지어 준 다람쥐가 가슴 위로 얼른 뛰어 올라와 뺨 위의 눈물을 위로의 의미로 핥아 주었다.
“사냥꾼은 동물을 잡아서 고기를 먹어.” 아이번이 말했다. “뼈는 깎아서 장난감이나 도구를 만들고 가죽으로는 옷과 신발을 만들지.”
샤그야크의 윤기나는 진주빛 상아가 여덟 개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이번이 땅을 어루만지자 데이지꽃이 죽은 샤그야크 주변을 에워싸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때 돌비늘독사 새끼가 스르르 기어 나왔다. 돌비늘독사는 나이에 상관 없이 영특한 동물이었다.
“스스스사냥꾼은 갔어요?” 아기 독사가 새는 발음으로 물었다.
한 때 뱀들은 새는 발음을 부끄럽게 여겨 치찰음이 들어간 단어를 피하곤 했다. 아이번은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일수록 자주 사용해야 한다고 뱀들에게 충고했고, 뱀들은 그 충고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뱀들은 하나를 가르치면 꼭 둘을 한다.
“그래, 이제 갔단다.” 어린 뱀이 끔찍한 장면을 전부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 왔다. “여기에 똬리를 틀고 샤그야크 좀 대신 봐 줄래?” 아이번이 아기 독사에게 부탁했다. “무슨 일인지만 확인하고 금방 돌아올게.”
리즈벨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샤그야크의 상아가 서로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다음 사냥감을 놀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추어 상아를 다시 정돈해야 했다. 강 상류의 도시에선 상아로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요 근래 도시 사람들이 강 아래쪽에서 난 천연 치료약의 값을 높게 쳐 주기 때문이었다.
턱이 네모지고 눈이 애꾸인 니코가 샤그야크의 발자국을 또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고래뼈 활을 든 도시 부자 에도에게 손짓하고 씩 웃어 보였다. 에도가 이를 훤히 드러내며 미소를 짓자 세 사냥꾼 중 막내인 리즈벨은 그의 사악한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몇 발자국 앞 작은 빈터에서 상아 여덟 개 달린 샤그야크가 풀을 맛있게 뜯어먹고 있었다. 세 사냥꾼은 숨을 잔뜩 죽이고, 풀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면서 찬찬히 발을 내딛었다.
미리 연습한 대로 세 사람은 동시에 활을 뽑아 신중하게 조준을 했다. 샤그야크는 아직도 머리를 숙인 채 부드러운 멀더베리와 스컬리풀을 먹고 있어 목 아래쪽 근육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 근육에 화살을 꽂으면 상아를 자르는 동안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 나왔다. 상아의 효험을 높이려면 샤그야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상아를 자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에도는 말했다.
샤그야크가 고개를 들길 기다리는 리즈벨의 목에 땀이 맺혀 흘러 내렸다. 마침내 샤그야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발목 높이에 깔려 있던 스컬리풀이 갑자기 믿기 어려운 속도로 자라나 머리 위까지 솟아 올랐다. 풀줄기는 태양을 향해 뻗어 올라갔고, 순식간에 꽃까지 피어나 꽃잎이 반짝거렸다. 꽃 핀 스컬리풀은 담장처럼 샤그야크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에도의 손에서 활이 툭 떨어졌다. 니코의 애꾸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리즈벨은 자신도 모르게 허공으로 화살을 쏘아 버렸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리즈벨은 겁에 질려 근처 나무로 뒷걸음질쳤다.
“이 숲은 저주 받은 곳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리즈벨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해요.”
“난 마법을 상대해 본 적이 있어.” 니코가 말했다. “정석대로 한 번 해 볼까?”
니코는 화살통에 화살을 다시 꽂아 넣고 벨트에 차고 있던 길고 무시무시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에도도 칼을 꺼내 쥐었다. 두 사람은 리즈벨에게 꼼짝 말고 상아를 지키라고 손짓한 뒤 풀숲 속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리즈벨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리즈벨은 니코와 에도처럼 소리 없이 짐승을 잡는 사냥꾼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돌연 자라난 풀숲이 위험의 징조라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기이한 마법 생물들이 이 숲을 돌아다닌다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시시한 동화일 뿐일 거야’ 하고 리즈벨은 마음 속으로 애써 되뇌였다.
그 때,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가 풀숲에서 울려 퍼져 왔다. 샤그야크의 비명이 아니라 수많은 돌이 땅에 쿵쿵 부딪치는 소리였다. 무엇이 내는 소리인진 알 수 없었지만 에도와 니코가 풀숲에서 전속력으로 뛰쳐나올 만큼 괴이한 소리였다. 두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도망치게 한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흰 꽃잎이 달린 단아한 국화가 풀숲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꽃이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돌과 이끼가 뒤섞인 거구가 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박자를 타듯이 움직이는 살아있는 거대한 대리석이었다. 눈 앞의 광경이 채 이해되기도 전에 바위 괴물을 부르는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데이지, 조심해. 그리고… 좀 살살해.”
리즈벨은 상아 주머니를 얼른 집어 들고, 거처로 돌아가는 길을 떠올리면서 니코와 에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무 근처에 다다를 때마다 새로운 풀숲이 불쑥불쑥 자라났다. 리즈벨이 빙글빙글 돌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자 무언가가 키득거리면서 풀숲을 걸어 다녔다. 리즈벨은 괴이한 숲 속에 홀로 갇혀 있었고, 풀줄기는 도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리즈벨은 할머니가 양을 몰던 것처럼 자신이 몰려 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제 발로 함정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며 리즈벨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풀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번은 어린 사냥꾼이 풀숲 미로를 빠져 나와 죽은 샤그야크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겁에 질린 표정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아이번 같은 생명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임이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대하려고 했지만 인간의 반응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늘 짹짹거리며 자랑을 늘어놓는 종다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원래 겁이 많은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겁나면 그냥 도망가도 돼. 기다릴 테니까. 난 상관 없어.”
아이번은 무섭게 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서워할지, 안 무서워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빨리 하세요.” 리즈벨이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제가 함부로 들어왔다는 거, 저도 알아요. 도망가지 않을게요. 빨리 끝내 주세요.”
“빨리 끝내 달라고?” 아이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갈 길이 바쁜 줄은 또 몰랐네. 알겠어.”
리즈벨은 눈을 감고 턱을 치켜들어 목을 드러냈다. 그리고 칼집을 찬 등 뒤로 손을 뻗어 단검을 꼭 쥐었다. 나무 괴물이 다가오면 기습할 생각이었다.
“그냥 이유를 좀 알고 싶어.” 아이번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가지 같은 손가락을 뻗어 죽은 샤그야크를 가리켰다. 손가락은 계속 뻗어 나가 샤그야크의 등에 닿았고, 아이번은 피로 얼룩진 샤그야크의 털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그 순간 리즈벨을 단검을 뽑았고, 그와 동시에 발목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차가운 통증이 다리로 점점 퍼져 올라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더 숲에서 가장 위험한 독사인 돌비늘독사가 있었다.
분노와 본능에 휩싸여 리즈벨은 독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안돼!” 아이번이 소리쳤다.
덩굴 같은 뿌리가 땅 속에서 솟아 나와 리즈벨의 팔을 막았다. 뿌리는 리즈벨의 손목과 발목, 그리고 무릎까지 칭칭 감았다.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다 리즈벨은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게 생겼다고!” 리즈벨이 악을 썼다. 차가운 독이 무릎 위까지 번져 올라 왔다.
독사는 아이번의 발치로 스르르 기어와 그의 다리를 휘감으며 몸 위로 올라오더니 겨드랑이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러고는 아이번의 뒤통수 밖으로 나와 가지를 휘감으며 날카로운 혀로 그의 귀를 핥았다.
"스스스사과할게요" 독사가 아이번에게 말했다. "스스스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제발..." 리즈벨이 말했다. "좀 도와 줘요."
아이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맞아" 해결책이 떠오르자 아이번의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샤그야크를 아주 좋아하는 게 하나 있지. 특히 죽은 샤그야크를 말아."
"아, 그리고 사이러스는 용서해 줘.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독을 조절할 줄 모르거든. 독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엄청 미안하다고, 네게 사과를 전해 달라고 했어. 네 움직임에 놀라서 순전히 본능적으로 반응한 거야." 아이번이 말했다. "자, 이제 잘 봐."
아이번은 죽은 샤그야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눈을 감고 단순하고도 깊은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두 손은 손가락을 쫙 편 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룬이 새겨진 머리에선 초록색 빛이 반짝거리며 쏟아져 내려와 팔을 타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희한한 생김새의 보라색 버섯이 샤그야크의 몸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그마했지만 점점 크게 자라나 샤그야크의 온몸을 뒤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그야크의 몸엔 털과 뼈와 보라빛 버섯 무리만 남게 되었다.
"해독 버섯이란다." 아이번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버섯 하나를 조심스럽게 뽑았다. "이번에도 딱 시간 맞춰 피어났네."
리즈벨의 몸이 덩굴에서 풀려났다. 땅 위로 떨어지자 마자 리즈벨은 심장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돌비늘독사의 독이 가슴까지 퍼져 얼음장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먹어 봐.” 아이번이 리즈벨에게 보라색 버섯을 건네며 말했다. “도롱뇽 이슬이나 햇살처럼 훌륭한 맛은 아니지만 리퍼틱 사과만큼 못 먹을 정도도 아니야.”
이 괴상한 나무인간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싶었지만 리즈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순간, 옛 기억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였다. ‘자연을 믿으렴. 자연의 아버지는 널 절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않을 거야.’
리즈벨은 아이번의 손에서 버섯을 받아 입에 넣었다. 쓰디쓴 차 같기도 하고, 거름 같기도 한 맛이었다. 살아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실망스럽다고 생각하던 중, 심장을 옥죄던 차가운 통증이 눈 녹듯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리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리즈벨의 몸이 회복되는 동안 아이번은 온갖 나뭇잎과 나무 진액, 그리고 발가락으로 찾아냈던 샘물을 섞어 약을 지었다. 그런 후, 송골매가 만들어 손에 떨궈 준 둥지에 약을 담아 리즈벨에게 건넸다.
“당신, 자연의 아버지 맞죠?”
아이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재밌는 거 보여줄까?” 샤그야크의 뼈로 눈길을 돌리며 아이번이 말했다. “이끼는 주변을 꾸미는 걸 엄청 좋아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이끼가 자라나 두터운 융단처럼 샤그야크의 뼈를 뒤덮었다. 보랏빛 버섯과 초록빛 이끼가 어우러지자 섬뜩했던 광경이 아름답게 변했다.
“자기 뼈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알면 셸든이 기뻐할 거야. 가을 태풍이 불면 오소리들이 셸든의 갈비뼈 속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하겠지. 세상에 쓸모 없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이번이 리즈벨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된다 생각했는데 이젠 이해 돼. 셸든이 죽지 않았으면 넌 살 수 없었을 거야.”
“상아 때문이었어요.” 리즈벨이 말했다. 후회에 찬 두 눈은 발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들이 요구했어요.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면서.”
“돈…기억나네. 좋은 동기는 되지 못하더군.”
“죽이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짐승을 죽여야 한다면 죽이고 나서 모든 부위를 쓰라고, 그것이 죽은 짐승에 대한 도리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어떤 분인지 한 번 만나 뵙고 싶구나.” 아이번이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건 숭고한 일이지.”
“죄송해요.” 오랜 침묵 끝에 리즈벨이 말했다.
“생명은 모두 소중해.” 아이번의 온화한 목소리에서 따뜻한 용서를 느끼고 리즈벨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번은 리즈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너였더라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 거야. 인간이었다면…그렇게 했겠지. 게다가 난 인간일 때 배우지 못한 것도 많았거든.”
아이번은 리즈벨을 일으켜 주었다.
“난 이제 가 봐야 돼. 수련 왕 선거를 감독해 주기로 남쪽 연못 올챙이들에게 약속했거든. 꽤 중요한 선거야.”
얼마 후, 리즈벨은 숲에서 나와 강가에 다다랐다.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강둑에 구멍 하나를 파서 샤그야크의 상아를 조심스레 넣었다. 그리고 흙을 한 줌 집은 뒤 할머니에게 배운 애도의 기도를 외웠다. 상아가 모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리즈벨은 의식을 반복했다. 그런 후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덤을 떠났다.
아이번은 얼더 숲 깊은 곳에서 리즈벨의 행동에 미소지었다. 샤그야크 무리도 분명 흡족해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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