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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ement
작성일 2018-10-20 21:09:59 KST 조회 624
제목
로드 투 블리즈컨 2018 #3 - 이병렬: 밀려난 자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은 얻기도 힘들지만, 세계 최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의 변덕만큼이나 타이틀을 유지하는 것
역시 위태로운 일이다. 하지만 엘리트 선수 몇의 타이틀은 세월이 흘러 꽤 그럴싸하게 들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 선수를
어떻게 부르는가는 그 선수의 클래스를 보여주고, 권위와 중후함도 따라 부여한다. 정종현, 윤영서, 정윤종 같은 선수들은
급변하는 상황에 맞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위대함에 도전했던 선수들 대부분이 덧없는 광채의 순간을 남겼고,
팬들은 그 화려함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은 전성기가 지나갈 때까지 잠시 동안 찬양받지만,
평범한 선수로 돌아가면 곧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위대함이란 누군가에겐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이병렬 같은 중견 선수는 그 벽돌을 해마다 조심스럽게 쌓았다. 브루드워 시절을
떠올려 보면, 이병렬은 그보다 더 위대한 선수들에 밀려 뒷전 신세였다. 2017년 이전에는 프리미어 대회 3위 이상으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병렬의 IEM 상하이 우승이 스타크래프트 2 역사에 길이 남을 여정의 ㅅㅣ발점이 되리라고는
그 어떤 선수와 해설들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병렬은 2017년 7월 IEM 상하이 우승으로 찬란한 섬광의 불씨를 당겼다. 이병렬의 불꽃은 더 많은 우승컵을 녹여내 연료삼아
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남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여정을 시작했고 이후 8개월의 기간 동안 그가 참여할 수 있었던
프리미어 대회의 반 이상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GSL 슈퍼토너먼트 시즌2, 곧바로 뒤이어진 WCS 글로벌 파이널
역시 포함된다. IEM 카토비체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따내며 그의 성적이 최고조에 달하자, 스타크래프트 2 세계는 마침내 위대한
이병렬의 화염의 마수에 휩싸였다.

IEM 카토비체는 그의 절정에 달한 힘을 보여주었다. 이병렬은 스마트한 공격성과 무결점 운영이라는 멈출 수 없는 힘으로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선수는 모조리 제압하며 라이벌들을 압도했다. 4강 조성주와의 경기에서는 피할 수 없는 패배가 턱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병렬은 역스윕을 해내며 그 입속에서 승리를 낚아챘다. 심지어 김도우조차도 결승에서 이병렬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는 시작부터 예측하지 못한 치명적인 공격으로 상대 프로토스를 당황시켰다. 땅굴 타이밍 올인을
시작으로, 이병렬은 자신의 전략 스펙트럼을 펼쳤다. 메타에 뒤떨어졌다고 평가받던 뮤탈리스크 플레이든, 운영 난타전이든,
중반 손해를 보고도 추격에 성공하는 모습이든, 이병렬은 챔피언의 끈기와 노련함을 전부 선보였다.
연이은 승리에 더한 화룡점정은 그가 역사에 길이 남도록 위대해질 수 있느냐는 갈림길에 서게 만들어 주었다.



결승전은 경지에 오른 저그의 진정한 모습 그 자체였다. 경기를 잊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병렬은 시작부터
프로토스 본진에 땅굴 타이밍 올인을 감행해 김도우를 비틀거리게 만들었으며, 이어서 두 번째 세트에서는 메타에 뒤떨어진
뮤탈 플레이를 선보였다. 세 번째 세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번 대회 이병렬의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였고, 27분 동안
그의 피지컬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이후 4세트에서는 손해를 복구하며 매치를 편안히 마무리하게 된다.

가장 권위있는 두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한 이후, 이병렬에 거는 기대감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비록 카토비체보다
먼저 열린 GSL 시즌1에서는 16강조차 진출하지 못하고 대회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전세계의 캐스터들과 팬들은 연말까지
모든 대회에서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병렬이라고 자신있게 꼽았다. 그 정도로 이병렬은 지배적이었다. 프로토스와 테란들은
이병렬을 이기기 위해 안달나 있었고, 저그들은 이병렬이 되고 싶어했다. 한국 프리미어 대회의 우승컵이 없다는 사실만이
우승컵 컬렉션의 짜증나는 구멍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병렬은 이전에 GSL이나 SSL에서 한 번도 8강 이상 진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자신감과 함께 거대한 돌풍을 등뒤로 일으키면서, 그 진에어의 저그가 2018 코드 S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쥐리라는 것은 숙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병렬이 자신의 우승컵 장식장을 완성시키려는 찰나에 세 가지 커다란 장애물이 앞길을 막았다.
고향에서는 조성주가 거미줄 같던 징크스를 떨쳐내고 각성하여,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깨워 전무후무한 GSL 3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다. 이병렬 역시 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이병렬은 시즌2 8강에서 조성주를 만나고 유감스러운 반가움을 느꼈다.
경기는 접전이었고 전체적으로 안타까운 무승부라는 평이었다. 많은 이들이 긴가민가하면서도 이병렬을 믿었지만, 조성주는
이병렬의 상상 그 이상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만약 조성주의 플레이가 경기 내내 그렇지 못했더라면, 분명 이병렬이 GSL 우승을
차지했으리라. 어쨌든, 모두가 조성주는 GSL 시즌 3에서의 경쟁자 1순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동안, 서양에서는 또 다른 실력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로지 평판 하나로 세랄은 세계 최고의 저그라는 자리에서
이병렬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너치오나 스누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받던 그 핀란드인은 WCS 라이프치히에서
우승하고 WESG, 카토비체에서 인상 깊은 경기를 보여주며 상당한 이목을 끌었다. 세랄은 전성기 시절의 이병렬처럼 훌륭한
선수들을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해치우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국 씬은 그의 시선 앞에 산산이 부서졌고,
오직 한국의 정예들만이 그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세랄은 WCS 서킷과 GSL vs. the World에서 우승하며
블리즈컨에 가는 세계 최고의 저그는 이병렬이 아닌 세랄 그 자신이라는 점을 확고히 했다.

마지막으로, GSL vs. the World와 GSL 시즌 3가 펼쳐지면서, 세 번째 방해물이 현실화되어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조성주와 세랄이라는 태그 팀은 이병렬의 플레이를 막았고 그의 명성을 빛바래게 했지만, 결정타는 바로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 연이은 성공이란 모든 위대한 선수의 핏줄 속에 자신도 모르는 자만심을 키우기 마련이다.



아직 남아있던 자신의 광휘에 눈이 먼 나머지, 이병렬은 대담한 도발을 입 밖에 낼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 허세는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 흔한 형태의 과대포장이었다. 하지만 이신형은 깊은 슬럼프에서 회복 중일 뿐이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쇼맨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이신형은 참교육 한 사발을 이병렬에게 선사했다. 결승에서 조성주와의 리매치는 피할 수 없으며 이번 경기는 쉽게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병렬은 이번 매치에서 빠른 군락을 여러 번 고집했다. 1세트는 따냈지만, 이어진 경기에서는
자신의 도발에 걸맞지 않는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굴욕적인 스윕을 당하게 된다.



사그라들던 불꽃은 코드 S에서 마침내 꺼지고 말았다. 또다시 8강에서 나가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엘리트 한국 선수인
조성주에게 졌다는 차디찬 위안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이병렬의 종말을 알린 자는 '그저 외국인일 뿐'이라던 닙이었다.
경기 내내 이병렬의 판단은 이상했다. 1세트에서는 8분간 공세를 취하려는 시도 하나 없이 2베이스 바드라에 머물렀으며,
닙은 보다 더 세련된 플레이로 이병렬을 쉽게 처치했다.

스타크래프트 2 프로의 세계는 ‘최근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로 대변되며, 성적이 없다는 것은 바로 별볼일 없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세계이다. GSL에서 성적을 내는 데 실패했음을 제쳐두고서, 평소 같았다면 이병렬은
아직 전세계 탑 5 순위 안에 드는 선수로 꼽힐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게 느리게 발전하지 않았다. 조성주와 세랄이
진정한 2018년 스타크래프트 2의 진정한 최강자로 등극하면서, 이병렬은 다시금 상대적으로 평범한 선수가 되어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해잡 온라인 대회 이곳저곳에서 이긴 것을 제외하고는, 이병렬은 ‘최근에 한 것이 없었다’.
조성주, 세랄, 김도우, 김대엽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이병렬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병렬의 모든 죄와 부진은 블리즈컨 우승으로 사면받을 수 있고, 그가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직 던질 만한 수로 남아있다. 이전에 카토비체, 블리즈컨, 상하이에서 증명했듯,
이병렬이라는 별은 큰 무대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세상이 그의 부활을 목격할 수 있을지는 이병렬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다시
새롭게 우승으로 향할 수 있을지에 달렸다. 블리즈컨에서 또 한번 우승하려면 분명 조성주나 세랄을 무너뜨려야 할 것이며,
그러지 못한다면, 현재의 뒤떨어진 폼에 머무른다면 우승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그 찬탈자들을 무찌를 때가 무르익었다면,
이병렬은 진지하게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내야만 한다. 이신형식 광대놀음이 또다시 벌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올 타임 레전드로 회자되는 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다. 이병렬은 한때의 덧없는 영광을 좇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선수들처럼, 자신이 규칙의 예외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병렬의 재능이라면 그런 전설적인 지위를 얻는 것은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다. 이병렬의 지난날의 성공은 아직 붉은 잿불로 남아있고, WCS 월드 챔피언십 우승은 이병렬의 커리어를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만들 것이다. 찬란한 불꽃이, 순수한 재능이 다시 한 번 빛나는 순간, 스타크래프트 2 세계는
오래도록 잊혀진 이병렬의 이름을 메아리치도록 연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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