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에 교황령이 이탈리아의 철권에 박살나면서 교황 산하에는 공식적 정보기관이 남지 않음. 19세기 이래 교황이 세속적 문제에서 계속 멀어지기는 했었지만 교황령 점령 이후 지킬 땅도, 정보 수집을 할 기관도 없었기 때문에 정보 수집 임무는 그 이후로 사실상 버려짐.
2차대전때 영국과 프랑스 주바티칸 대사들은 교황청이 얼마나 국제 정세에 무지한가를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함. 교황청은 이탈리아 내부의 문제에 관해서도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깜깜했는데, 다른 지역에 대해서야 두말할 필요가?
로마교회가 가진 세계적 조직망 자체는 광범위하지만 이들은 정보 수집의 목적으로는 잘 조율되어 있지 않고 교회적 문제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교황청의 정보력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 그리고 바티칸과 교황청의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행정청(Secretariat of State)에서도 정보 관련 업무는 언제나 자금과 인력 부족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숙련된 분석가도 모자람.
20세기 초반, 피우스 10세가 교황청의 외교 부문을 키우기 시작하였음. 양차 대전을 거치며서 외교단의 전문성이 향상되고 조직망이 확장되면서 교황청의 정보 수집 능력이 개선되었으며, 한편 여러 강대국들이 교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많은 정보를 제공해왔기 때문에(레흐 바웬사와 폴란드 민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예전에 비해서 교황청의 정보력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요 국가들의 정보기관에 비하면 그 능력은 현저히 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