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GLaDO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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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05-21 00:06:02 KST | 조회 | 491 |
제목 |
나는 너무 안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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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다름없는 피곤한 월요일 밤
나는 무언가를 하기위해 불 꺼진 거실로 걸어갔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침침한 거실 쓰레기통 옆을 무심코 한발 내딪은 나는 발 근처에서 작은 쪼가리같은 그림자가 빠르게 이동하는 실루엣을 보았다
그것은 실루엣일 뿐이었으며 불이 꺼진 거실에서 일어나는 작은 미동에 불과했다
곧바로 나의 사고회로는 "부정"의 단계에 돌입했다
"아까 먹고 버린 방울토마토 꼬다리가 날린거야"
"비닐 쪼가리가 걸어가는통에 날린거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이성이라는 녀석이 있어 현실도피에 빠진 감성을 채찍질했다
침착하게 형광등을 킨 다음 냉장고와 싱크대 아래쪽을 휴대폰 플래시 라이트로 비춰보았다
약 10분간의 탐색끝에 시야범위내의 틈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멍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애써 딴청을 피우던 나는 불현듯 "분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언가에 씌인듯이 다시 거실로 간 나는 냉장고와 싱크대를 발로 툭툭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지구상 최악의 생명체 1마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능숙하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앞에 나타난 녀석은 내가 본것이 허상이 아니라는걸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적당히 컷으며, 매우 날렵해 보였고, 날수 있을것 같은 끔찍한 추측을 하며 나의 이성과 감성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시작했다
나는 서 있었고 장소는 거실 한켠이었다 주변사물을 스캔하여 무기를 탐색했다
냄비밭침, 너무 가볍다 집는 혹은 무사히 집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녀석을 내리치기 위한 동작 사이에 저 얍삽한 녀석은
그림자 속으로 달아날게 뻔하다 탈락
리모콘, 명중률이 처참할 것이다 탈락
두루마리 휴지, 상동 탈락
침착하자, 일단 녀석이 장막 너머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것이 급선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녀석은 더듬이를 씰룩이며 공기 파장하나하나를 감사히고 있다
시간이 없다
결단의 순간이다
나는 입고있던 티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공기의 파동이 최소한이 되도록 은밀하고 조용하게 벗은 뒤 적절한 속도를 보장하기위해 뭉친다
팔을 뻗어 최소거리를 확보한다
녀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뭔가 이상한 낌세를 느낀것이다 순간 굳어버린 나의 동작
그리고 시작된 놈의 질주
이제 놈은 소위 "집에있을때만 입는 버리기 직전의 목늘어진 티셔츠" 아래에 깔려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또다른 공포가 찾아온다
놈이 티셔츠를 들추고 다시 달려나가지 않을까? 이대로 밟아버리면 인터넷에서 읽은 것처럼 알집이 터쳐 사방으로 뻣어나가는거 아닐까?
결국 나의 묠니르는 두루마리 휴지가 선정되었고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놈의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기에 모든 면적을 꼼꼼히 내려친 다음 소름끼치는 마음으로 티셔츠를 서서히 들춰보았다
거기에는 오직 꿈틀대는 바퀴벌레 한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나무젓가락으로 막타를 먹인후 시체를 처리하고 나는 "협상"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엇이 놈을 불러들인것일까? 완전히 청소되지 못한 자취요리의 찌끄러기?
바로바로 하지않는 싱크대의 설거지 거리? 청소는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것이 의심이 가는 순간이다
놈의 이동경로를 찾아내기위해 싱크대 아래 수납공간을 열고 탐색을 시작했다
대충 지은 대부분의 빌라가 그러하듯이 싱크대 아래쪽 배수관은 마감이 깔끔하지 못했고 구렁이도 지나다닐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 한쪽 구석에서 놀라운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디서 떨어진 단추 혹은 동그란 손잡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말라버린 바퀴벌레 약을 살포하는 동전크기의 통이었다
그랬다 비교적 신축이며 1년정도 아무 해충도 보지못했기에 클린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집은 사실 바퀴벌레가 나온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우울한 마음으로 독일산 바퀴벌레 약을 주문하며 월요일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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