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태권소년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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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12-28 00:32:30 KST | 조회 | 336 |
제목 |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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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왔네.”
맥주 한잔 비울 때 즈음 네가 들어왔다. 그래. 오랜만이야. 빙긋 웃으며 앉는 너에게 묻는다. 뭐 마실래? 음... 일단 나도 맥주 마실래. 그래? 맥주 주세요. 아주머니가 슥- 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나. 추억은 분명 많은데 떠오르는 게 없다. 무슨 말을 꺼내지, 싶은 그 때,
“어떻게 지냈어?”
좀 야윈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말투로 네가 말한다. 아, 그냥. 그냥 잘 지냈어.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아주머니가 맥주를 놓고 간다. 치얼스? 잔을 들며 내가 묻는다. 아니, 건배! 잔을 들며 네가 말한다. 우린 건배한다. 한 모금 쭉- 들이킨다. 하아.
“그때 기억나?”
왜 우리 그때,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네 말에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를 맥주 거품으로 닦아낸다. 아, 그때. 기억이 명료해진다. 우리 학교에서 만났었잖아. 진짜 재밌었는데, 그치? 그럼. 재밌었지. 너 예전에 한강에서 기억나? 우리 사귀기 전에... 아! 그 이야기 꺼내지마아! 한 번 닦아내자 즐거웠던 기억들이 우후죽순, 너나 할 것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 닦아내려면 맥주 한두 잔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어느새 발갛게 물든 너의 얼굴을 보는 건 또 얼마만인지. 흥이 오른다. 아주머니! 맥주 더 주세요! 빈 자리에 앉아 티비 보던 아주머니가 에구, 소리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간다. 우린 재잘재잘 떠든다.
“이제 소주 먹을까?”
맥주는 너무 배불러. 한참을 떠들다 부루퉁한 얼굴로 네가 말한다. 그리고 안취해. 말하는 너의 얼굴은 이미 취해보인다. 그만 마실까 생각해보지만 소주라, 나쁘지 않다. 소주를 한 병 시킨다. 네 취향은 참이슬 레드. 여자치고는 강한 취향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이걸 좋아한단 말이지. 헤헤 웃으며 까드득- 뚜껑을 돌려 따는 네 모습이 신나보인다. 한 잔, 두 잔.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다.
“나 사실 그 때 좀 그랬다?”
말은 안했었지만 괜시레 서운했었단 말이지-. 후아아, 살짝 꼬인 혀로 네가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리없었던 너의 감정, 생각, 느낌. 앞에서는 괜찮은 척 넘겼으나 뒤돌아서 눈물짓고, 한숨 쉬고, 속상해했던. 그런 그 때의 너를 말한다. 지금까지 들은 적 없었던, 그래서 알 수 없었던 그 때의 너를. 짠! 네가 잔을 든다. 짠. 나도 잔을 든다. 이윽고 퍼지는 청아한 소리.
“이제 그만 마실까?”
서너 병 비웠을까. 네가 말한다. 후아, 다 말하니까 후련하네.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로 미소 짓는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마시자. 그래. 말없이 서로를 한참 보다가, 한숨을 쉰다.
네가 좋아했던 일, 즐거웠던 일. 나도 함께 좋았고, 즐거웠다. 그렇기에 가벼운, 조금만 닦아내면 금방 떠오르는 추억들. 하지만 네가 서운했고, 슬펐고, 상처받았던 일들. 네가 말하지 않아서 흘려보냈던, 그래서는 안됐던 일들. 과연 그랬을까. 정말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었던 걸까.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렇게 남아서, 널 그려보는 수밖에는 없었던 걸까.
밖으로 나간다. 뒤따라 나오는 너는 없다. 그때의 너를 말해줄 너는 없다.
언제쯤 다시 그리러 올까? 조용히 묻는다. 역시 대답은 없다. 언젠가는 다시 올게. 발걸음을 돌린다. 대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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