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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소소한행복
작성일 2020-06-14 20:12:28 KST 조회 930
제목
우로부치가 쓴 라스트오리진 팬픽 1화

선풍에 나부끼는 자줏빛 머리카락. 근심 띈 비취색 눈동자. 처참한 사투 끝에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가슴을 펴고 우레와도 같은 갈채를 받는다.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나는 그저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만은──그녀는 신화 그 자체였다.

 

"이 승리는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것. 비열한 사과의 계략이 없는 한, 내 준족을 막을 자 없으리!"

 

드높이 승리를 외치자, 관객의 성원이 한층 열기를 더한다. 불패라 칭송받은 콜로시엄 퀸을 격파하고, 이날 덴세츠 토너먼트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름은 질주하는 아탈란테. 팀 "아르카디아의 처녀들"의 필두전사. 우리의 경애받는 여왕이자──나와 같은 "덴세츠 엔터테인먼트"의 바이오로이드, 즉 인간들의 애완인형이다.

 

"오늘의 멧돼지는 평소보다 강했다. 슬슬 나도 명계의 강을 건널 때가 됐다고 단념할 뻔했군"

 

대기실에 돌아와 몸을 씻으며 아탈란테는 홀로 중얼거렸다. 기록적인 시청자수를 달성한 대승리 이후이건만, 담담한 어조에 흥분한 기색은 없다.

 

"챔피언을 쓰러뜨렸습니다. 오늘 전투는 이전에 없던 위업을 달성한 겁니다만?"

 

내가 덧붙여 설명해도, 아탈란테는 시원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챔피언? 이상한 소릴 하는군. 멧돼지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나. 짐승은 짐승일 뿐. 여신이 우리를 시험코자 보낸 것뿐이다"

"하지만 콜로시엄 퀸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탈란테는 늘 대전상대를 멧돼지라 부른다. 그건 표현상 그렇게 말한 것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녀의 시각정보로는 모든 적이 멧돼지로 인식된 것일 수도 있다. 내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안다. 여긴 그리스의 아르카디아와는 다른 땅이자 다른 시대. 방금 싸운곳도 주고스산이 아니지. 허나 난 아르카디아의 영광을 다시 세상에 알리고자 부활했다. 오이네우스의 부름에 응한 그 때처럼.

그러니 사냥꾼이여. 사람들이 이 전투를 뭐라 부르든, 이곳은 내게 있어 칼리돈이다. 무용을 떨치고, 여신을 찬양하는 시련의 땅이지"

 

시원하게 미소짓는 아탈란테의 눈을 직시하지 못하고, 난 그저 얼굴을 떨굴 뿐이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턱이 없다. 그렇게 설계되어 정신구조를 초기화당한 그녀에겐. 이것이 인간들의 오락을 위해 바이오로이드들이 서로를 죽이는 엔터테인먼트란 사실이 결코 아탈란테의 마음에 닿을 일은 없다.

아마 콜로시엄 퀸도 마찬가지로 정신구속을 당했을 것이다. 일선에서 활약하는 인기 선수들은 쇼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출로서 그러한 처치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아탈란테와 달리 시합을 부풀리기 위한 잡졸. 즉 쇼의 조역에 불과하다. 그러니 공을 들여 정신구속을 행할 필요도 없다. 바이오로이드로서 표준적인 충성원칙만을 주입당해, 디렉터의 명령에 따라 스테이지 위에 올라 싸움을 강요받는다.

 

"허나 사냥꾼이여. 오늘 그대의 움직임은 실로 흠잡을 곳 없었다. 그대가 다른 멧돼지들을 잘 막아준 덕분에 나도 멧돼지떼의 우두머리에 전념할 수 있었지"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내 뒤를 맡아주길 바란다. 함게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동포여"

 

멱을 다 감은 아탈란테는 나를 마주보며, 그렇게 말을 남겼다. 완벽히 균형잡힌 나체는 실로 여신의 조각상처럼 아름답다. 맺힌 물방울마저 보석처럼 보일 정도로.

이 나체에 얇은 천 하나를 두를 뿐인 차림으로, 그녀는 창과 방패를 쥐고 다시 전장에 선다. 숨을 삼키는 그 미려함은, 덴세츠 엔터테인먼트의 바디 디자이너가 심혈을 기울여 계산한 결과물이다. 어떤 미녀가 피에 젖었을 때 관객을 흥분시킬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잔혹한 진실을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나체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왜 내겐 "아름다움"을 이해할 정신따위가 겸비되어 있는 것일까. 난 관객이 아니라 피를 흘리거나 또는 상대의 피를 뒤집어쓰는 조역일 뿐이다. 그녀를 아름답다 느낄 감정따윈 필요없는데.

 

"왜──"

"문제라도 있나, 사냥꾼이여."

"어찌하여 우리에게... 우리에겐 마음따위가 있는 것입니까"

 

그건 전투에 불필요하다. 검을 휘두르고 살을 베며, 동포의 단말마를 듣는 것으로 연명하는 나날에 마음따윈 없는 편이 낫다.

 

"의미 없는 질문이군. 이 가슴속에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우리의 전투에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네"

 

아탈란테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자상하게 어르듯 내게 말했다.

 

"우리는 싸우고, 숨통을 끊은 사냥감을 아르테미스 님께 바치지. 그러나 신께서 멧돼지 고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니네. 그 사냥감을 얻기까지의 용맹함과 불굴의 투지, 그것이 진정한 공물인 것이네. 생사의 갈림길을 이겨낸 우리들의 정신이야말로 신의 기쁨인 것이지"

"그렇...죠"

 

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구속된 정신은... 자신을 신화 속 영웅이라 믿게 하며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공물로서 의미를 갖는 건 피만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과 비명, 그리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이상 더럽혀지지 않길 바라는... 그런 기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분명 객석에 모인 인간들을 흥분시키고 환희케 하는 것이리라.

그것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그것만을 위해 영원히 싸운다. 우리는 덴세츠 엔터테인먼트의 바이오로이드.

오리진더스트의 기적이 가져온 새로운 오락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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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파수긔여어 (2020-06-14 20:47:28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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