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에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 하나를 올려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다. 하버드대 강의를 옮겨 놓았다고 보면 된다.
하버드는 보통 대학교가 아니다. QS 순위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일류다. 일류의 두뇌들이 일류 교육을 받는 곳이다. 강의가 일류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일류의 정의를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지만.
이 책이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많이 팔렸는데, 그 이유 역시 간단하다.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 때문이다.
1960년대에 이미 지적된 문제지만, 최인훈의 말을 빌리자면, 대한민국에는 '광장'이 없다. 그건 그가 살았던 격동의 시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공공의 영역이 과연 존재하는가? 과연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구조상 불가능하다.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다. 가장 표면적인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당들의 당비는 대부분이 후원으로 충당된다. 진성당원이 내는 액수는 거의 없다. 인간이라면, 받으면 보답을 해야된다는 것 쯤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장 깨끗해야할 사람들이 그 누구도 나 깨끗하다고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동네이니, 국민들이 과연 '정의'가 무엇일까에 대한 혼란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 나라에서 정의는 정치적인 문제로 자연 귀결된다. 결국에는 그게 좌파냐, 우파냐 라는 문제로 가버린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동체주의자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을 절충한 중도주의를 말한다. 에치오니(A. Etzioni) 등이 주창하는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개인의 자유보다는 평등의 이념, 권리(right)보다는 책임(responsibility), 가치중립적 방임보다는 가치판단적 담론을 중시한다. 공동체주의는 근대 개인주의의 보편화에 따른 윤리적 토대의 상실, 즉 고도산업사회화에 따른 도덕적 공동체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에 의한 원자화 등의 현상에 대한 불만의 이론적 표출로 볼 수 있다.
를 말한다. 요약하면 절충이라는 얘기다.
나는 절충, 타협, 양보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나는 싸움을 싫어한다. 그리고 이 단어들 안에는 싸움이 없다.
이 책이 굉장히 이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정치인들도 선뜻 이 책 이야기를 꺼내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절충이라는 개념이, 이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라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조차 극약처방이 되어버리는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먹히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럽다. 정치라는 공공의 영역이 개인적 영달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 무섭다. 나중에는 공공이라는 말에 조차 또 다른 빨간 스티커가 붙는 것이 아닐까 두렵다.
모두 같이 행복하게 살아보고자하는 사람들이 점점 돌아서가는 것에 몸이 떨린다. 싸움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이가 갈린다.
그리고 아래는 비슷한 내용의 포스팅 일부를 인용해보았습니다. 전문은 http://skysong.tistory.com/22 여기로 ㄱㄱ
모든 것이 일종의 우상숭배다. 좌우 내지 진보보수의 개념은 단지 구분을 위한 개념일 뿐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정책, 정치인도, 어떤 나라의 정치적 성향도 완벽하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에서) 좌파적 혹은 우파적이지 않다.
만약 당신이 정치,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한마디로 좌파, 혹은 우파라고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냉전의 유령을 양손에 옭아맨 21세기 포퓰리즘의 당주들에게 완벽하게 속은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결론이 당신을 좌우하게 하지 마라. 색안경을 벗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 당신 스스로 선택하라.
시험을 본다고 치자. 시험은 오지선다형이다.
숫자 하나로 모든 문제를 찍으면, 분명히 몇 개 정도는 확실히 맞는 다는 보장이 있다. (한 번호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없다. 문제 낼 때 규칙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당신이 직접 공부해서 '풀면(解)', 다 맞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