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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사하라
작성일 2012-04-03 15:18:34 KST 조회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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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왕좌의 게임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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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스포일러 조심. 전 그딴거 걍 무시하고 했습니다. 전 은근 즐기는 놈이거든요 =3=

 

 

사실 그리 현실적이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장점이다.

Kelvin Devris

 

약 반세기동안 판타지는 톨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분야였다. 조지 R.R. 마틴이 장대한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로 톨킨의 상자에서 대담하게 빠져나와 장르 자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전까지는 말이다. 호빗, 엘프, 오크, 드워프, 엔트, 발로그와 대부분의 마법 장비들이 사라졌다.(물론 모든 마법이나 괴물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선과 악으로 즉각즉각 판명될 수 있는 마니교적인(Manichean) 단순함도 사라졌다. 마틴의 서사시에서 단면적인 영웅들은 거의 없으며 거의 대부분이 사람의 살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중세 영국을 모델로 만들어진 세계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의 인기와 깊이는 중세의 삶을 정확하고 세심하게 그려낸데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틴의 세계가 단순히 공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적 경험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백만명의 독자들과 시청자들이 아주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틴 스스로도 이런 조류에 편승해서, 중세에 관한 한 "내 손에 올려놓을 수 있던 모든 것들을" 읽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웹 사이트에서 원 출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서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얼마나 정확한가? 얼음과 불의 노래는 과연 얼마나 사실적인가?

 

짧게 답하자면 "그렇게까진 아니다"일 것이다. 화난 팬무리가 나에게 트레뷰솃을 쏘기 전에 변명을 좀 해보자면 이건 절대 나쁜 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역사가로서 말하건데 나는 중세의 실제 삶이 굉장히 지루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마틴의 서사시가 역사적으로 너무 정확했다면 그의 이 장대한 서사시조차 너무나 지루했을 것이다. 나는 내 문학적인 흥분을 즐기기 때문에 마틴이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이러한 자유를 잘 사용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중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있던 문학 작품들이 마틴의 작품만큼이나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베오울프라는 이름을 가진 예여트족이 그렌델이라는 괴물의 팔을 뽑아버리고 동굴에서 그 괴물의 어미와 싸웠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는가? 실제로 중세 초기 스칸디나비아에 베오울프라는 이름의 족장이 있었다는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의 삶도 농경, 목축, 사냥, 어로와 몇가지 사소한 지역분쟁 관장 내지는 약탈이나 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로마 지배 후의 켈틱 브리튼에서 아더라는 이름의 군주가 있었겠지만 그래봐야 색슨족 침략자들을 상대로 짧고 실패로 끝난 방어전을 수행했을 뿐이다. 멀린, 엑스칼리버, 호수의 여인, 성배, 랜슬롯, 기네비어, 갤러해드 그리고 나머지 전무는 12세기 먼머스의 제프리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졌을 뿐이다. 성 조지는 용을 죽이지 않았다. 로빈 후드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고 노팅햄의 치안관과 싸우지 않았다. 마틴이 그랬듯이, 이 모든 이야기의 작가들은 실제 인생에서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가져오기보다는 만들어내는 쪽을 택했다. 왜냐하면 현실은 단조롭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상당히 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어린이일 때나 청소년일 때나 어른일 때나 일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젊어서 혹은 55살까지 장수하다가 죽었다. 폭력이 그들을 엄청나게 위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문맹이었고, 모험 따윈 해보지도 않았고, 교회 행사나 축제일이 아니면 별로 즐길 거리도 없었다.

 

야외에서 일하는 농부나 마을에서 땀흘리는 노동자들은 분명 오늘날의 농부나 사무원들보다 고단한 삶을 살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비참함의 정도가 과장되서는 안될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결코 거친 삶을 의미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거친 삶조차 불행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와 같은 당시대의 문학적 묘사들은 하층민들의 삶을 오늘날 생각되는 것처럼 끔찍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마틴의 작품과 같은 판타지 작품에서 나오는 하층민들이 매우 일상적으로 겪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억압은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일단 삶의 질이 이런 하층민들의 생산성에 달려있던 귀족층에게 이런 착취는 경제적으로 터무니없는 행위였다.
 
귀족들은 조금 더 나았다. 그들은 다양한 식단을 섭취할 수 있었고 재산도 많았으며 좀 더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과 즐길거리에서도 더 나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도 여전히 지루했다. 대부분의 고귀한 태생들 중 남자들은 쓸 일도 없을 군사학을 배우고 여성들은 계속해서 쓰게 될 가정 운영을 훈련받았다. 그래봐야 아버지나 다른 남자들이 정략적으로 잘 맞는 이에게 시집보내기 전까지는 별로 쓸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 계층은 사회의 다른 부분들보다 좀 더 폭력과 다양하게 관련되어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자주 연관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근친상간도 없었고(적어도 기록된 역사에서는 말이다) 난쟁이도 없었고, 암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스포일러 경고]얼음과 불의 노래에서의 몇몇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은 실제로 중세 역사에서 끌어왔다. 예를 들어 용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특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러했다. 물론 실제 용들이 아닌, 악에 대한 은유로서였다. 종교적 상징물들은 종종 용들을 기창과 발로 용들을 제압하는 성 조지와 미카엘을 묘사하기도 했다. 베오울프와 같은 스칸디나비아 신과 영웅들은 약자들을 지키는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이들을 죽이기도 했다. 1388년에 신뢰할만한 서사가 헨리 카이턴은 북잉글랜드에서 요정 용이 목격되었다고 적기도 했다.

 

A Dance with Dragons에서의 세르시 레니스터의 치욕의 걸음walk of shame은 중세나 고대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중세에서의 중대한 처벌은 보통 하나의 범죄에서만 허용되었다.:반역. 귀족 반역자들은 네드 스타크처럼 주로 목이 잘렸지만 귀족이 아닌 자들은 좀 더 창의적인 방법으로 처형되곤 했다.(1305년 윌리엄 월레스는 빈사상태까지 메달렸다가 거세되고 배를 가른뒤에야 목이 잘렸다. 그의 장은 장대에 둘러졌다.) 성인에게 치욕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 처벌 방식이었다. 귀부인들은 주로 치욕의 걸음으로 처벌받았다. 잔다르크는 잡힌 뒤 영국령 프랑스에서 치욕의 걸음을 거친 뒤에 재판을 받고 교회에 대한 반역으로 화형을 받았다. 마틴은 세르시의 행진은 제인 쇼어의 사례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제인 쇼어는 15세기 후반 에드워드 4세의 정부였다. 하지만 그의 서술은 실제로 제인 쇼어가 겪어야했던 것보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서술에 좀 더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다.

 

Bloddy Mummers의 가학적인 지도자인 바르고 호트는 희생자의 손과 발을 잘라내는 자기만의 표식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존 왕도 1215년 로체스터 성의 공성전에서 부상당한 반란군들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한다. 우스터의 존도 해롤드 고드윈슨이 1036년에 알프래드 애셜링에게 같은 짓을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마틴이 적었듯이 검은 매우 중요했다. 지도력의 상징이었고 효과적인 무기이자 의식용 도구이기도 했다. 검은 생일에 소년들에게 선물되고 자라는 동안 친구들과 그걸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과 민첩성을 기를 수 있었다. 검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을 때 선물되기도 했다. 왕좌의 게임에서 나이트 워치의 사령관이 Longclaw를 존 스노우에게 선물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Longclaw처럼 검들은 이름이 붙여졌고 손잡이가 필요 혹은 취향에 따라서 교체될 수도 있었다.

 

A Clash of Kings에서 나오는 Blackwater 전투에서 스태니스 바라티온의 함대는 강에 설치된 거대한 사슬과 'wildfire' 통들에 의해 패배한다. 마틴은 아마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비잔틴은 화염방사기처럼 쓰일 수 있는 그리스의 불이라는 인화성 물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의 불을 제공했던 자연 물질은 13세기초에 고갈되었던 듯 하나 후에 무슬림 군대들은 유사품을 만들어냈고 이는 손이나 투석기를 통해 투척될 수 있었다. 이런 인화 물질들은 사실 그렇게 효과적이진 않았고 그리 많이 쓰이지도 않았다.
 
강이나 항구에 설치된 사슬들은 반면 매우 효과적이었다. 골든 혼Golden Horn을 가로질렀던 긴 사슬은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했다. 언제 거기에 설치되었는지는 알려진바가 없지만  아이스랜드 서사시는 후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는 하랄드 하라드라다가 11세기에 도시에서 탈출할 때 방해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배는 어렵사리 이 체인을 넘어갈 수 있었지만 동행하던 배는 실패하고 결국 침몰했다. 로도스 섬, 요크 시, 다뉴브 강의 골루바츠 요새나 몇세기 뒤의 허드슨의 웨스트 포인트에서도 이런 체인들이 항구를 수호했다.
 
마틴의 중세 전쟁 방식 묘사는 정확한 점들이 있긴 하지만 중세의 삶에 대한 묘사처럼 실제 역사보다는 좀 더 극적인 면이 있다. 중세 전쟁에서 바람직한 결과는 죽음이 아닌 도주였다. 적들을 죽이는 건 굉장히 힘들었고 위험했다. 그저 도망치게 놔두는 것이 더 편했다.  전투는 종종 지휘관의 죽음, 영웅적 행위나 전투원들의 상대적 열정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행방이 갈렸다. 좋은 전략은 약한 적을 찾아내 혼돈에 빠트리고 도주시켜 빠르게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종종 중세 전투들은 시작해서 끝나기전까지 20~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더 길게 이어지는 전투는 결코 일반적인 양상이 아니었다.

 

프랑스군과 플랑드르 반란군이 1302년 7월 11일에 싸워던 쿠르트레 전투는 중세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들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반란군에게 패배란 몰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플랑드르군은 프랑스 기병들의 돌격에 대응을 준비했다. 참호를 파 이를 물로 채워놓거나 위장되었고 강이 만곡부를 따라 전선을 형성해 병사들의 도주를 어렵게 만들었다. 플랑드르 병사들은 프랑스군이 돌격하고 전투가 몇시간이나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무너지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플랑드르군은 창과 날카로운 말뚝들을 이용해 싸웠다. 이들은 프랑스 기병들을 끌어내리고 단검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수백명이 죽었고, 어쩌면 그 수는 천명에 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르트레가 결코 대세는 아니었다. 영국군이 매복중이었다가 발각되고 프랑스군에게 간단하게 밀려버렸던 빠떼Patays(1429)나 간단한 궁수간의 사격 교대 후 요크의 한 번의 돌격으로 랭카스터군이 퇴주했던 타우튼Towtons(1461) 전투도 있었다. 빠떼나 타우튼의 전투-그리고 폭력은 거의 없고 지루함과 병참 문제, 이질로 주된 문제였던 전역의 일상-는 판타지 문학에 좋은 소재는 결코 아니다. 마틴도 이를 잘 알고 있고, 그게 별로 일상적이지 않던 쿠르트레 수준의 폭력성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틴은 장미 전쟁을 소설로 옮겨놓은 것 같다. 래니스터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이고 이에 대적하는 스타크 가문은 요크 가문처럼 보인다. 그리고 도트라키는 몽골의 침공과, 자유 도시들은 한자 동맹과 겹쳐보인다. 하지만 글자 아래의 "실제" 요소들을 너무 과도하게 찾아보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마틴의 세계에서 정말로 매혹적인 요소들-세세한 서술, 인상깊은 대화, 다면적인 인물들, 복잡한 구성방식-은 그의 원 출처가 아닌 그의 상상력에서 비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진정한 마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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