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사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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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5-28 20:57:41 KST | 조회 | 88 |
제목 |
주말에 하려다가 다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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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투와 런던 지하철
도심지 폭격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이 어디로 숨어야할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집에 지하실이 있는 경우에는 나름 안락한 방공호를 꾸밀 수 있었다. 앤더슨 방공호는 별로 그러지 못했다. 습기가 가장 큰 문제였다. 폭풍우라도 있는 날에는 말그대로 홍수가 나버렸다. 앤더슨 방공호는 보통 정원 끝자락에 설치되었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은 어두운 정원을 가로질러야했다.
민간에 지급된 초기 방공호들은 비용 때문에 크기가 희생되었다. 침상이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닥에 쭈그려 앉아 밤을 보내야만했다. 무엇보다도 제대로된 불을 쓸 수가 없었다. 끽해야 촛불이나 횃불 정도였다. 난방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등유 램프가 만약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이런 난방기구들은 산소를 소모했다. 방음 또한 문제로 거론되었다. 철제 앤더슨 방공호는 폭발음과 사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막아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이 방공호에 원했던 점은 첫째로 방음성, 둘째로 사회성이었다. 그 다음에야 안전성이 거론되었다. 1941년에 이 문제를 깨달은 노동당 하원의원 찰스 키는 14만개의 귀마개를 시민들에게 공짜로 제공할 정도였다.
지하실이나 앤더슨 방공호도 없던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을까? 계단 밑이나 탁자를 벽에 붙여놓고 그 밑에 숨곤 했다. 적어도 깨진 유리나 목재, 가구들의 추락으로부터 어느 정도 방어는 제공했다. 공공 방공호로 이동하는 것도 대안이었다. 이 공공 방공호들은 시청, 기차역, 징발된 건물들에 위치했다.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도 강화된 참호나 벽돌로 된 지상 방공호가 지어졌다. 문제는 이런 방공호들은 짧고 강렬한 폭격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십여시간까지 지속되는 공습을 버티기엔 너무나 불편했다. 백화점들은 손님들을 위해서 지하실을 방공호로 사용했다. 이런 백화점 방공호에선 상품 판매행위까지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방공호 선택은 별로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진 않았다. 위 조사결과에서도 나왔듯이 사람들은 혼자 있기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했고, 사실 자신들의 집보다 안전한 편도 아닌 방공호로 피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방공호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폭격을 받았을 시 버틸 수가 없었다. 지하철이나 지하 방공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상 방공호들은 더 심각했다. 정부와 지역 행정부 사이에서 누가 비용을 대느냐를 가지고 싸움이 있었고, 그 결과 비용 절감이 하나의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방공호로 이어졌다.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은 벽돌 방공호 등이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 짧은 공습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블리츠에서 시민들이 겪어야했던 불편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지하실, 지하철, 심지어는 동굴로 몸을 피신하게 되었다. 치슬허스트동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0년 여름 대략 12,000~15,000명 정도의 런던 시민들(상당수가 이스트 앤드와 남부 출신이었다) 켄트행 야간 열차를 타고 동굴에 새로운 거처를 꾸리기 까지 했다. 물론 이런 동굴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전기가 놓이기 시작하고 적십자사는 극장, 식당이 포함된 의료센터를 운영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1940년 11월에는 지방 당국이 관리를 넘겨받아 공식적인 공공 방공호로 지명되었다.
런던 지하철은 1차대전 시에도 방공호로 사용된 바 있었다. 런던 전차사는 80개 이상의 역을 운영이 끝난 뒤 방공호로 사용되도록 했다. 핀즈버리 파크Finsbury Park에는 만이천명이, 킹스 크로스King's Cross에는 9천명이 수용되었다. 위생성을 이유로 그 실효성을 의심받기도 했지만 1917년에 대부분의 방공호는 문제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1924년에 지하철 역은 방공호에서 제외되었다. 런던 시민들의 출퇴근, 피난 및 사상자 수송에 지하철이 유용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윈저 성 지하 터널이 왕실 일가를 위해 방공호로 준비되고 화이트홀 지하 시설이 보강되는 와중에도 이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기관지 Daily Worker에서 이를 꼬집으면서 런던 지하철을 방공호로 개방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기도 했다.
1940년 여름 런던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런던 지하철역에는 공문이 내려왔다. 그 내용인즉슨 공습이 이뤄질때 지하철로 오는 시민들을 근처의 지상 방공호로 유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0년 9월 7일 '검은 금요일'에 이스트 앤드 주민들은 이 금지조치를 어겼다. 그들은 리버풀 스트릿 역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담당자가 군인들에게 봉쇄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흩어지기는 커녕 계속해서 몰려들면서 결국 문이 열렸다. 그러고 며칠 사이 이러한 '점령'은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짧은 거리 표를 끊고서 승강장에 들어가고 올라오지 않는 방식도 쓰이기 시작했다. 블리츠가 한창인 때에 런던 중심부 주민들 4%만이 지하철역을 방공호로 이용하긴 했지만, 그 4%가 17만 7천여명이었다. 1940년 10월에는 '통근자들의 운송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지하철역을 방공호로 쓸 수 있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다만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이러한 지하 방공호들은 주리 여성, 아이 및 노약자들을 위해서 남겨놓자는 것이었다.
귀차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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