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다가오니 작년 수능날이 생각난다.작년 9월, 언수외 만점을 받고 오만에 휩싸였다. "이제 그냥 슬슬 놀면서 준비할까? ㅋ"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로 게임이나 시작할까 해서 롤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었다. . .그래서 9월 모의고사 치고나서부터 하루에 한 5시간은 롤만 한 것 같다. 내 인생에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기 직전의 한 달(그때는 하루종일 와우만 함)을 제외하고는 가장 컴퓨터를 많이 들여다본 시간일 것이다.심지어 수능 전날에도 했다. 시험장을 갔다 와서 좀 불안한 마음으로 한 두세시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싸워서 잠시간 연락이 안되었던 친구였기에 눈물도 약간 흘릴뻔 했다. 그녀는 이미 고려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세시간 전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수능날이 왔다.
언어하고 수리는 아주 집중해서 풀었다. 언어는 다 풀고 한 번도 다시 반복해서 푼 경험이 없었는데(맨날 다풀고 푹 잠) 그 날은 세 번이나 돌려봤다.
점심시간에 수리를 틀린 걸 알고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냥 재수나 해야겠다 이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생각하던걸 놓으니 별로 긴장되지도 않고 빨리 쉬고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포기하면 매우 편하다는 인생의 참진리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외국어 시간, 완전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잠시 듣기를 훑어보고 나는 당황했다. 보기만 봐도 연계교재에서 연계된 부분이 다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무리수를 뒀다. 그냥 잠이나 자고 싶어서 듣기 문제를 푸는 동시에 18번 이후의 독해/문법 문제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래 고등학교 2학년때 '타임어택'이라고 부르면서 풀었던 방식인데 . . . 절대로 제대로 시험을 보기 위한 방법은 아니다. 내가 네이티브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25분 정도에 45번에 도달했는데. . . 갑자기 너무 쉬운 단어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Cross over"가 무슨 뜻인지 기억이 안 났던 것이다. 지금도 어떻게 이런 간단한 것을 까먹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것도 본문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보기에 있는 것이어서 대충 찍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때 외국어 영역의 난이도는 확연히 쉬웠고 45번은 3점짜리였다. 이걸 틀리면 2등급의 나락에 굴러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난 이미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요즘은 재수학원에 입학하는 것도 '입시 경쟁'이 필요한 이상한 시대 아닌가.
그때 갑자기 내 머리에 광명이 스쳐지나갔다.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이 그런 심정이었을까? 수험장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나는 답을 썼다.
어떻게 내가 그 단어의 뜻을 다시 기억해냈을까? 전날 했던 롤이 기억났던 것이다. 그 당시 롤은 아직 한국에 서비스되지 않아서 미국인들과 함께 플레이해야하는 게임이었고, 당연히 게임 자체도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그 당시가, 이제야 한글로 번역되어 플레이할 수 있었던 시기인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수능 전날 플레이했던 내 캐릭터의 대사 중에 '건너와라'는 대사가 있었던 것이다. 영문판으로도 자주 플레이하던 캐릭터였기 때문에 그것이 영문으로 무엇인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런 단어가 기억이 안났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여튼 그렇게 다행히도 외국어를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사회탐구도 얼빠진 상태로 풀었지만 생각하던 대로 점수가 나왔다. 그러고보니 얼빠진 상태로 풀었던 것만 만점인걸 보면, 어쩌면 잠시 넋을 놓은 상태에서 내 뇌가 제일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날 집에 돌아가서 채점을 하고 약간 허탈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재수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되었다.
수능만 생각하면 항상 이 일을 상기하게 된다. 그 간단한 단어가 기억이 안 났던 것도 황당하고, 그걸 하필이면 폐인처럼 하던 게임에서 단서를 찾아내 풀었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다. 물론 롤을 안 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컴퓨터에 롤을 설치하고 있는 과거의 나의 손목을 자르지 않는 한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