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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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11-13 16:59:58 KST | 조회 | 135 |
제목 |
타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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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대한 이 기억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짤막한 글로 옮기는 것 역시 기억을 지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기억은 유동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개념이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본래의 순수성이 오염된다. 즉 내가 이 기억을 글로 옮기고, 그 과정에서 내 생각들을 정화하고, 글줄을 세련되게 다듬는 동안 이 기억은 자연스럽게 소설로 재가공될 것이다.
오늘 낮 11시, 나는 부천 종합 운동장에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나는 문명화된 훌륭한 시민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그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남자가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남자는 마이리틀포니의 주제곡을 흥얼거리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의심할 나위 없이 나의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추스르며 책장을 덮고, 조용히 남자를 응시했다. 나는 나를 응시했다.
"내 생각대로군."
반대편에 있는 내가 말했다.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난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한 공간에 둘이나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완전히 똑같은 둘은 아닐세."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반대편에 있는 나는 지금의 나보다 좀 더 늙고, 좀 더 날카로워졌다. 이는 세월이 그의 얼굴을 저리 깎아놓았다는 뜻이다.
"자네가 살고 있는 연도는 언제인가?"
"2013년...입니다. 11월이죠."
"그렇군. 나는 2015년 11월에 살고 있네."
그는 나에게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나는 살짝 마음이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아시다시피 이런 일은 보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하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네. 친구. 그저 확률의 문제일 뿐이지. 그리고 일어난 이상 이것은 이제부터 현실이야."
"현실이라뇨. 제가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지. 어떻게 자네의 존재가 온전히 자네로서 빚어졌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동시에 확신했다. 이 남자는 빌어먹게도 나와 아주 흡사했다.
"2015년은 어떻습니까?"
"내 개인사? 아니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
"둘 다 말입니다."
"나는 별 거 없네. 군대에서 나는 내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지. 나는 가식을 떨치고 내가 하고자하는 걸 스스럼 없이 하면서, 동시에 주위에서 들려오는 욕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지."
"제가 원했던 삶은 아니군요."
"원한다라는 말조차 모두 허구일 뿐이야."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웠다. 지금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세계는요?"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 라이엇과 블리자드는 네트워크 공간을 넘어 물질세계에도 확고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버렸지. 라이엇이 탐욕스럽게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 들어가며 우리 사회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동안, 블리자드는 '소비자의 권리' 라는 허울 뿐인 명분 때문에 제국이 되는 걸 주저하고 있네."
나는 한 순간에 이 남자가 증오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좀 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네.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열렬한 블리자드 광신도이지. 미래의 자네가 그렇게 될 것처럼."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되잖습니까? 만약 지금의 내 심정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그건 곧 과거의 내 심정의 변화가 미래의 당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과거에 미래의 당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겠죠."
"자네는 이 사건을 반드시 잊어버릴 걸세. 설령 가끔 기억의 편린이 되살아나 자네의 머리 속을 찌른다고 할지라도, 자넨 그걸 한 가을 밤의 꿈이었거나 소설 쯤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릴 걸세."
담배 연기가 공허한 하늘 너머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비극을 거듭해서 저지르고 있는 이유야."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이 사건을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잊어버리는데 성공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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