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 비진천뢰飛震天雷
16세기에 만들어진
시한폭탄+
박격포탄+
파편탄모 게임에서 세종대왕님이 말씀하셨던 이 나라의 막강한 힘은 이걸 뜻한 것이였다도화선 방식의 지연신관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작렬형 포탄. 비진천뢰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중
완구로 발사하면 500~600보 정도 날아가 땅에 떨어진 후
도화선이 뇌관에 닿으면 폭발하여 안에 들어 있는 철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용도는 위에서 아래로 굴려서 보내거나, 그냥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심지에 불 붙이고 튀거나, 일반 박격포탄처럼 날려보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폭발. 전투가 끝났을 때 적군이
재사용할 수 없는 조선의 소모성 무기였다.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비격진천뢰 한방에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경주성 이외에도 임진년 7월 고경명
의병군
이 금성을 공격할 때, 계사년에 우배선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역시 계사년에 이순신 함대가 웅포 해전에서 육상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쓰였다. 계사년의 2차 진주성 전투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도 사용하는 등, 널리 활용하였다. 유성룡의
《진사록》에서 임진년 10월 기사를 보면 북쪽 지방에도 이미 비진천뢰가 각 지역 무기고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록》에서
중인이었던 저자가 1592년 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
시기는 임진년 이전이 될 확률이 높다. 안동의 김해 의병대는 특이하게도 계사년 2월 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향병일기》참조).
지식채널e 조선비밀병기 비격진천뢰쉽게 설명하자. 이 무기로 사용 용도를 지금으로 따지면 시한폭탄+박격포탄+파편탄을 전부 섞어놓은(...) 무기로 당시에는 이걸 적진 한복판에 떨어 뜨릴려면 중
완구에
넣고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단순하게 넣고 쏜다고 터지는 것도 아니다. 쏘기 전에 비격진천뢰 자체에 있는 도화선에 불
붙여서 이게 끝부분까지 타들어가면 폭발하는 지연신관이라 적이 가까이 있는 고지대 공성전에는 쏠 필요 없이 그냥 불 붙이고
굴리거나 떨어트리면 되기에 중
완구는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한 시점에 불 붙이고 튀기만 하면 된다.
한번 심지에 불 붙이고 내부로 타들어가면 이제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