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등병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수강신청부터 시작해서, 강의실 찾기, 자리 잡기, 출석체크, 밥먹는 것 까지.
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어설프고 어색했다.
복학 후 첫주간은 내 삶에서 가장 어벙한 기간이었다.
둘째주에 접어들면서 주변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응할만하다 싶으니까 밀려오는 과제더미,
또 한번 휘청거렸다.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1학년때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 1년을 보낸건지,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별로없다.
개강한다고 술, 신입생 환영회랍시고 술, 엠티간다고 술, 그땐 그냥 술이었다.
낙제점수를 받지않은 것은 둘째치고, 안죽은게 다행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수시간에 걸친 클릭과 타이핑으로 복학 후, 첫 과제를 완성시켰다.
이제 겨우 하나 완성시켰지만, 처음으로 무언가 제대로 해냈다는 것에 쓸데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과제는 직접 제출이었기에 작성한 파일을 인쇄소로 가져가야 했다.
사실 자필제출이 아닌것만 해도 감지덕지였으니 그 정도 수고는 해줄 수 있었다.
책상위에 자질구레하게 널브러져있던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며 USB를 찾아 헤맸다.
도무지 나타날 생각이 없는건지,
책상서랍장까지 빼내며, 먼지가 깔린 컴컴한 바닥을 손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려 봤지만
결국 손에 잡힌거라곤 1991년에 발행된 1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멍청하게도, 그렇게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수고를 하고나서야 이메일의 존재를 상기할 수 있었다.
사회에 나온지 두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다는게 거짓말 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있어서 한발씩 늦다.
그래서였을까.
고백컨데, 나는 자대배치를 받았을때부터 고문관이었다.
모든 것에 한발씩 늦는 고문관.
그때의 기억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기에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마우스 클릭 몇번을 하자 모니터위로 포털사이트가 나타났다.
어렴풋이 예전에 사용했던 아이디를 떠올려 로그인에 성공했다.
최근 접속일이 3년전이라고 표시되는 걸 보면 확실히 1학년때 사용했던 아이디가 맞는 모양이었다.
'받은편지 4618통'
받은 메일들 대부분이 상업광고, 대출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개중에는 더워보이는 누님들도 잠깐씩 계셨다.
그덕에 메일을 삭제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메일쓰기 버튼을 누르고 '내게쓰기' 라는 항목에 체크를 하려던 찰나였다.
알림팝업창이 떴다.
'작성중이던 메일이 있습니다. 불러 오시겠습니까?'
3년전이 작성중이던 메일이라.
볼것없이 과제에 대한 내용이겠거니, 취소버튼을 누를까 생각하다가
결국 호기심에 확인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수신자는 나, 그러니까 내게 쓴 메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쓴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메일을 사용해서 '내게쓰기' 기능을 이용해서 내게 메일을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용을 찬찬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안녕.
반가워. 아! 내가 누구냐고?
하긴, 넌 내가 누군지,
왜 이런 메일을 보내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네.
아! 그렇다고 너무 기분 나쁘게는 생각 말아줘!
사실, 학기초부터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그래서 몇번이나 너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어.
너는 항상 바쁘더라.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았고...
음...
아니야, 어쩌면 이건 핑계일지도...
나는 그냥 용기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내가 널 볼수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두번있는 수업시간 뿐이었어.
일주일내내, 너랑 듣는 수업시간만 기다려졌어.
그러다가 어느날, 교수님께서 조별과제를 내주셨잖아?
그때 내가 너랑 같은조가 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그리고 정말로 너랑 같은조가 되었을 때, 난 뛸듯이 기뻣어.
그래, 맞아.
어느샌가 정말 니가 좋아졌나봐.
지금은 너랑 같이 이렇게 인쇄소에 와서 프린트를 하고있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아.
니가 이 메일을 읽을쯤이면 내가 누군지,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았겠지?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기내볼게.
토요일 저녁 7시에, 어의관 앞 벤치에서 기다릴게.
만약 니가 나를」
그게 메일의 끝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쓰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것이었든 아마도 황급히 인터넷 창을 꺼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메일이 보내지지 않은채, 임시로 저장되어 3년이나 그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이 메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물론, 3년 전의 나는 이 글을 읽지 못했고, 당연히 주말엔 나가지도 못했다.
술과 살았던 기억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까마득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3년전의 그 날, 그 애와의 기억.
그 애와 함께 인쇄소에 갔던 다음날,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우리조는 성공적인 발표와 함께 과제를 마쳤다.
3학년 조장형은 수고했고,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며
자기가 한턱내겠다고 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 날 저녁, 나와 그애도 그자리에 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
거나하게 취한 조장형이 폭탄발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대상은 그 애였다.
갑작스러운 조장형의 고백은 술자리에 잠깐의 정적을 불러왔지만,
이내 환호와 함께 '받아줘'라는 구호가 제창되었다.
그 제창은 옆테이블로 옮겨가더니, 순식간에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같이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 목소리들 중 하나였다.
그 애는 대답은 커녕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 대답도 않은채 그 자리에서 5분 정도가 흘렀고
술자리는 어색하게, 그렇게 흐지부지 끝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종강과 함께 나는 입대했다.
제기랄.
또 한발 늦었다.
하긴, 늘 이런식이다.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알게되다니.
나는 병신중에서도 진짜배기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서 더 병신같은 짓거릴 해도 더 떨어질곳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타과였지만 같은 인문대학이였던 그 애.
그 애의 과사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
흥분한 내 목소리 탓이었는지 조교가 도리어 역정을 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냐고,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이 왜, 무슨이유로 연락처를 알고 싶어하냐고,
개인정보를 너무 우습게 아는 것 아니냐며, 말의 끝자락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하긴, 다짜고짜 흥분한 목소리로 학부생 연락처를 내놓으라는 미친놈한테
어떤 누가 알려주겠나.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가빠졌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화상으로 오가던 대화가 수초간 단절되었다.
다시 몇초가 흐르고 조교는 '여보세요?' 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과부터 했다.
조교는 '아, 네. 뭐...' 라고 대답해주었다.
오고가던 고성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다시 정상적인 대화가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부끄러움은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또 한발 늦을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 말해주기로 했다.
조금씩, 천천히, 내가 기억하는, 내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꽤 오랜시간 동안, 감정에 호소하며 내 안타까움을 전달했지만
결국 조교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죄송하지만' 이었다.
나는 맥이 빠진체 알았다고 답했다.
조교는 괜히 미안했는지 메모 정도는 남겨줄 수 있다고,
있으면 남겨주겠다고 했다.
"그럼..무궁관 앞 벤치에서 7시에 기다릴게요. 라고 전해주세요."
"언제 말씀하시는거에요? 오늘이에요? 아니면 내일?"
"나올때까지, 매일 기다릴께요."
"아니, 저기요."
그렇게 나는 전화를 끊었다.
길어야 수십분 통화했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 화면에는 78분 43초라고 적힌 글자가 깜박이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혹시 휴학한 건 아닌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건지.
정말이지, 왜 이런건 뒤늦게 생각나는 건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진짜 한심하다.
저녁 7시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암흑속에서 가로등 하나에 의지한 채 벤치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3년전에 그 애도 이곳에서 두렵게 홀로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아려왔다.
그렇게
십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고,
오십분이 지났다.
결국, 쪽지를 전달받지 못한건가.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아까 낮에 전화주셨던 OO과 조교인데요.-
"아, 네. 혹시, 저기... 그 학생 학적상태가..."
-안그래도, 그것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찾아봤는데요, 찾으시는 분은 올해 2월에 조기졸업 하셨더라구요.-
"조기... 졸업이요?"
-네, 성적이 좋으셔서 6학기 조기졸업 하셨네요.-
그렇구나.
3월에 복학했는데, 그 애는 2월에 졸업을 했구나.
역시 나는 또 한발 늦은건가...
상실감을 느낄새도 없이,
전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음성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저도 이런 말씀 전해드려서 죄송하네요.-
"네... 괜찮습니다."
-힘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졸업하자마자 저희과에 조교로 채용되셨다나봐요.-
"네?"
-그러니까 대학생활 힘내라구.-
학교 커뮤니티에서 퍼온글인데
이런거 너무 좋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