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의 초기단계에서 가장 핵심의제는 분명 광우병이 맞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광우병 위협에 대한 공포가 사회적으로 심했고, 동시에 그 확실하지 않은 위협을 막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분노(검역주권 포기)가 시위의 핵심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 집회의 규모는 아무리 커도 1만명을 넘지 않는 규모였습니다. 시위가 한달 내도록 지속되었지만 사회적인 관심도 역시 그 뒤의 시기와는 명백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비록 신뢰도에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위키백과의 당시 집회 관련 일지에도 기록이 있습니다.http://ko.wikipedia.org/wiki/2008%EB%85%84_%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B4%9B%EB%B6%88_%EC%8B%9C%EC%9C%84#2008.EB.85.84_5.EC.9B.94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계에서는 광우병 의제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집회를 나가게된 계기는 5월말에 있었던 경찰의 과잉진압 이슈가 터지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시기 집회의 규모는 1만명 수준에서 5만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광우병 이슈에는 소극적으로 반응하던 저같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경찰의 폭력'에는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경찰에 대한 분노가 커짐과 동시에 시위양상이 과격해지기 시작한것도 이시기부터입니다. 처음부터 유언비어에 낚인 사람들이 과격시위를 벌인게 아닙니다.
시위가 수십만명이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불어난 다음 1+5 의제라는게 채택되고 공영방송 사수, 민영화반대와 4대강 반대같은 이슈들이 광우병 못지 않게 커다란 이슈가 되었습니다. 나온 사람들이 전부 광우병 때메 나온게 아니라 다들 생각이 달랐던 겁니다. 특히 저같은 경우 신방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저희과 전체가 공영방송 관련 이슈로 한강 건너서 행진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집회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면 어떤 집회를 가더라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구호도 다양해집니다. 그건 '순수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연한 현상입니다.
애초에 순수한 추모를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시 순수하게 광우병이 걱정되어서 갔다는 사람들은 유언비어에 낚인 좀비 취급하고, 광우병 관심없고 민주주의 위기 프레임때문에 광장에 나간 저같은 사람들은 '시위꾼' 취급하실건데 대체 원하는게 뭐냐구요. 그냥 시위 하는거 자체가 싫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시죠?
제 의견이 아닌 타 사이트에서 긁어온 그 사람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