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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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5-10-02 18:03:22 KST | 조회 | 423 |
제목 |
아몬의 목적은 고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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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아몬이 일종의 니힐리스트일거라 생각했다. 젤나가처럼 생명의 끝의 끝까지 엿본 고등한 생물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만 하다.
사람들이 왜 생명을 환희, 경이로움, 미지의 세계 등등에 은유할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주의 순환이라는 게 여전히 우리에게는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지에서 공포와 아름다움을 본다. 젤나가도 한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기술적, 윤리적 분석을 모두 끝마치고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결함을 모조리 극복한 그들에게, 우주는 더이상 정복욕을 부추기거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었다. 우주는 공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마 젤나가들은 자기들의 철학기조가 집단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그들의 강박적인 생명 중시사상을 보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생물을(그 생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진보시키고, 삶의 진창에 억지로 고정시켜 놓는다. 그 행위는 본질적으로 젤나가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더이상 경이롭게 느껴지지 않는 우주를 어떻게든 존속시키려는 편집증적인 강박증이다. 하지만 아몬은 달랐다. 아몬은 존재에서 고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우주에서 가장 진보한 생물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우주의 무의미한 순환을 끊는 것이다.
정말 아득하게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결국 삶은 비극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존재 앞에서 언젠가는 굴복하게 되어있다. 심지어 4차원 시공간 역시 언젠가는 끝을 맺을 것이다. 뭐 말마따나 우주가 축소했다가 다시 제2의 빅뱅으로 재탄생하는 주기를 계속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우주는 유한하고 더 무한한 무(無)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불완전한 존재들은 결국 그로 말미암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생명의 삶이, 그 윤회가 끝없이 계속될 고통의 수렁 속에서 자맥질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마 대부분은 생명을 계속 지키기로 할 것이다. 어쨌든 존재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가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니까. 그래서 젤나가는 프로토스와 저그를 진화시켜 자신의 계승자로서 우주에 존속시킨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서 <유의미함>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대가가 영원한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아몬은 좀 더 이타적인 결정을 했다. 그는 생명의 모든 고통을 끝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가 순환하는 모든 섭리를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존재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다는, 아주 지극하고도 당연한 논리를 그는 받아들였다. 존재의 모든 면을 초월했으면서도 여전히 존재로 남아있고자 하는 다른 젤나가들의 사춘기적 강박증을 뛰어넘은 고매한 사상이다.
물론 하급한 종족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그도 하급 종족들이 자신의 뜻을 헤아리리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것 같다. 탈다림을 무의미한 무한경쟁의 홀에 내던지고, 거기서 추락하여 존재의 종말을 맞이한 패자들에게 진정한 축복을 베푸는 걸 보면, 그는 강림하길 원하는 탐욕자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고취된 니힐리스트에 가깝다. 어쨌든 프로토스는 아몬에게 대항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몬의 <존재에 대한 성전>이 결코 타락한 자의 몸부림이라고는 볼 수 없다.(존재를 대변하는 젤나가의 입장에서는 타락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면 아몬의 입장에서도 젤나가를 타락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아몬의 동기는 불순하지 않았다. 아몬은 "순수한"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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