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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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01-26 17:15:54 KST | 조회 | 1,748 |
제목 |
안도 유랑기:킥스타터 농장에서 진입장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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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으니 바깥이 요란해졌다. 이씨를 대동해 현관문을 나서니, 저 멀리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형형색색의 화포를 쏘아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호기심에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 이름은 노개투 리구(Rocket League)로 최근 증기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레 경주 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입장권 가격이 저렴하여 이씨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았다. 노랗고 파란 자동 수레들이 꽁무니로 화포를 쏘아대며 서로에게 달려드는 꼴이, 발정 나서 눈 홰가 뒤집힌 잡종 개를 보는 것 같더라. 그 수레들이 서로 주둥이를 부닥쳐서 뒤엉키고 으깨지고 하며 커다란 금색 공을 움직이니, 그 공을 흰 그물로 만든 채에 집어넣으면 승점을 얻는 것 같더라. 실로 양놈들 경기답게 야시시하고 폭력적이기 그지 없었다.
경기가 끝난 뒤 나와 이씨는 다시 증기선에 올라탔다. 이씨가 철 삽으로 석탄을 양껏 퍼먹이자 바퀴가 힘차게 물장구를 치며 배를 떠밀었는데 언제 봐도 신비한 광경이었다. 이씨가 말하길, 배는 북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타고 속도를 얻어 북방 빙하 지대를 민첩하게 가로지를 것이라 하였다. 과연 시간이 좀 흐르자 코 밑을 도는 공기가 차갑고 건조해졌으며, 파도를 타고 둥둥 떠내려오는 큼지막한 얼음 조각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나는 증기국에서 소액결제로 산 두툼한 양모를 도포 위에 덧입었다. 그러나 추위는 갈수록 두텁고 날이 깊어져 양모 옷을 뚫고 내 살을 에이었음이라. 턱 밑까지 기른 수염이 딱딱하고 살얼음이 져 목덜미를 찔렀으므로, 이씨가 권하는 대로 면도할 수밖에 없었다. 동거울에 수염을 민 내 얼굴을 비춰 보이니 몰골이 참 핍진하더라.
"에이, 이거 참."
이씨는 30분을 두고 한 번씩 욕지기를 했다. 그는 하루에도 열댓 번 함교에 올라가 얼어붙은 보오일러 배출구를 만졌다. 추위가 가시질 않으니 배도 내장이 얼어붙기 일쑤였다. 하루는 도무지 보오일러가 말을 듣지 않아 이씨가 두 손을 다 놨다. 그는 물길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추위가 좀 가셔 배가 녹을 때까지 구동부를 쉬게 해주자고 말하였다. 나는 배와 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그리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 밖에서는 신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배가 섬처럼 보이는 뭍 가까이 스쳐지나갈 때가 있었는데, 서리 낀 대지가 허연 가운데 광대한 침엽수림이 자라 있더라. 바늘 같은 잎이 수천 개씩 돋은 굵은 나무 줄기 아래에 얄쌍한 열매가 맺혀 있으니, 몇몇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 열매를 따는 것이었다.
"킥스타터 농장입니다." 이씨가 말했다.
"그건 또 무엇인가?"
"빙하 녹은 물을 먹고 비옥해진 땅 덩어리에 적선을 받아 열매 씨를 옮겨다 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 사람들이 나무를 잘 가꿔독특한 맛이 나는 게임 열매를 따다 사람들에게 팝니다. 증기국에도 독립 게임 개발자들이 퍽 있지만 땅값이 비싸고 큰 게임사들 텃세가 심해 킥스타터 농장을 일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핍진한 땅에도 삶의 지혜가 서려 있구나."
나는 실로 감탄하여 그리 말했다.
킥스타터 농장을 일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소란이 들렸다. 소란의 진원지가 우리 배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귀를 기울이니, 번듯해 보였던 나무 열매에 알맹이가 없어 실망한 사람들의 투정이더라.
"또 이 모양이군!"
"하여간 킥스타터 놈들 지원금만 홀랑 가져다 먹고 튀는 꼴을 보라지! 세금 거둬가는 도둑놈보다 더 악랄한 심보구먼!"
"저런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씨가 말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일을 벌려도 언제나 날파리 몇 마리가 꼬이기 마련이니, 나는 조선에서 공부하고 가다듬은 성정의 원리를 떠올렸음이라. 사람이 마음 씀에 있어 성이 앞서야 하거늘, 오랑캐 땅에도 난잡한 정이 판치니 게임 업계가 이미 혼탁한 지경에 이르렀구나. 탄식할 것이 우리 조선 게임 토양뿐만은 아니로다.
더 길을 가니, 이번에는 왠 농부 하나가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다.
"밭 갈기가 영 힘드니 이대로는 게임 심기에 턱없이 부족하겠소. 그러니까 적선을 더 받도록 하겠소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이놈! 이미 달러 수천 장을 받아먹고 또 배가 주렸다는 것이냐?"
"시제품이라도 제대로 가져와 봐라! 좀 안심이 되야 투자를 할지 말지 결정하지, 내 참..."
나는 호기심이 동해 목소리를 키워 농부에게 물었다.
"거, 게임 이름이 뭐요?"
농부가 사방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우리 배가 자기 지역을 지나고 있는 걸 알더라. 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리 대답하는 것이다.
"쉔무3이오. 관심이 있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쉔무3이라니, 이름부터 야릇한 것이 이미 아니 될 떡잎이로다.
킥스타터 농장이 멀어지니 추위가 좀 얕아지더라. 이씨가 석탄을 떼니 그때서야 바퀴가 잘 돌았다. 내가 함교 의자에 앉아 잠시 조각잠을 청하고 있는 사이, 이씨가 날 깨웠다.
"저기 진입장벽이 보입니다. 절경입니다.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 선생님."
나는 이씨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 생경한 광경을 어떻게 문자로 옮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부족한 능력을 모두 짜내어 한 번 기록해보도록 하겠다.
처음 눈에 띈 건 작은 섬처럼 물 위에 둥둥 뜬 얼음 덩어리들이라. 투명한 바닷물 밑으로 빙하의 아랫배가 보이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시선을 드니 갑작스레 출렁이는 바다가 끝나고, 그 위로 거대한 얼음 벽이 솟아올랐다. 흡사 거대한 파도가 천신의 날숨을 받아 한 순간에 얼어버린 듯 했노라. 얼음 벽은 내가 고개를 완전히 들어 하늘을 흘길 즈음에야 끝이 보였으니 여러분이 그 높이를 헤아릴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로 신묘한 광경은 그 다음이니라. 아득한 장벽 너머로 푸르고 노란 불꽃이 만개한 연꽃 모양으로 느릿느릿 퍼져 하늘을 수놓고, 남은 불씨가 앙금처럼 창궁 아래로 가라앉으니, 그 광경이 수천 줄기의 번개가 한꺼번에 지상으로 내리 꽂히는 듯 하더라. 그 뒤로 귀가 길고 야릇한 몸을 가진 남자와 여자들이 한 걸음에 수백 리를 뛰어넘어 칼을 누비고, 적색 투구와 적색 갑주를 입은 천군의 신하들이 큼지막한 화포를 한 손에 들고 불벼락을 내리면서 하는 말이 "보 디 암배라For the Emperor" 이니, 하늘 나라 사람들이 쓰는 신묘한 주문인가 하더라.
"와해마라는 게임입니다. 星际争霸(Starcraft)보다 훨씬 대단한 게임성을 가진 최고의 게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외면 받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게임입니다."
"아아, 와해마...그 전설적인 게임이 바로 저 빙벽 너머에서 영원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니, 갑자기 구름이 갈라지며 각지고 길쭉한 땅덩어리가 낙하하는 게 아닌가. 그림자가 배와 장벽을 덮고 그 뒤로도 수 천 해리 물길을 덮더라. 자세히 보니 땅덩어리는 모두 무쇠로 만들어져 있었고, 꽁무니로 용트림같은 화포 4개를 끊임 없이 분출해대니, 노개투 리구의 얄쌍한 수레들은 감히 그 위용과 견줄 수 없음이라. 이윽고 땅덩어리는 느릿느릿 머리를 옮겨 천천히 나아가고, 그 뒤를 점점이 박힌 작은 땅덩이들이 길다란 화포 꼬리를 남기며 따르더라.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 최고 스케일의 MMO 게임이지만 진입 장벽 때문에 선택받은 몇몇 천인들을 제외하곤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게임 이부 온라인입니다."
"나도 이부 온라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네. 우리 조선인들 중에도 용감한 몇몇이 수행을 거쳐 그들의 궤도에 올랐다고 하지."
절경이 끝나고 진입장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치 꿈을 꾼 듯이 내 머리가 멍멍해지더라. 환상을 본 듯 하여 볼을 꼬집으니 따끔한 감각이 온 몸으로 출렁였다. 과연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니로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저리 휘황찬란한 구래피(Graphic)를 가졌음에도 범접할 수 없는 얼음 장벽 때문에 감히 범인들이 다가갈 엄두를 못내는 천상의 게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더라.
울적한 마음에 나는 밤바다의 청명한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시를 한 수 지었다.
改任萬他:고쳐야 할 게임들이 수만 개씩 있고
(개임만타)
全赴盧爭:온전하고 사리사욕 없는 게임으로 나아가는 마음
(전부노쟁)
決國愛難: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못지 않으나
(결국애난)
佛理自痘:부처의 이치로 스스로를 다스릴 뿐이노라.
(불리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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