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아이덴타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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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02-16 16:59:11 KST | 조회 | 408 |
제목 |
[단편] 행복한 이야기가 진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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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안 갈 사람의 이름을 말하자 병원 직원이 호실을 말했다. 병원 엘리베이터는 너무 느렸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그냥 계단을 골랐다. 들고 온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가야 할 층까지 도착했을 때는 땀이 날 뻔했다.
병실에는 침대가 여섯 개 있었다. 방금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병실 안에 음식 냄새가 남아있었고 복도에서는 아직도 양철 식판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문안을 온 사람은 나뿐이다.
당사자로부터 받은 메일에는 자신을 할머니라고 했지만 본인을 직접 보니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애였다. 침대에 붙은 명패를 보니 ‘서주리’라고 적혀 있었다. 밑에는 싸구려 과일 주스 선물 세트가 쌓여있었다.
여자아이는 침상에 앉은 채로 토마토 주스 하나를 벌컥 들이키고는 옆에 대충 놓았다. 눈은 만화책을 향해있었지만 내가 왔다는 건 알고 있는 눈치다. 나는 여자 아이가 마셨던 주스 병을 바깥에 있는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말을 걸었다.
“다른 위문품도 많은데 왜 하필 사람들은 병문안 올 때 주스를 가져오는 걸까?”
“아저씨는 뭘 가져왔는데요.”
여자아이는 건방지게 말하며 만화책을 접었다. 머리에는 따듯해 보이는 털모자를 썼는데 삭발을 했는지 목덜미에도 머리카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 손은 비어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 눈만 마주쳤다.
하.
그렇게 말하는 듯 눈동자를 내리깔고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메일에는 할머니라고 적혀 있었는데.”
“여자가 나이 좀 속일 수 있죠.”
나는 넌지시 말했다.
“속인 건 나이만이 아닌 거 같다만.”
“그렇게라도 해야 올 거 같았어요. 그런데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네요.”
나는 저 여자아이가 날 반가워하는 건지 어색해하는 건지, 하다 못해 날 싫어하는 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뒤늦게 들어오는 길에 병실 문을 연 채로 온 걸 생각하고 닫았다. 여자아이의 침상 옆에 자리를 잡으니 머리 위에서 주스가 마시고 싶으면 마셔도 된다는 권유가 왔다. 나는 손짓으로 거절하고 본론을 말했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나도 생각해두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요.”
여자아이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얼굴로는 낙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오래 전에 관심을 잃었거든. 내가 여기 온 건 그 내용을 어디서 봤는지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부탁을 무시하는 건 매정한 일이기도 하고.”
“제가 진짜 할머니였으면 즉석에서 결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음 속으로 몇 개 떠올려 둔거는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서 고르면 끝이니까.”
“아주 예쁜 할머니였다면 그랬을지도.”
소녀는 그 농담을 별로 재미있어 하지는 않았다. 같은 장소에 계속 묶여 있는 사람한테는 무슨 일을 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다.
“부모님들은 자주 오시니?”
“주말에는 와요. 평소에 다른 일들 하시느라 바빠요”
“친구들은?”
“다들 할당량 채웠어요.”
더는 오지 않는다는 뜻인가. 나는 잠깐 분위기를 전환할만한 화재거리를 생각해봤지만 투병하는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상대가 질문을 했다.
“아저씨, 제가 읽은 것 말고도 다른 연애 소설 쓴 거 있어요?”
지금까지 들어본 목소리 중에서 가장 여자애다운 어조였다. 진심으로 기대하는 모양이다.
“아니. 네가 읽은 게 유일한 거다.”
여자아이는 실망하지 않고 바로 추궁하는 말투로 물었다.
“혹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건가요? 그래서 그것 외에 다른 건 못 쓰는 거죠?”
“맞아.”
이제 와서 그런 거 창피해 할 나이도 아니다. 여자아이는 내게서 좀더 다양한 반응을 원했는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다. 그 얼굴은 이내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주인공이 결국 아저씨의 분신이라는 거잖아요? 결말은 못 주셨지만 대신 제 환상은 와장창 깨주셨네요.”
“듣자니 마음이 아파지는 걸.”
나는 시계를 봤다. 15분만 더 있다가 가기로 했다. 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병실 공기는 딱딱한데 텔레비전에서 가짜 청중 웃음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나까지 우울해졌다.
“그 소설은 어디에서 본거냐?”
여자아이는 꽃병 옆에 있는 스마트 폰을 가리켰다.
“우연히 찾았어요.”
나는 간신히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에 학업을 때려치우고 기분 전환으로 끄적거린 걸 인터넷 소설 사이트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이 애는 그걸 스마트 폰으로 읽고 결말 부분을 알고 싶어서 사이트 회원 정보란에 등록되어 있는 내 이메일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10년도 전에 올려둔 건데 그걸 어떻게 찾은 거냐?”
“그냥 추천 받았어요.”
소설과 작가 중 어느 쪽을 추천 받았는지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자아이가 다시 만화책을 펼치길래 부담 없이 일어설 수 있었다. 나는 잘 있으라고 말한 다음 돌아올 말을 기다렸지만 상대는 입을 다물고 만화책만 보고 있었다. 나는 병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난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계속 생각해냈다. 오래 전에 본 듯한 느낌이 드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낌 없이 주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가차없이 빼앗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닿지 않는 것, 애매한 것, 품을 수 없는 것 모두 사랑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순환 논법과도 같아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위해 공리를 세웠다. 그 공리의 이름은 호감이다. 호감이 들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는 호감을 품지 않는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했었던 사람에게 아직도 호감이 남아있기도 한다. 호감은 달콤하고 질리질 않는다. 하지만 호감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사랑을 안다고 생각했다.
몇 번인가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용기를 수반하는 감정을 섞은 선택은 섬광처럼 순수하지만 섬광은 섬광일 뿐, 섬광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바로 사라진다. 나는 그들이 내게 관심을 준 이유가 바로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날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나도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함께 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덧칠하는 기만을 품는다. 나는 그걸 직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나 미성숙함 때문에 사랑을 했다고 믿는다. 마치 환각처럼.
그런 오만 속에 마음은 계속 여위고 아팠다. 그 아이들에게 칼로 치듯 그건 사랑이 아니 라고 말할 때마다 정맥은 얼어갔다. 얼굴들은 기억에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품는 연정이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 너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우와 오랜만에 읽어보니 진짜 창피한데.
집에 돌아와서 한참 전에 글을 올렸던 홈페이지로 가서 읽어보니 예전 생각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조회수는 100회도 넘질 않는다. 어차피 더 읽을 사람도 없을 테니 지우려 했지만 병실에 있던 그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냥 내버려두었다.
굳이 끝까지 읽어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 머리 속에 있던 거니까. 창을 바꾸고 원래 하던 원고를 진행했다. 그 아이가 잊혀지질 않았다.
다음날 나는 그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선물도 가지고 갔다. 내 손으로 직접 쓴 초고다. 학창시절 글을 인터넷으로 올리기 전에는 언제나 야간 자율 시간에 미리 손으로 쓰고는 했다. 여자아이는 나의 방문과 선물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결말을 알려줄 수 없는 대신 이렇게라도 해주면 보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악필이다. 여자아이가 보고 있는 노트에는 내 학창 시절의 울분과 치기, 그리고 사랑도 들어있었다. 예전에는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런 변덕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아이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생각이 바뀌어서 나는 계속 돌려달라고 재촉했다. 창피하다.
“다 봤지?”
“안 돌려줄 거에요. 어차피 이거 필요 없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 드는 걸 무시하며 나는 그 옆에서 여자아이의 만화책을 봤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만화를 보면서 내가 작가를 맡으면 훨씬 나은 장면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아이가 어찌나 꼼꼼히 읽었는지 그 동안 나는 여기 있는 만화책을 다 보고 말았다.
“부탁 좀 들어줄래요?”
“뭐 말이냐.”
“여기 읽어봐요. 나긋나긋하게. 내가 ‘그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뭣.”
“어서요. 작가한테 직접 육성으로 듣는다니.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자신의 결과물을 좋아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점잖은 얼굴로 거절하고 싶었다. 더 깊은 마음 속에서는 그 시절의 감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품위 없이 독자의 요청대로 행하는 작가가 됐다.
읽어달라는 부분은 주인공 화자 ‘나’가 남몰래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장면이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논하며 전하려 한다. 그래 이거 내가 학창 시절 때 진짜 했던 일이다. 한창 쓰던 중에 옆에 ‘그 아이’가 다가와서 주인공의 노트를 뺏어가고 냅다 읽어버린다. 그것도 내가 겪었던 일이다.
창피한 만큼 보람도 있을 거라 믿었다.
[살아가는 건 떨어지는 일과 참 비슷합니다. 독수리나 비둘기로 태어난 이는 날아가고 물고기로 태어나면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그대로 죽겠지요. 살아가는 일은 평범한 불행이라며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떨어지기만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포기하지 않고 날개 대신 팔을 열심히 흔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두 의미 없습니다. 사랑이 생명과 무생물을 가릅니다. 사랑이 죽음과 삶을 가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이 없듯이. 오로지 죽음만이 확실합니다. 당신에게 청합니다. 죽음이 삶을 완성시키듯 제가 당신의 일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저에게 와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기별 없이 사라지는 썰물처럼 사그라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감과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의 영혼을 바라보지 않은 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영혼을 보여줄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을 소유할 기회, 당신의 소유물이 될 기회를 주십시오. 그 모든 순간 속에 우리가 겪을 기억과 시간은 낯설 겁니다. 하지만 겨울에 뜨는 한낮의 달, 곁눈질로 보는 저녁의 빛, 손 위에 녹아가는 봄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겠죠.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될지 우리는 그걸 확인하게 될 겁니다.]
“우와, 이거 상상 이상으로 쪽 팔려서 미치겠네.”
나는 더워서 셔츠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여자아이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내 얼굴은 분위기 잡으면서 읽느라 올라온 감정과 수치심으로 빨갰다. 에어컨이 실외기를 통해 냉각하듯 나는 입으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여자아이가 평가를 말했다.
“잘생긴 남자애한테 이런 편지를 받으면 누구든 단박에 좋다고 할걸요.”
“다 좋은데 형용사 하나가 많이 거슬리는구나. 잘생기면 뭘 하든 상관없잖아.”
“천만에요. 요즘 여자애들 눈이 얼마나 높은데요.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거 믿고 들이댄다면 단박에 걷어차인다고요.”
“그러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책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여자아이는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내일 평범한 선물을 가져올 테니 그것과 교환하자고 했다.
병원 복도에서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병실 바깥에서 선채로 나와 여자아이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나와 얘기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환자들이 바람 쐬러 나오는 야외 정원으로 갔다. 서로 자기 소개를 주고 받았다. 나보다는 나이가 좀 많아 보였다. 그의 옷차림은 수수하면서도 단정하고 조화로웠는데, 이것으로 상대방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무슨 수상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방금 낭독하는 걸 들으니 저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던데요.”
“빈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경위를 물었다.
1주일 전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메일을 받았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처지인데 당신이 오래 전에 썼던 소설의 결말을 더 기다리기 힘드니 자신에게만 알려줄 수는 없느냐. 그런 내용이었다. 남자는 사연을 모두 듣고 더 이상 묻는 것 없이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저 애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치료를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이제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위험한 수술을요. 우리나라 최고의 선생님을 찾아서 부탁했지만 하느님이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안심이 될 리가 없지요.”
“잘 될 겁니다.”
하느님이라. 글세. 그날 저녁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식사는 바깥에서 사먹었다.
다음 하루 동안은 내가 할 일이 밀려서 병문안을 갈 수가 없었다. 그날 원고를 받은 담당 편집자는 내 문체가 갑자기 축축해졌다고 했다. 글의 일관성이 사라졌으니 그날 하루 간의 작업량을 모조리 다시 쓰라는 명을 받았다.
결국 그날 다 처리하지 못해서 다음 날 작업용 랩톱을 병원으로 가져갔다. 마침 여자아이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내내 원고를 고쳐 적었다. 살풍경한 병실 덕에 나의 언어까지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병원에 오고 3시간 가량 지나고 나서야 여자아이가 침상으로 돌아왔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내 소설을 추천해준 사람도 어머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대충 끄덕거렸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 없이 시간만 같이 보냈다. 침상 옆에 있는 유일한 콘센트를 내가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는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내 랩톱에 연결시켜서 충전했다. 바깥에서 돌아다니느라 많이 피곤했는지 여자아이는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여자아이는 침상에서 일어나 있었다. 내 랩톱에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나는 만지지 말라고 했다. 여자아이는 이제는 소설은 안 쓰냐고 했다.
“소설도 써, 하지만 소설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못 돼.”
나는 평론이나 에세이를 적어서 잡지의 지분을 채우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글을 써서 여기저기 투고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씩 문예 지망생의 글을 봐주는 과외수업도 했다. 여자아이는 그 말까지 듣고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우리나라는 뭐 할거 없으면 다들 누구 가르치는 일로 먹고 사는 거 같아요. 서점들도 매년마다 새로 나오는 참고서나 문제집 파는 돈으로 먹고 살고, 스타 강사라는 것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거잖아요? 하여간 다들 미쳤어. 입시 위주 교육은 안 좋다고 백날 떠들어봤자 나라가 통째로 그걸로 먹고 사는데. 통일을 해도 안 바뀔 거야 분명.”
“나도 너만할 때 학교가 싫었지.”
두서 없는 소리였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 들었다. 여자아이는 넋두리를 마치고 날 바라보았다.
“왠지 아저씨는 여자애들한테 인기 되게 많았을 거 같아요.”
“그걸 인기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관심은 많이 끌었다만 호감을 가지기 보다는 이상한 동물 취급이었지.”
“상상이 가네요.”
오늘은 병실에서 원고를 완성 시키느라 저녁까지 있게 됐다. 종종 내 랩톱에 꽂혀 있는 휴대전화기가 덜덜 떨릴 때마다 내가 대신 가져다 줬고 용건이 끝나면 다시 회수해서 충전을 시켰다. 여자아이의 부모님은 오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될 때 나는 떠났다. 짐을 챙길 때 여자아이가 물었다.
“내일도 오실 건가요?”
“편집자가 원고를 받아주면 한동안 짬이 나기는 한다만. 그때 되야 알겠지.”
“다음 주에 수술을 해요. 그전까지 가능한 자주 와주시면 안 되겠어요?”
나는 당황했다. 배려를 해준 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대충 마무리 짓고 휴대전화 번호까지 교환하기 전에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척하고 병실을 나왔다.
자기 전에 여자아이가 결말을 알려달라고 했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남자 주인공의 연애 편지를 훔쳐본 여자아이는 그 뒤로 은근슬쩍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마음을 두지만 마지막까지 연인이 되지는 않는다. 졸업식 날 직전에 주인공이 반에 타로 카드 한 다발을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점을 쳐주면서 속에 담아둔 얘기와 조언을 친구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여자아이가 홀로 다가와 자신도 점을 쳐달라 부탁한다.
보편적으로 타로 점을 시작하면 카드 뭉치에서 3장을 뽑고 뒷면이 보이도록 늘어놓는다. 그리고 한 장씩 차례대로 뒤집으면서 점괘를 말해주는 게 보통이지만 주인공은 한꺼번에 카드를 뒤집는다. 3장 모두 06번 ‘연인’이다. 주인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린다.
소설은 여기서 중단됐다. 그 시기에 힘든 일을 겪으면서 글을 쓰는 일에 관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비단 이 소설만이 아니라 한동안 펜을 쥐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진정한 결말을 말해주려면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지만 주저 없이 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편집자는 원고를 불평 없이 받았다. 그 뒤로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질 없었다. 일일이 문병을 가줘야 할 의리는 없었지만 혼자가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에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갔다. 병원이 전철로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에는 첫날처럼 아무 선물도 없었지만 여자아이는 활짝 웃었다.
“무슨 병에 걸린 거니?”
“암이요. 척추에 났어요.”
여자아이는 털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이 없는 자신의 머리를 보여줬다. 머리카락이 없는 건 암세포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항암제 투여로 인한 부작용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몸을 조금씩 죽이는 셈이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받은 건강검진 덕에 초기에 발견한데다 약도 일찍 먹어서 시한부 신세는 아니에요. 그래도 엿 같지만.”
척추암은 무척 드문 질병이다. 전이된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술 난이도도 무척 높다. 여자아이의 말대로 유복한 환경 덕에 일찍 찾아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건 정말 다행이다.
“좋은 거 먹고 나쁜 일 한 거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 데요. 무슨 기분인지 알겠어요? 나 말고도 세상에 나쁜 놈은 넘쳐나는데 그냥 제비 뽑기에 걸린 것처럼 제가 암이래요.”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겠니.”
여자아이는 다시 털모자를 썼다. 지금은 감정을 토해내도록 내버려 두자. 난 팔짱을 끼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난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의 넋두리를 듣는 건 짜증났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주며 공감하는 연기를 하거나 슬픈 눈빛을 보내주는 건 불가능했다.
여자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아저씨는 작가니까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결말을 어떻게 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왜 소설이니? 투병 생활 중에 자신의 심정을 수필로 적은 사람은 많아.”
“수필은 있었던 일이지만 소설은 이야기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구나.”
여자아이의 눈썹이 휘어졌다. 인상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한번 올려놓은 다음 감정을 추슬렀다.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멈춘 기분이다.
“비극적으로 흐른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나야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해피 엔딩도 하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만 그런 건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하지.”
“그리고 하나 더 있죠.”
여자아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게 더 현실적이니까요. 안 그래요?”
이 애는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 위로 같은 건 질리도록 들었을 거다. 나는 입을 다물고 바라만 봤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아이는 속이 조금 풀린 듯 하다.
내가 말했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듣고 있어요.”
“사실 그 소설은 이미 결말이 있어. 기왕이니 조건을 걸어보겠다.”
“일단 들어볼게요.”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은 네가 수술을 마치고 오면 알려주겠다.”
“못 돌아오면요?”
“그 소설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현실적인 결말로 마무리 될 거다. 진짜로 다시 다듬어서 편집자한테 보여줄 거야.”
“뭐에요 그게. 전 죽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결말을 알려달라고 부탁한 건데 되려 안 알려주겠다니, 어쩌자는 거에요?”
여자아이의 얼굴이 굳었다.
“현실적인 이야기 따위 나도 쓰고 싶지 않아. 나는 네가 살 수 있다는 생각만 해줬으면 싶다.”
이런 멍청이. 내가 뭐 잘났다고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여자아이는 날 무심하게 바라보고 말했다.
“일찍 돌아가셔도 좋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후회했다. 목숨이 걸린 사람한테 살아 돌아오면 결말을 알려주겠다니. 한 순간이나마 기운을 북돋아 줄 거라고 발상을 한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다행히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개인적인 일로 관심을 금방 돌릴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여자아이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그 연애 소설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대로 두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었지만 읽다 보니 대사들과 묘사를 더 세련된 단어로 대체하고 싶었다. 전부 다듬고 나서 편집자에게 보냈다. 다음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결말을 안 낸 거야?”
“그건 상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서요.”
“상의고 자시고 이건 아무리 봐도 맺어지는 전개잖아? 두 사람이 이대로 갈라지면 지금까지 읽었던 독자들을 완전히 기만하는 거라고.”
“그 정도인가요? 너무 전형적인 전개 아닌가요?”
“정 뭐하면 두 사람의 대학 시절까지 이야기를 덧붙여서 늘리던지. 그런데 이 남자 주인공이 댁하고 너무 닮은 것 같은데. 혹시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쓴 거 아냐?”
“뭐 저도 모르게 주인공을 저하고 대입 시켰나 보군요.”
“아무리 그래도 군데 군데 정신병자 같은 구석이 댁이랑 판박이인데.”
“방금 하신 말 너무 무례하지 않나요.”
“난 이거 마음에 들었어. 맨날 심각한 것만 쓰더니 이런 달달 한 것도 하려면 충분히 쓸 수 있잖아. 생각 있으면 결말 부분 후딱 마무리해서 다시 보내줘.”
솔직히 뿌듯했다. 이제 결말은 그 여자아이에게 달렸다.
다음 주 월요일, 나는 랩톱과 어휘를 참고할 때 즐겨 들쳐보는 두툼한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병원으로 갔다. 여자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수술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날 소개시켰다. 난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목에 두었다. 통성명이 끝나고 그들은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평소에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기껏 가져온 랩톱은 정적을 깰 수가 없어서 쓸모가 없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 건데 혹시 출출 하신가요? 뭐라도 사올까요?”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굳은 몸을 풀면서 일어났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당신은 어때?”
“별 생각 없어.”
그의 아내도 거절했다. 대기실에는 마침내 나와 여자아이의 어머니만이 남았다. 연령은 나와 비슷하다. 서른 중반, 옆 모습이 차분하고 온화하다. 실제 신장은 작지만 신경 써서 꾸민 덕에 늘씬해 보였다. 긴 속눈썹이 그 여자아이와 닮았다. 쳐다보면 안 된다고 의식하느라고 되려 눈앞에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긴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의사가 무사히 끝났다고 수술 결과를 알려주었다. 완벽하게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금방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아끼지 않고 투자한 성과가 나왔다. 나는 저 아이가 유복한 부모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부는 간신히 안도했다. 두 사람들은 보이는 사람마다 닥치는 대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는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빠져 나왔다. 다행히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수술에 대해서 신경 쓰느라고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술 이후 회복 기간 동안 굳이 내가 찾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날부터 한동안 글도 쓰지 않았고 순전히 소비 활동만으로 휴식했다. 솔직히 결말을 알려주겠다는 약속 따위 놀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도 나에 대한 건 금방 잊었을 거다. 인연은 가벼우니까. 여자아이와 그 부모들과도 연락처는 나누지 않았고 필명을 쓰고 있으니 굳이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면 다시 접촉할 일은 없었다.
가능한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렇게 1주일 동안 편하게 살다가 쌓아둔 이메일을 정리하려는데 최근에 온 우편들이 그 여자아이로부터 온 편지로 빼곡히 도배되어 있었다.
[지옥에서 돌아왔다. 당장 튀어와.]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빨리 알려줘.]
[심심해요.]
[화 안 났으니까 그냥 좀 와요.]
편지들은 모두 하루 간격으로 왔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포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난 장고 끝에 오랜만에 병문안을 갔다. 난 그 여자아이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작가로서 독자를 만나러 가는 거다. 그런 걸로 쳤다.
여자아이는 저번보다 확실히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감정 표현도 훨씬 풍부해졌다. 여자아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별것도 아닌 걸로 사람 애태우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아요?”
“그걸 잘 써먹는 게 작가의 소양이기도 하단다.”
난 대충 받아 쳤다.
“전 그런 거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 뒤로 서로 말할 밑천이 떨어졌다. 내가 먼저 말했다.
“화는 다 풀렸니?”
“그 때는 울컥했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매일 같이 와줬으니까요. 나쁜 소리로 한 건 아니 라는 생각이 차차 들더라고요. 다음에 뭐 말하기 전에는 신경 좀 써요. 작가라는 양반이 섬세하질 못해.”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내 담당자는 날 정신병자라고 부른다니까.”
“아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 애가 웃음 소리를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나는 뒷목을 벅벅 긁고 팔짱을 꼈다. 속으로 단어를 골랐다. 이제 결말을 말해줘야겠지. 여자아이가 뜸 그만 들이라고 재촉했다.
“그때 여자아이도 진심을 고백한단다.”
“대사 적어왔어요? 머리 속에 있는 거에요? 제가 슬레이트 쳐줄 테니까 읊어봐요.”
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여자아이는 연인이 되는 걸 거절하고 나중에 앞길이 창창한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 진짜 연애하는 사람은 이미 있었고 남자 주인공은 그냥 재미로 건드렸던 거지.”
그녀는 충격 먹은 얼굴로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버럭 소리지르려 들었지만 내 얼굴을 보고 바로 짐작한 건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첫사랑이었나요?”
“그래. 진지했지.”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사랑이란 게 그런 거야. 그토록 귀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에는 남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흔해터진 환각 중 하나였던 거지.”
속이 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감정이 풍파 된 까닭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어른이니까.
“더럽게 현실적인 결말이네요.”
“저번부터 신경 쓰인 건데 네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환상의 반대잖아요? 항상 도망치고 싶은 곳이고… 거지 같은 일만 가득하고…”
“애야.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야. 좋은 부분도 있어.”
“여기 어디가 좋아요! 주인공 마음은 갈갈이 찢겼는데!”
“네 어머니는 훌륭한 사람을 만났어. 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나보다 훨씬 나아.”
여자아이는 눈동자를 떨었다. 그 얼굴에는 나를 향한 연민에 젖은 눈동자와 충격이 공존했다.
“세상 일은 나쁜 일과 좋은 일로 구분할 수가 없어. 나쁜 일들을 현실적인 거라고 구분하는 건 옳지 못해. 내 사랑이 이뤄지지 못했어도 그걸 불행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 네 어머니의 선택 덕에 결과적으로 네 운명이 달라졌으니까.”
우리는 잠깐 쉬었다. 여자아이는 진정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여자아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듯 했다.
“네 어머니하고 네 얼굴이 많이 닮았더구나. 세월이 오래 지나기도 했고 눈치채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음 날 네 어머니가 작가로 날 추천 했다는 말을 듣고 확신했지.”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수술했던 날 같이 있으셨죠?”
“그랬지.”
“어땠나요?”
“날 못 알아보더구나. 너에 대한 걱정으로 신경이 쏠린 것도 있을 거고 내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작가로 날 추천한 것도 무슨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난 폐 속에 공기를 집어넣고 눈알을 굴렸다.
“아저씨는 어땠는데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이 아이 앞에서는 이미 지킬 체면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날의 추억은 연마가 끝난 원석처럼 소중하지만 난 지금 방치해두고 있단다. 이제 와서 감상할 가치는 없으니까. 반짝이던 보석은 시간에 휩쓸려 자신의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보석은 보석이지.”
“묘사가 형편없어요…”
여자아이는 동정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발끝까지 닿았기에 나는 건강히 있으라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아이가 불러 세우려 했지만 나는 듣지 못한 척 했다.
그리고 복도에서 그녀를 만났다.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된 그 아이는 날 똑바로 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도 모르게 쓸데 없는 수식어가 나오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는 나의 말에서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저번에 같이 기도해주셨죠. 그때 고마웠어요.”
“따님이 하루 빨리 완쾌됐으면 좋겠군요.”
대화는 딱 끊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기 갈 길로 돌아갔다. 가슴 속이 공허했다. 이제는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워드 프로세서를 켰다. 그냥 전형적인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를 내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았고 억지로 써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작품성으로 봐도 지금까지 즐겁게 전개되던 걸 마지막에 뒤엎어버리는 건 완성도에 자신감이 없는 초짜들이나 저지르는 기교다. 결국 마무리는 이렇게 낼 수 밖에 없었다. 진짜 결말을 알고 있는 건 그 아이뿐이다.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검지 손가락 마디를 입에 대면서 생각을 했다. 바싹 마른 입술의 감촉과 손가락의 냉기가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 시절의 추억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그 아이의 얼굴은 이미 케케묵은 뜬 소문 같았다. 그 대신으로 주리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마무리 지을 힘이 생겼다.
간신히 퇴고를 마쳤고 원고를 본 담당자가 평을 말했다.
“그전까지는 실감 났는데 결말 부분만 갑자기 소설처럼 느껴지네.”
“뭔 말인지 알 거 같습니다.”
“조금만 더 고쳐볼 수 없어? 더 감질나게 바꿔봐. 두 사람이 이어질 거라는 암시는 확실하게 하되 더 간접적으로 묘사해. 아니면 더 직접적으로 바꿔보던가.”
“직접적으로 어떻게요?”
“바로 입술 박치기 해버려.”
“그런 게 가능한 사이였으면 질질 끌지도 않았을 겁니다.”
“응? 말투가 좀 이상하다?”
“아무튼 다시 써보죠.”
통화를 마치고 방에 드러누워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는 도중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수신인은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잘 지내세요?]
주리였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니?”
[좁은 세상이라서 조금만 검색해보면 개인 신상은 인터넷에서 다 찾을 수 있어요.]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누운 채로 통화했기 때문에 내 목소리는 기어가고 있었다. 주리는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됐는지 목소리가 꽤 명랑해져 있었다.
[그건 넘어가고,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마지막에 타로 점치는 장면이요. 그거 진짜로 했던 거에요?]
“그래, 그랬지.”
창피한 기억이다. 주리의 목소리는 쫓고 있던 사냥감이 절룩거리는 걸 본 맹수 같았다.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마술도 할 줄 아셨나요?]
“아니 마술은 아니야. 난 그렇게 재주가 좋지 못해.”
나는 그날 썼던 속임수를 털어놓았다.
“타로 카드 세트를 여러 개 구입한 다음 ‘연인’ 카드만 골라서 모아놨지. 네 어머니 차례가 됐을 때 그걸로 슬쩍 바꿨고.”
[그거 돈 엄청 들었을 거 같은데요.]
“한 다발에 만원은 넘었고, 그걸 21개나 샀으니 지출이 심각했지.”
[그냥 직접 인쇄하지. 무식하게 정말.]
“몸은 많이 괜찮아졌니?”
[이제 머리카락도 다시 나고 있고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만해요. 혹시 전화 갑자기 끊으시면 계속 전화 걸 거에요. 저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받을 때까지 계속 할거에요.]
그냥 수신 거부 해버리면 끝인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소설은 결국 어떻게 됐어요? 정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적을 거에요?]
“지금 보내줄게.”
나는 랩톱을 다시 열고 주리의 메일로 파일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그 애한테 메일을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주리가 결말을 읽는 동안 통화가 잠시 끊어졌다.
[재미없네요.]
“그러니.”
[남자 주인공의 생각은 하나도 안 드러났고 그냥 표면적인 묘사만 계속 이어져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생각이 제일 흥미로웠는데 그냥 영화 보는 느낌이에요.]
“너 편집자해도 되겠다.”
[사실은 괜찮지 않은 거죠?]
가슴이 아프다. 마취 바늘이 들어간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무장했다.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니.”
[왜 제게 잘 해주셨나요? 아저씨에게 있어서 저는 뭔가요?]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난 겨우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나도 모르겠어.”
[비겁한 소리하지 말아요.]
주리는 그 아이의 환생이자 나의 애독자였고 배려하고 싶은 처지에 있는 소녀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내가 도대체 그 아이의 어느 면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리는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다. 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먼저 떠들었다.
“왜 행복한 결말이 진부하게 느껴지는지 아니?”
[그거야 하도 많이 봐서 지겨워졌으니까요.]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작품을 행복하게 마무리 내지 않는 작가도 많아. 동서양 불문하고 고전 작품들을 보면 비극적인 결말을 내는 작품도 많아.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진부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행복한 일에 너무 많이 둘러 쌓였기 때문이야. 생사의 기로에 한번 섰던 너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말이다.”
[아저씨한테도 행복한 결말이 있었나요?]
“삶에는 결말이 없단다. 저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나와 네 어머니가 이야기 결말 바깥에서 알아서 먹고 살고 있듯, 살아있는 한 결말은 없고 그 앞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물론 그 시절의 멍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그 아픔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단다.”
얼굴이 뜨겁다.
“살다 보면 안 좋은 일이 앞으로도 수없이 일어날 거야. 그게 현실이라며 한쪽 면만 바라보고 냉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럴 힘이 제게 있을까요?]
“얼마든지 있지. 사랑이 있으니까. 인간의 가장 존엄한 힘이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고 사람이 없는 곳에는 신도 살아남지 못한단다. 신이 널 살려주지 않았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널 살렸어. 만일 네가 돌아오지 못했더라도 그들은 널 향한 사랑으로 견뎠을 거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서로의 숨소리만이 수화기에 흘렀다.
[응원할게요.]
“고맙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 후로 주리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나는 결말 부분을 다 갈아엎었다. 그걸 읽어본 담당자는 관자놀이를 꿈틀거렸다.
“깔끔하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
“뭐 어떻습니까. ‘로마의 휴일’은 이어지지 못하는 사랑 이야기니까 여운이 남잖아요.”
합의 끝에 담당자는 맺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암시를 처음부터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소설을 전체적으로 갈아엎게 되는 바람에 모두 처리하는데 거진 한 달이 걸렸다. 편집부에서 통과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해방이구나 싶었을 뿐.
책은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었지만 제법 호평이었다. 출판사 홈페이지에 누가 올린 평을 보니 ‘마지막 결말이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안 든다’라고 적혀 있었다.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책이 나오고 몇 주가 지나서 증쇄 소식이 왔다. 잘 팔리기도 했지만 초판을 적게 낸 것도 있다.
담당자는 한건했다며 같이 술이나 먹자고 대뜸 전화를 걸었다.
“전 술 싫어하는데요.”
“하지만 축배들만한 일이잖아. 댁이 낸 작품 중 제일 히트한 거라고 이거.”
“하여간 전 혼자서 쉴 겁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솔직하게 말해. 역시 이거 개인 체험이지? 부정해도 소용없어. 증인이 있다고.”
대충 대답해서 넘어가려는 참에 증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혀가 굳어버렸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증인이요?”
“곧 알게 될 거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방문객이 왔다. 토요일 정오였는데 초인종 소리를 들을 때까지 난 계속 자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일정이 없으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난 평상복 차림 그대로 드러누워 있었고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손잡이를 돌리면서 혹시 주리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불안감을 느꼈다.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의 머리 속에 있던 불순물들이 불타 사라졌고 그 과정 속에서 생긴 열기가 역정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
그녀의 목소리는 산들바람 같았다.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했다.
“아니, 내가 밖으로 나오지.”
얼굴은 냉수로 씻었고 물기는 부엌에 있던 행주로 훔쳤다. 겉옷은 보이는 대로 몸에 걸쳤다. 외출을 준비하는 내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과들이 나의 몸을 관통했고 뇌세포들이 번뇌로 말라갔다. 저기에 있는 건 그 아이가 아니다. 내가 알던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주리 또한 그녀의 환생이 될 수가 없었다. 살아있지도 않았던 존재의 환생이 있을 리가 없다.
갈 곳 따위 달리 있을 리가 없었고 날씨가 따듯해서 걸어 다니기로 했다. 내가 사는 집을 나오자 근처 주민들을 위해 지어진 작은 공원과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기구들이 보였다.
“오랜만이군.”
첫마디는 작가가 떼야 하는 법.
“이런 소리하면 뻔뻔해 보이겠지만, 널 만나서 정말 반가워.”
“그래.”
바람이 느리다.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고 먼 곳을 응시했다.
“주리가 말해줬어. 우리는 분에 넘치는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솔직히 나는 행복이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런 걸 알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도 몰라.”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듯 말이지.”
그녀가 날 바라봤다.
“다른 남자애들이 취미나 좋아하는 연예인 같은 걸로 떠들 때 넌 언제나 심각한 소리만 했었지. 그래서 봐도 봐도 질리질 않았어.”
“용건이 뭐야?”
속에 담아둔 울분이 나의 목을 달궜다. 참기가 힘들다. 증오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쓴 책을 봤어. 마지막까지 날 나쁘게 묘사하지 않았지. 난 제대로 사과도 안하고 널 버려두고 갔는데.”
“그리고 넌 주리한테 날 추천했지.”
우리는 하천에 깔려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강에는 지저분한 눈이 쌓여 가장 자리에 회색 뱀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정오의 햇살 속에 서서히 반짝거리며 물로 변했다.
“이제라도 사죄하고 싶어서 찾아오기는 했지만, 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너답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 일도 안 해도 돼. 결국 이대로 걷는 게 지겨워지면 헤어지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겠지.”
“아직도 내가 밉구나.”
“글세.”
마음이라는 건 깊게 파고들수록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기억은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이기에 믿을 수가 없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내게 입힌 상처만큼 그 흉터가 같이 남아 있었다.
“왜 주리에게 날 추천해준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네가 쓴 글을 본 건 이번에 낸 책이 처음이야.”
“허, 예전에는 노트 좀 보여달라며 그렇게 날 가지고 놀더니.”
그녀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학교 축제날 기억나? 학예회 강당 뒤에서 혹시 우리가 사귀게 되면 날 평생 지켜줄 수 있겠냐고 내가 널 떠봤잖아.”
“다른 사람을 무상으로 감싸줄 정도로 나는 사람이 좋지 못하다고 튕겼었지.”
그 다음 말은 바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창피한 것도 있었지만 한 순간 목이 메이는 바람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제발 이러지마.”
내가 애원하자 결국 그녀가 대신 말해버렸다.
“감싸주는 건 내키지 않지만 곁에서 같이 상처 입어주는 거라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었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야 말로 왜 계속 찾아온 거야! 주리를 나의 대체품으로 삼고 싶은 거야?”
그녀는 역정을 냈다. 원하지 않으면서도 화를 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시울이 빨갰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끈질기게 상대방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눈가를 소매로 비볐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건네는 듯한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너는 여전히 얼음 같구나.”
우리는 다시 걸었다.
“주리에게 너를 알려주고 싶었어. 넌 얼핏 보기에는 매사에 냉담하고 진지하기만 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헤아리기 힘든 자상함이 있었으니까. 네가 쓴 글이라면 분명 주리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애가 나와 너에 대해서 물어볼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만.”
“세상 일은 알 수가 없지.”
일어나서 내내 먹은 게 없었지만 신경이 쏠려서 시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을 마시지 못해서 목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내 목소리는 본의 아니게 거칠어졌고 말투도 그걸 따라갔다. 나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이렇게까지 빨리 회복되는 환자는 처음이라고. 그러려면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아주 확고해야 한데.”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도 하고 싶은 게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했던 상태였어. 그걸 네가 바꾼 거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너와 그 아이의 아버지도, 종일 내내 우리 기도를 들어준 신도 마찬가지야. 그 애는 실력 좋은 의사 선생님한테 맡겨져서 살았을 뿐이고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그게 세상이야.”
입 안이 아스팔트처럼 거칠었다. 억지로 침을 삼키자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거리를 벌리면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 애에게 해준 말, 모두 거짓말이야. 세상은 허무해. 좋은 일과 나쁜 일로 구분할 가치도 없어. 다 시시하니까.”
“내가 널 사랑했는데도?”
거기서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머리 속이 하얘지는 바람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저 서둘러 각자 삶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했다.
당황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자신이 무슨 까닭으로 말했는지 이해를 못 하는 듯 했다. 여인은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감싸고 눈동자를 떨었다. 딱히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우리 모두 너무 지쳤다. 대화는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처음에 나눈 질문부터 해결해야 했다.
“왜 날 나쁘게 적지 않은 거야?”
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원망하는 묘사를 넣어버리면 남자 주인공이 너무 소심해 보이거든.”
“정말 그게 다야?”
“그래.”
난 거짓말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연기를 못한다는 건 정말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그 감촉은 지나가던 나비가 앉은 듯 미약했지만 온기는 너무도 선명했다.
“우리가 헤어지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너에 대한 건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내게는 그이와 주리가 있으니까.”
“그래.”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어깨에 올린 손을 떼어냈다.
“너는 어떻니? 돌아갈 곳이 있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니?”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이제 끝이다. 작별의 시간이다.
“확실하게 마무리 하자고.”
내장을 누군가가 움켜쥔 것처럼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목 안이 바싹 마른 탓에 말을 할 때마다 입 속에 활자를 박아 넣는 기분이라 나의 목소리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깔렸다.
“난 괜찮아. 괜히 들쳐보지만 않는다면 그 일들은 내게 무의미해.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지지.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그럼 나도 확실하게 말하고 떠나야겠네… 응원할게.”
“뭘 응원한다는 거야.”
“뭐든지, 모두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거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귀가했다.
빈 껍데기만 남은 육신에 물을 붓고 시계에 태엽을 감듯 식사했다. 그 기억들을 간직해야 할지 떼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 먹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모조리 시간에게 맡겼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도 되지 않았다.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아무 것도 적을 수가 없다. 놀고 싶지도 않다. 지금이라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냉수를 다시 들이키고 외출하기 전에 들어가 있었던 이부자리로 돌아갔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밧줄에 묶인 듯 욱신거린데다 잠에서 깬지 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달리 할 게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듯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누울 수가 없었다. 눈을 떠도 방안은 어둠이 내 눈을 핥은 듯 깜깜했다. 잠깐 잠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저녁이다. 일단 습관적으로 랩톱을 켰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앞에서 고해성사라도 하듯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마무리 지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주리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전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이런, 내가 할말이 없네. 나는 앓는 소리를 조금 냈다가 화제를 돌렸다.
“책은 어땠니.”
[그냥 그래요.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구나.”
[어머니한테서 다 들었어요. 괜찮다고 거짓말 하셨더군요.]
여자들이란… 주리는 소근소근 말했다.
“그건 넘어가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털어 놓은 거냐.”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저도 알아요.]
수화기 너머로 숨결이 닿는 소리가 푹하고 고막을 찔렀다. 이 뒤로 할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화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주리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세상은 허무하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좋은 쪽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건 사실이다.”
[알아요.]
주리가 주도권을 잡고 연달아서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모르긴.”
[그건 사실 자기 마음을 속이는 거잖아요? 물이 반 컵이나 남았다는 식으로. 그게 옳은 건 가요?]
“그렇게라도 해야 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야만 해.”
[이해가 안 되요.]
“너는 이미 그렇게 했어. 수술을 코앞에 두고 넌 초조했을 거야. 세상으로부터 도려져 나간 심정이었을 거고 부모님의 사랑도 공포 때문에 희미하게 느껴졌겠지. 위로는 위선으로 보이고 세상은 살만하다고 떠드는 놈들은 다 구역질이 났을 거야.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렇게 절망하는 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는 거지. 슬픔은 중독성이 강하니까.”
[아저씨?]
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주리가 멍하니 물었다.
“나 같은 놈 따위 너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너는 앞으로도 찾아와달라고 부탁 했었지. 그 정도로 절박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넌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구했어.”
[아저씨는!]
주리가 갑자기 화를 냈다.
[아저씨는… 저한테… 그런 존재가…]
그녀는 그 말만 더듬거리며 혀끝으로 굴렸을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잘 들리지도 않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안 갔기에 가르치려는 걸 그만두었다.
“미안하다. 또 네 생각을 마음대로 짚었구나.”
[아저씨는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뭘 말이냐.”
[좋은 면을 보는 거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과거와 당당히 마주보기 위해 창작 활동으로 승화시키려 했지만 아픔은 여전했다. 아무리 그녀가 그 시절에 보여준 사랑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녀로부터 감사를 받아도 소용 없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시절의 추억이 보석처럼 변치 않듯 그 흉터도 마찬가지로 아물지 않았다.
[그 뒤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대답을 꾸미려는데 주리가 내 몸에 박힌 칼을 비틀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발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도 돕고 싶어요. 아저씨가 절 도운 것처럼요.]
나는 한참을 숨소리만 내다가 결심했다.
“아니, 그 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 사실 나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아.”
[이 거짓말쟁이.]
“나는 그렇게 해서 견뎠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대신 아무도 믿지 않았지. 이것도 방법 중 하나야.”
[그럼 왜 주인공은 결말에서 그 아이를 원망하지 않았던 거죠?]
“그건 팔려고 만든 책이니까.”
[거짓말은 이제 그만해요! 그 추억마저 잃어버릴 용기가 없었던 거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몸에서 기운이 쫙 빠지는 통에 난 의자에 앉은 채로 쓰러질 뻔했다. 그 아이를 마주볼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주리는 쉬지 않고 날 몰아세웠다.
[그것마저 부정해버리면 아저씨는 완전한 혼자가 되니까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외로웠으면서도 혼자라도 괜찮다고 억지로 몰아세웠고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 절 내버려두지 못했던 거죠?]
마지막 한 마디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느 샌가 나는 주저 앉아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지만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질식해서 죽을 뻔한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가엾은 사람… 다시는 나 같은 놈이라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나는 겨우 목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주리는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잔뜩 잠겨서 다른 사람 같았다.
“네가 나보다 어른이구나.”
[평소에도 어르신들에게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주리의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고맙다.”
[저기 있잖아요…]
“뭐니.”
[앞으로도 소설을 쓰면 제게 먼저 보여주실 수 없을까요? 굳이 연애 소설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보고 싶으면 사서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하던 말을 삼키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좋아. 낭독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언젠가 또 봐요.]
우리는 누가 먼저 끊을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결국 내가 먼저 수화기를 닫았다.
그렇게 해서 길고도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 됐다. 이미 잘 만큼 다 잤기에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갈 이유는 없었고 일도 하기 싫었다. 답답해서 겉옷도 입지 않고 거실 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고 야경을 바라봤다. 이상할 정도로 몸 속에 온기가 돌아서 춥지 않았고 되려 시원하다. 머리를 식혀주는 바람 결에 입김을 흘리다가 미뤄둔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고 깊숙한 곳에서 오래 전에 고백할 때 썼던 타로 카드 다발들을 찾았다. 다 합쳐서 400장이 넘었다. 나는 그걸 모조리 빈 페인트 통에 부어버리고 바깥으로 나와서 흙 바닥에 자리잡고 라이터 오일과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이렇게 보면 그저 종이일 뿐인데 어떻게 저런 것들에 20만원이라는 거금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더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었다. 운명을 밝히는 고상한 도구도 아니었고 그 어떤 작위적인 의미도 저 불을 앞서갈 수 없었다. 나는 페인트 통이 식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연기가 닿는 곳을 눈으로 쫓았다. 뒤늦게 나중에 써먹을 지도 모르니까 한 다발 정도는 남겨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필요할 때 또 사면 그만이다. 나는 그대로 페인트 통을 뒤집어서 타고 남은 재를 가로수 아래에 뿌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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