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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로코코
작성일 2016-03-31 01:37:50 KST 조회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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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어른이 되는 걸까?

내가 18살이었을 때 내 최대의 고민은...물론 당연히 수능이었다. 정확히는 공부하는 척 하면서 어떻게 PC방을 더 조져볼까 하는...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내가 열 여덟이었을 무렵에 내 최대의 고민은 신앙이었다. 나는 모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고 모국어를 입에 달기도 전부터 성경과 (한국식)기독교 문화에 노출된 삶을 살았다. 내 믿음은 초등학생 때까진 굳건했다. 그 당시 나는 싱클레어식 삶을 살았는데, 무신론과 신성모독이 가득한 위험한 바깥 세계와 신실함과 하나님의 증거하심이 실존하는 집 안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갔다.

 

어린 아이는 정신이 유연해서 모순적인 세계에서 어른들보다도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내 세계를 둘러싼 마귀의 협잡질이 너무나 힘겨워졌다. 믿음에 대한 내 당연한 의구심은 해마다 증폭되었다. 16살이 되던 무렵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무신론의 위험하고도 짜릿한 세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눈에 무신론자들은 최첨단 이론으로 무장한 무적의 집단이었다. 이 사람들은 절대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들고 온 증거를 역이용해 상대를 논리의 함정에 빠트리는데, 거기엔 진한 수사학의 묘미가 배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바깥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칭하고 다녔다. 그리고 언제나 교회에 나갔고 구원 받기를 원했다.

 

이런 삶을 사는 게 가능한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솔직히 그 당시엔 내게는 신앙과 인본주의 뭐 이딴 것 보다는 워해머 40k 던오브워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수 세기 동안 이어져내려온 첨예한 신앙논쟁의 틈바구니를 슬기롭게 가로지를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열 여덟은 내 안의 미성숙한 자아가 드디어 분열된 세상을 정립해보고자 마음 먹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불가지론이라는 타협점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어쩐지 비겁해 보였다. 나는 신은 존재하거나(그리고 인격신이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열 여덟의 나는 정합적인 존재였으며, 결국은 무신론을 짝사랑했던 것 만큼이나 열렬한 신자였다고 볼 수 있겠다.

 

어렸을 적의 나는 사람의 가치관이 반드시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유주의자라면, 그는 어떤 사안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접근은 얼치기 리버럴이었던 내게 상당히 곤혹스러운 문제를 마주하게 했는데...특히 페미니즘의 문제에서 그랬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해방을 위해 종래의 남성 헤게모니가 구축한 사회와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직 인류는 남성의 경제적, 정치적 힘이 여성보다 월등히 강력하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해방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남성 헤게모니 사회에 보호를 요청해야 한다. 아직 그들의 지위가 남성보다 턱없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이론(혹은 운동? 현상?)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양 극단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그 당시엔 누군가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개념이 매우 낯설었다.(어쩌면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로 들어가지 않는 페미니즘이 포스트 모더니즘과 가끔 경합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 나는 한때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싫어하기로 작정했었고, 어쨌든 그건 잘 되지 않았다.

 

군대를 거치면서 나는 차츰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지금껏 내가 가장해 온 삶은 일종의, 내 관념에서 모순되는 면을 지워보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자유의 제한이 요구될 수 있으며, 공권력이 사회의 자유발언을 수호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껏 생각해 왔던 것과는 달리 이 세상은 훨씬 더 복잡했고, 어쩌면 그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분류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그 연약한 생태계를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호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나 역시 모호해져야만 했다. 나는 철두철미하게 공정해질 수 없었고, 결국 어딘가에 속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타협을 할 필요가 있었다. 현실은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며 정의될 수 없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필요로 한 것이다. 단지 중요한 건 그 거북한 모호함을 회피하려 들지 않는 끈질긴 자세 그 자체에 있다.

 

어쨌든 나는 최근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신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에 신은 아직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초논리의 영역을 가정하기 위해 남겨 둔 예비 공간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계속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근데 군대 경험으로 생각이 유연하게 바뀐 게 아니라 그냥 할일 없을 때 공상하고 책읽다 보니까 나름 제 윤리관의 변명거리를 만든 것 뿐임. 군대가 제게 남긴 건 반사회성과 더 많은 국까기질 밖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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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흑인경비원 (2016-03-31 01:39:03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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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버갤럼이 되었다

그리고 신들 사이에 섰다
아이콘 WG완비탄 (2016-03-31 01:39:57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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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들입니까 그게
아이콘 Jin.K (2016-03-31 01:49:3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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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글이다. 소설읽듯이 줄줄줄 읽었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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