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도 시의 중앙도서관인데 여성이나 서양 현대사 관련된걸 다 찾아봐도 은근히 여성참정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된건지를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드물음. 세계최초인 1893년 뉴질랜드의 여성참정권 인정은 그나마 개괄 정도고, 그 다음의 1902년 호주, 1906년 핀란드, 한참뒤의 1946년 프랑스의 경우에 관한 내용은 찾기 어려움. 그나마 비교적 영미의 경우나 일제시대 신여성주의 관련된건 꽤 있음. 대학도서관을 찾아야 하나.
2. "자유당 지도자들은 부유층 미혼여성의 보수적 성향을 우려하여 여성참정권을 반대하였고, 보수당은 보수당대로 정서적으로 여성의 정치참여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에 참정권 운동은 다른 개혁운동과 달리 지지자들을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894년의 지방정부법은 여성이 교구위원회에 선출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중앙정치에 진출하려는 여성들의 희망을 고무시켰다."(박지향의 영국사 449쪽)
대전쟁 이전에도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여성의 사회활동은 굉장히 활발해짐에 따라 무시하기 어려워져서 어느정도의 타협은 이루어지고 있었음. 영프미의 경우 산업현장에서 저임금 여성노동자를 대거 원하기도 했고 식민지로 청년들이 대거 떠나자 결혼이 보장되지 않는 여자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깨닫게 됨. 뉴질랜드의 경우 여성인구의 2/3이 서명한 연판장을 가져와서 5번째 요청끝에 통과시키는 단결력이 나오기도(근데 피선거권은 20년 뒤에야 따로 나옴).
문제는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할 때에, 기성체제가 무시할 수 없고 타협을 보려할 정도로 단결할 수 있는 상황, 그 힘을 자각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안갔다는 것. 대전쟁(1차 대전)은 여성의 힘을 기성체제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을 모두가 알게 된 사건. 왜냐면 메이드나 평시의 공장은 그냥 "너 해고"해도 되지만, 대전쟁급 전시의 공장은 "그래 같이 죽읍시다"이러고 배째면 노답이 되니까. 실제로 대전쟁 때 저런 적은 없음. 아래운동을 한 강경파도 대전쟁에 모두 협조. 그러나 전간기 때 지금 여성의 요구를 무시해대면 다음 전쟁 때 생산성이 떨어지고 그럼 망테크탄다는 것은 어느정도 보이는 상황.
3. 서양의 여러 항쟁이 그러하듯, 우리나라 시각에서는 목적이 무엇이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인 양상이 자주 나타남.
(영국의 이야기): 1908년 연맹의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수단으로 건물 창문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1912년 3월에는 200명의 여성 시위대가 런던 피카딜리가의 건물의 창문을 죄다 박살내버렸다. 쇠사슬로 의회 내 방청석에 자신의 몸을 결박하기도 하고, 소형 방화도구를 사용하여 우체통과 그 속의 우편물에 불을 질렀다. 1913년에는 유명한 '에밀리 데이비슨 사건'이 발생한다. 런던근처의 엡섬더비 경마장에 당시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학생이 뛰어들어 여성 참정권 시위를 하다가 말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죽으면서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외친다. 이 사건으로 영국 전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출처] 여성 참정권 투쟁의 전사 :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세 딸들(http://blog.naver.com/waterheat/220647383559)
오해를 막기 위해 첨부하자면, 저들의 목표는 양성평등이고, 메갈의 목표는 여성우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