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끔찍하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며 평생 부자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신사처럼 행동하고 옷을 입는 방법을 배웠다.(하지만 근본은 속이지 못해서 개츠비의 행동에는 어리숙한 촌놈 기질이 묻어나온다)
개츠비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사랑?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했다. 데이지는 부자 가문의 영예이며, 즉흥적이고 철 없는 사람이다. 부모와 뉴욕 자본의 보호 속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컸으며, 뉴옥 부자들의 속물 근성의 화신이다. 후에 그의 남편이 되는 톰 뷰캐넌이 전형적인 재벌 2세 머저리 알파메일 속성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 수많은 역경 속에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기어코 끝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이 남녀는 피로 엮인 천생연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개츠비는 장교 생활을 하던 청년 시절 데이지를 만났고, 그에게 반했다. 그가 묘사하길 데이지는 "돈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고 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빛나게 만들어주는 게 돈과 보석임을 알고 있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돈, 허영, 끔직하게 부유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안일함, 그리고 본질적인 멍청함에 끌렸다. 그건 개츠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밀주업을 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투자하고 대저택을 소유한들, 그는 역사 깊은 부자 가문 특유의 속물 근성에까진 다다를 수 없다. 개츠비는 한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가 가진 허영을 사랑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위해 희생했지만, 데이지는 조금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텅 빈 것을 사랑했으니 당연히 돌아오는 것도 텅 빈 게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소설의 제목 "위대한 개츠비"가 얼마나 악독한 농담인지 알게 됐다.
전통있는 부자들이 사는 마을과 신흥부자들이 사는 마을,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재의 계곡'. 피츠제럴드는 도금 시대에 찬란히 빛나던 뉴욕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을 쫓고 있었는지, 개츠비라는 한 멍청한 빈농의 아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끝내 갈구했지만 얻지는 못한 것들, 그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희망적인(그렇기에 더더욱 멍청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비전을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로 포장해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탐욕의 시대에 희생된 한 부자 젊은이에게 약간의 동정은 보여줄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이 소설에서 정말 동정을 표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차피 한 통속에 불과한 부자 놈들에게 권총 죽창을 먹여 준 위대한 자동차 정비공 윌슨 씨여야 마땅할 것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가 혹평을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감독은 피츠제럴드 소설을 완전히 잘못 읽었다. 그래서 그 화려한 장면들과 디카프리오와 맥과이어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냥 돈 많이 들인 할리우드 아침 드라마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