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단어를 꽤 옛날 TED에 출연했던 어떤 아저씨의 열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됐다. 군대 가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니 이제는 제법 옛날이다. 요즘은 2년만 지나도 시대가 경천동지하는 세상이 아닌가...
맨 박스란 이른바 한 남자가 남성이라는 성적 스테레오 타입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걸 이르는 말인데, 이를테면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이 해당된다. 남자가 남자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책임감있고, 언제나 앞으로 나서고, 고통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남자에게만 해당되어야 할 덕목인 것도 아니고, 남자에게 강요되어야 할 덕목은 더더욱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이성적일 수 있고 똑같이 실수할 수 있으며 똑같이 책임감있거나 방관할 수 있고, 똑같이 고통을 회피할 수 있어야 한다...쨌든 맨 박스라는 용어는 이 지난한 성별 갈등의 초점을 보다 명확하게 겨냥했다는 점에서 영리한 발명품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드문드문 맨 박스라는 단어가 눈에 띄곤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론에 의하면 한국은 해외의 인기를 몇 년 단위로 이격하여 따라가는 습성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맨 박스는, 서구에서도 그렇겠지만 남자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역차별을 호소하는 예로 쓰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여자에게서 대가없는 희생과 인내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맨 박스는 당연히 남자가 만들어 낸 자학적 문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몇몇 (남자인)여성 운동가들은 맨 박스로부터 남자를 구원하기 위해 여성운동을 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대중은 어김없이 맥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대중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책임을 자기가 속한 집단, 혹은 그 선대의 잘못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회적으로 더 낮고 목소리 약한 사람들에게로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