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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로코코
작성일 2016-10-07 15:12:50 KST 조회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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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윌리엄과 천재 조수 아냐
물론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특하고 영특한 마법사 윌리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훌륭한 마법사에게는 언제나 훌륭한 제자가 있다...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결코 잊혀져선 안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훌륭한 현대 마법사들은 조수, 혹은 제자를 하나씩 두고 있다. 이 조수들은 마법사의 일을 돕거나 그 비전을 전수 받고, 스승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어나가는 존재들이다. 현대에 존재하는 학문 중 가장 까다롭고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마법은 단 한 가지 주문을 연구하는 데에만 해도 무수한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에, 세기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법사라면 반드시 조수를 옆에 둬야만 한다.

 

충직한 조수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비커를 닦거나 수은을 담은 양동이를 취급하는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배를 굶는 스콜라 걸인에게 크라운 몇 푼을 쥐어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의 조수는 직접 마법을 부릴 줄 알아야 하고(사실 이것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다), 학문적 소양이 있어야 하며, 스승의 업적과 재산을 가로채고픈 욕심은 없되 스승의 과업을 이어받고자 하는 충성심은 높아야 한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이제 여러분도 훌륭하고 까다로운 마법사 윌리엄의 조수 일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 베드포드 딸 아냐가 실은 얼마나 영특하고 성실한 아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생겼고, 어디서 왔고, 윌리엄에게 거둬지기 전에는 무엇을 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필자도 베드포드 딸 아냐를 직접 육안으로 본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당시 나는 버로우 저잣거리 주변에 살았다. 가난한 문과 대학 학생이었기 때문에 종종 생활비가 바닥나곤 했고, 그럴 때면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박하 잎을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내가 살던 하숙집은 버로우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풀잎을 씹으며 정면을 바라보면 구불구불한 포장도로와 음식이 진열된 시장 바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을 되도록 오래 눈 안에 담아내며 스스로 위안을 찾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밀이 잔뜩 담긴 포대를 양 손에 안고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한 소녀를 보았다. 그녀의 검푸른 머리칼은 말 갈기처럼 생기가 넘쳤고, 밑단이 반질반질한 치마 아래로 드러난 장딴지가 그렇게 튼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멀찍이서 본 찰나의 광경이었으나, 나는 그 여자가 아냐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마주하는 사람에게조차 확신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개성을 가진 소녀였던 것이다.

 

훗날 우리의 마법사 윌리엄이 스콜라에서 유명세를 얻으면서 아름다운 소녀 조수 아냐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이미 스콜라를 떠난 지 오래였지만, 신문에 그려진 초상화와 다양한 사람들의 진술, 작가들의 세심한 기술을 통해 아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독자 여러분께 그 정보들을 인용해 드리자면, 우선 존경 받는 길럼 경은 <뉴 스테이츠 맨>에 올린 칼럼에서 아냐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베드포드 딸 아냐는 이 섬나라에 뿌리 내린 토착 종족의 형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얼굴 조형을 가진 소녀였다. 전체적으로 두개골이 작고, 대륙인들과는 달리 광대뼈의 생김새가 비교적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좁은 턱과 가지런하고 조밀한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 대륙인의 피가 짙게 섞인 베드포드 사람들은 대개 비대한 하악골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아냐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대륙 침략기에 주요 거점 역할을 도맡았던 베드포드 주 출신 소녀가 가장 순혈에 가까운 왕국인의 두상을 가졌다는 사실이 자뭇 흥미롭다.” 길럼 경의 칼럼은 그야말로 기술적이다. 하지만 현대 해부학의 꽃인 골상학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서, 스콜라 문예지 <복스 포퓰라>의 연재소설 작가 브레맨포드 사람 데이비드손의 소설가다운묘사도 소개하겠다.

검고 세밀한 속눈썹에 새알처럼 감싸인 에메랄드 색 눈동자는 여름 바다의 우묵한 심연처럼 짙었고, 하얀 콧잔등 위에는 와인에 재운 설탕 같은 흐릿한 주근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거의 매번 웃고 있었지만, 치아를 밖으로 드러내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냐를 볼 때면 나는 언제나 잘 훈련 받은 야생마를 떠올리곤 했다.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더불어 아냐는 중간 정도 키에(아마도 4에서 4.5피트) 깡마른 몸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데이비드손이 이어서 쓴 글에 그 내용이 -그의 개인적인 연민과 함께- 잘 드러나 있다.

아이는 더러운 앞치마가 달린 파란 치마나, 가끔은 선원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 복장의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지만, 마법사들이 자신의 조수 -보통 이런 마법사들의 시종 역할은 도깨비나 임프가 맡는다- 에게 즐겨 입히는 실험복이라고 한다. 어쨌든 옷감은 좋은 편이었으며, 거의 언제나 새 것이었다. 그녀는 키가 4에서 4.5피트밖에 안됐고, 노동으로 단련된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흉부와 둔부는 또래 소년들의 그것처럼 살집이 적고 얄쌍했다. 사실, 그녀는 몸만 보자면 거의 사내애 같았다. 친애하는 윌리엄 씨의 양육 의도가 여자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징을 억누르는 것이었다면, 어느정도 성공하긴 한 것이다.”

 

데이비드손은 애초에 윌리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다른 칼럼들도 윌리엄의 행적과 발언에 대한 꼬투리 잡기로 점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데이비드손은 아냐를 최대한 불쌍한 소녀로 묘사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윌리엄을 비난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신문에 실린 아냐의 초상화가 데이비드손의 묘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눈과 콧잔등에 살짝 얹힌 주근깨는 동일했지만, 그 삽화 안의 아냐는 꽃 무늬 자수가 놓인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데다 몸도 다른 소녀들과 다를 바 없이 풍만했다.

물론 삽화가 역시 자신의 상상력으로 다른 사람의 흠결을 덮는데 능한 사람들이며, 일당 3 크라운을 받고 연재소설용 춘화나 그려주는 그림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필자 역시 아냐의 튼튼한 장딴지를 목격한 바 있으니, 아마 진실은 데이비드손의 말과 신문 삽화 사이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냐의 생김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두고, 다음 의문으로 넘어가보자. 이 수수께끼의 소녀는 어디서 왔을까? 윌리엄은 베드포드의 어디서 이런 재능 넘치는 여자아이를 발굴한 걸까? 놀랍게도, 아냐의 과거는 조금도 베일에 싸여 있지 않다. 오히려 살짝 안타깝고 구차하기까지 하다. 애초에 윌리엄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커피 하우스에서 만나 담소를 만나는 사람들, 하루 건너 술 친구가 되는 무뢰배들, 심지어 카드 게임을 하러 온 손님들에게도 아냐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곤 했다.

 

길럼 경 역시 아냐와 윌리엄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가 집필한 자서전에 그 이야기가 정확히 적혀 있다.

당시 길럼 경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해부학자였으며, 골상학 -고유한 두개골의 생김새 차이로 인간의 특질과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학문으로, 체내의 흑질이라는 기관이 분비하는 흑담즙의 양에 따라 여성의 히스테리 강도가 달라진다는 오랜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한 신 학문이었다- 의 강렬한 옹호자였다. 새로운 학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윌리엄은 이 시기에 길럼 경과 퍽 교류가 잦았던 것 같다. 둘은 카드 게임을 하면서 신사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정원, 학문, 경제, 정치, 그리고 다시 경제로 돌아갔다가, 자기 인생의 어두운 심연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숙연해지는 그 일련의 종교 의식 말이다.

하루는 윌리엄이 길럼 경에게 자신이 어떻게 멍청한 사기꾼 마술사를 골탕 먹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 참이었다.

 

“-해서 저는 물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도 익히 아시겠지만 모든 마법의 기초는 양동이나 쟁반에 담긴 물을 반으로 가르는데서 시작하지요. 원시적인 형태의 예언을 할 때 특히 유용한 마법입니다...물론 저는 모호하고 자기암시적인 형태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고전 예언보다는 통계 기반 예언학을 선호합니다. 이 흥미진진한 고대 마술과 오늘날의 수학이 어떻게 결합했는지 언젠가 설명해드릴 날이 올 겁니다. 어쨌든 그, 자칭 마술사 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군요. 당연하죠. 무지한 사람들은 마법사가 처녀의 생혈과 보름달 밤에 모가지를 꺾은 닭 피를 섞어 만든 포션을 먹어 예지몽을 꾼다고 생각하거든요...그리고 사기꾼은 그런 모호한 선입견에 기대 자기 밥술을 벌어먹는 광대일 뿐이죠. 저는 그 마술사에게, 여기 도구가 있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이라도 예언해 보라고 일렀습니다. 녀석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쟁반만 응시하더군요. 제가 소리쳤죠. , 신사 분. 제발! 물을 반으로 가르는 건 우리 아냐도 세 살 반에 해낸 일입니다!”

당신 제자도 마법을 쓸 줄 압니까?”

길럼 경이 묻자 윌리엄이 박장대소하며 답했다.

주문을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마법사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때마침 아냐가 은 쟁반에 뜨거운 차와 쿠키를 담아 들고 나타났다. 길럼 경은 그 검은 머리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순수한 경외의 목소리를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 신사 분이 그러시는데, 네가 세 살 하고도 반에 벌써 주문을 부릴 줄 알았다더구나.”

. 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요.”

문장 끝에 교수님은 왜 빼먹었느냐. 아냐, 최소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땐 적절한 예의를 갖춰라.”

교수님.”

아냐가 재빠르게 반응하며 길럼 경에게 차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이 아이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직 덜 다듬어졌죠. 하지만 언젠가 제 모든 걸 이어받게 될 겁니다.”

대단하시군요. 윌리엄 씨. 아무리 스콜라가 자유로운 도시라고 해도 여자가 마법사의 업을 잇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죠. 하지만 저는 언제나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거 아십니까? 이 녀석은 무려 세 살 반에 냄비 안에서 끓던 수프를 반으로 갈랐습니다. 통상적으로 액체를 반으로 가르는 주문은 마법사라면 숨 쉬듯이 행할 수 있어야 하지만, 깨끗한 정제수가 아니면 숙련된 마법사도 꽤 힘을 들여야 하거든요. 아니면 위험하긴 해도 모든 주문이 잘 듣는 액화된 수은을 사용하죠...어쨌든 아냐는 물 분자를 포함한 다른 불순물이 마구 들어간 액체를 상대로 그런 일을 해낸 겁니다. 만약 이 나라가 예니체리 제국이었다면 아냐는 궁정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 나라는 유능한 마법사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데다, 마법사들을 숭배할 줄 아니까요. 하지만 더럽고 비계몽적인 시골 마을 베드포드였기에, 아냐의 어미는 자기 딸이 마녀인 줄 알고 숲에 내다 버리려 했죠! 하하, 정말 농민들이란 열등하기 그지 없는 종족이 아닙니까?”

 

스승님! 어떻게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아냐,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마라. 그리고 예전부터 누누이 말해왔던 거지만 넌 그 여자를 네 혈육으로 여기려 드는 버릇을 고쳐야 해. 앞으로 네가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선천적인 결함이 두 개나 있단 말이다. 하나는 네가 여자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검증되지 않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거지. 그렇지 않습니까, 교수님?”

 

윌리엄은 길럼 경을 흘끗 바라봤다. 길럼은 윌리엄과 아냐를 번갈아 곁눈질 했다. 똑똑한 윌리엄은 골상학의 권위자인 길럼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논제를 꺼낸 것이다. 하지만 길럼 경은 골상에 따라 인간 종족의 등급이 결정된다는, 현대 과학이 내놓은 냉혹하고도 공정한 결론이 혹 이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내심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과학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 또한 학자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네 스승님의 말이 틀리다고 말하긴 어렵구나. 사람의 심적 특성과 지능은 두개골 각 부위의 특정한 형태에 따라 약 35개의 유형으로 나뉜단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를 이뤄 사는 생물인 만큼, 우리 세계에 도움이 되는 특성과 그렇지 못한 특성은 나뉘기 마련이지. 어쨌든 농민들은 대개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골상을 가졌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곤 하지. 그렇기에 매우 유별난 예외인 너는 학계에도 귀중한 샘플이 될 것 같구나. 동시에 너의 재능을 미리 꿰뚫어 본 윌리엄 씨의 공적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이 신사 분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시다.”

저는 그런 건 신경 안써요. 그리고 스승님은 몇 주 전만 해도 제대로 된 표본 조사도 없이 이론 논문만 즐비한 골상학은 수 백년간의 실험으로 입증된 흑담즙설에 비하면 사이비에 불과하다고 하셨어요.”

이 아이가 꿈을 좀 잘 꿉니다. 가끔 현실과 자기 상상을 구별 못하곤 하죠. 어쨌든 그것도 재능이 표출되는 한 가지 형태라 할 수 있죠.”

, ...동의 합니다.”

그리고 멍청한 졸부들 후원이나 받아서 삶을 연명하는 유사 학문들은 어차피 10년도 못 가서 대학에서 쫓겨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냐, 네 방으로 들어가라. 당장.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매를 좀 맞아야겠구나.”

 

아냐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길럼 경은 2층 계단을 올라가는 아냐의 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응접실 안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투명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윌리엄은 그때까지 꾹 붙들고 있던 카드패를 얌전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알맞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잼 바른 우유 쿠키의 귀퉁이를 물어 뜯었다. 마치 하나의 연결된 동작을 보는 것처럼 우아한 자태였다고 길럼 경은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윌리엄은 테이블에 자기 이마를 찧어대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냐! 우리 착하고 귀여운 아냐가! 교수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냐가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어요! 기어코 사악한 여자의 본능이 깨어나서 내 제자의 영특한 대뇌를 갉아먹기 시작한 겁니다! 아님 그 빌어먹을 흑담즙이 드디어 분비되기 시작했던가! , 이걸 막으려고 지금까지 그렇게나 애를 써왔는데! 역시 이성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걸까요?”

 

윌리엄 씨, 진정하십시오! 그러다가 멍들겠습니다. 당신 제자는 괜찮습니다. 정상적인 수준의 공격성이에요...”

정상적인 수준의 공격성! 공격성이 곧 야만의 상징인데 이 세상에 정상적인 야만성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말은 안했지마는 지난 10년 간 아냐가 오늘처럼 나한테 대들었던 적이 없어요!”

윌리엄은 잠시 머리로 망치질하는 걸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요. 몇 번 있었군요...하지만 오늘이 가장 심각합니다! 이건 명확하게 히스테리라구요. , 그 다음은 뭐가 될까요? 그 끔찍한 사춘기가 시작되겠죠? 세상에, 월경도 하겠군요. 그 다음은 근본도 없는 푸와그라 공화국 작가가 쓴 기사 소설을 탐독하겠고 대수학과 문법 공부엔 뒷전이 되겠죠! 몇 년 뒤에는 처음 보는 날강도 같은 사내 놈을 사귀고는 내 재산의 절반을 요구하겠군요!”

정말, 당신은 진정해야 합니다. 윌리엄 씨. 신사답게 행동하십시오. 모든 여자는 일정 나이가 되면 다 월경을 합니다.”

“‘아냐는 달라야 했다구요!”

윌리엄 씨. 당신 꼭 히스테리 부리는 것 같소!”

 

그때서야 윌리엄은 자학을 멈췄다. 대신 이마를 테이블 위에 뉘인 채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길럼은 눈살을 찌푸리며 허망하게 움츠러든 윌리엄의 두 손을 보았다. 윌리엄의 손아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아까 말했던 건 다 거짓말입니다. 난 아냐한테 지금까지 한 번도 손찌검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저 영악한 여자애도 내가 자기를 때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회초리나 말채찍으로 사람을 갈긴다는 게 신사로서 할 짓은 아니잖습니까? 으음...어쩌면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교수님. 하지만 확실히 흑담즙을 체외로 배출시키는 가장 탁월한 방법 중 하나가 물리적인 고통 아닙니까? 아무래도 매질하는 소년을 한 놈 고용해야 겠습니다...한 달에 5크라운 정도로...피부는 손상 안 시키되 확실하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숙련된 녀석으로 골라야...”

아니, 하지 마십시오. 윌리엄 씨, 아이를 매질 없이 키우는 건 아주 잘 해내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제 생각에는 그런 고통 없는 교육법 덕분에 아이가 충직한 제자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랬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잖습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요. 이보시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언제나 한결 같지는 않다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소? 가장 고결한 사람도 가끔 살의를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요. 어쨌든 됨됨이가 된 사람은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만 돌발 행동을 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자신을 버린 어미까지 소중히 여기는 아냐를 보면서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학문이, 윤리적으로 매우 불쾌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지도 모르죠. 모든 사람이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골상학은 그들의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닫아 버리니까요. 게다가 우리의 학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골의 일부가 함몰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갑자기 성격이 변해버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인간의 자연 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은 여전히 덜 성숙됐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설익은 학설을 인간의 삶에 섣부르게 적용시키는 것은 큰 반발을 불러 일으킵니다. 특히나 그 학설이 다수 대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설령 언젠가 훨씬 정밀한 방법을 통해 골상학이 진실로 검증되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 인간을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그걸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길럼 경이 윌리엄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훗날 그가 이 자서전을 쓰면서 나름대로 다시 다듬고 재구성해 내놓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당시의 심정이 담긴 말이라기 보다는,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닫고 참회한 것을 총집편한 말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일을 겪고 난 뒤에 골상학 교수를 그만 뒀고, 대신 식민지 땅 하나를 헐값에 사서 담뱃잎 재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고 국익에 이바지한 바를 인정 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받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어쨌든 다시 사건으로 돌아와서, 길럼 경은 일장 연설을 마친 뒤,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에서 오는 법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교수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윌리엄과 길럼 경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 나지만, 자서전을 쭉 읽다 보면 그 후의 일들에 대한 편린 같은 실마리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윌리엄은 아냐를 정기적으로 매질할 소년을 따로 고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냐가 자신에게 보인 무례함을 잊어버렸으며, 두 사람은 다시 친밀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돌아왔다.

몇몇 사람들은 윌리엄을 두고 변덕스럽고 속 편한 남자일 뿐이라며 혀를 내두르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윌리엄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인 긍정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와 같은 신사들은 언제나 세상이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는 확고한 필연의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환경에서도 승리와 안도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아냐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의 굴레를 목에 맨 채 살았다. 그녀는 부유한 후견인이 없는 삶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간혹 발작에 가까운 반항심으로 주인의 손등을 할퀴는 집고양이처럼 행동할 때가 있지만, 결국에는 다시 모닥불과 수프가 있는 집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여자들은 자신이 이고 사는 고통과 타협하는 일에 너무나 친숙하다.

 

그래서 이것이 윌리엄과 아냐, 서른 넷의 야심찬 마법사와 열 세 살 조수가 자아낸 기괴한 사제 관계의 표피 밑에 도사리는 추악한 진실이었을까? 야만인을 자신의 방법으로 제련해 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한 계몽주의자와, 어쩔 수 없이 그의 장단에 맞춰야만 하는 가련한 꼭두각시의 관계?

필자는 이번에도 감히 부정의 의사를 표하고 싶다. 어쨌든 두 사람은 거의 10년을 함께 살았고, 10년은 무의미한 인연으로만 끝나기엔 너무나 거대한 시간이다.

물론 아냐는 <에밀>이 아니고, 더욱이 윌리엄도 루소가 아니지만, 결국 인간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세월인 법이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삶에서 체득해 나가는 지혜가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사제가 언제나 절벽 위를 걷는 듯한 애증의 관계를 유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유대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매우 많다. 모순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란 다양한 면면을 가진 찬란한 보석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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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개념의극한 (2016-10-07 15:23:54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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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ㅊ
아이콘 개념의극한 (2016-10-07 15:24:3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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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음 단편집으로 봐도 좋을 퀄인 거 같네요 일러스트도 넣고
로코코 (2016-10-07 15:25:08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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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신문 삽화풍으로 넣어서 사람들 오해하게 하고 싶다..
아이콘 제드 (2016-10-07 15:29:53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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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쓰셨음.
아이콘 제드 (2016-10-07 15:30:13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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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의 문학가가또..
북극까치 (2016-10-07 15:39:55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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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빅토리아적이다
아이콘 아이덴타워 (2016-10-07 15:52:47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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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아라도 보고 오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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