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
작성일 | 2016-10-23 16:23:38 KST | 조회 | 1,023 |
제목 |
마법사 윌리엄과 역사의 망령 上
|
타고난 신사인 윌리엄은 어지간한 일에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눈 앞에서 토막 살인이 벌어져도 헛기침 한 번 하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이성과 합리의 시대가 눈부시게 개화한 오늘날에는, 이러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모든 인간이 유인원 시절의 본능과 싸우며 뻘밭을 뒹굴던 시절에 가장 먼저 문학과 과학의 꽃봉오리에 물을 길어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 직물 기술로 짜 만든 옷을 입고 현대 언어학이 규명한 음운학과 문법학에 기초해 발화를 하는 이상, 모든 현대인은 신사들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적어도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윌리엄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그것을 자신의 유전자를 이은 후손에게 양도하는 것이 그리 불공평한 처사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윌리엄도 가끔은 동요할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 필자가 여러분에게 들려줄 이 이야기 역시, 저택의 널찍한 복도를 서성이며 불안해하는 윌리엄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날 윌리엄은 매우 분주한 동작으로 객실 복도를 휩쓸 듯이 지나다녔다. 이윽고 그는 아냐의 방에서 발을 멈췄다. 윌리엄은 굳게 닫힌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냐! 아냐! 아직도 안 일어났느냐?”
윌리엄은 편집증 환자처럼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댔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자, 그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뽑아들어 암기를 다루는 자객처럼 그것을 문고리에 찔러 넣었다. 윌리엄은 방 안을 의례적으로 둘러보았다. 옷걸이, 작은 책상, 의자, 그리고 대학교 교과서 몇 권. 감히 상상해 보건대, 아냐의 방은 어린 소녀의 그것보다는 차라리 고행하는 수도사의 밀실에 가까웠으리라.
방 한 구석에는 작은 창이 나있었고, 그 창을 통해 한 줄기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광선이 내리쬐이는 경로 바로 아래에 아냐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아냐는 누렇게 빛이 바랜 이불을 몸에 감싼 채, 머리만 바깥으로 내놓고 햇빛을 향해 코를 내민 기괴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추측해보건대 초가을 스콜라의 싸늘한 공기를 벗어나 온기의 체취를 조금이나마 폐 안에 머금어 보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신사 마법사 윌리엄은 그런 아냐의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려 창문을 찔러대며 소리쳤다.
“아냐! 이 녀석! 스승님이 깨우러 올 때까지 퍼질러 자는 제자가 세상에 어디 있니?”
요란한 소음에 기어코 아냐가 눈을 떴다. 그녀는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이렇게 이르다니! 지금 시간이 벌써 06시 30분이란 말이다!”
“제가 아는 스승님은 언제나 일곱 시 반에 일어나시는데요.”
아냐가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꾸물대자, 윌리엄은 더욱 요란하게 창문을 두들겼다.
“말대꾸하지 마라. 어서 일어나! 그리고 좀 씻어라. 오늘 아홉 시에 손님이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 전까지 우리 둘 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단 말이다!”
“손님이요...?”
아냐는 나풀거리는 먼지처럼 몰려드는 졸음을 털어내 보려고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는 한층 더 맑아진 시야로 스승님을 올려다 보았다. 윌리엄은 앞머리와 옆머리를 뒤로 넘겨 모아 꽁지처럼 묶었고, 고급 셔츠와 군청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소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꼈으며, 진짜 금줄이 달린 회중시계를 가슴 주머니에 차고 있었다. 사실 윌리엄의 복장은 스콜라 사교회에 끼어들고픈 젊은 장교들, 1차 푸와그라 전쟁의 잊혀진 참전 베테랑들, 그리고 전쟁 연금 수령자인 척 하는 사기꾼들이 주로 선호하는 개성 없는 신사복이었다.(그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윌리엄이 그만큼 의복이라는 것을 그저 구색 맞추는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젊고 유복한 남자들이 평소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알 턱이 없는 아냐에게 윌리엄의 모습은 제1 해군 경처럼 근엄해 보였다. 아냐는 토끼 눈을 하고서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댄 채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스승님! 너무 근사하세요!”
“이 미친 녀석이 이제는 제 스승한테 발정을 하느냐?”
윌리엄은 지팡이의 둥근 끝부분으로 아냐의 이마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물론 그녀의 소중한 두뇌에 충격이 전달되지 않을 만큼 미약한 타격이었다. 언제나 강조하는 말이지만, 윌리엄은 신사이자 지성인이었으며, 인간에게 두뇌가 심장 만큼이나 귀중한 신체 기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는 아냐의 신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그 영특한 두뇌 만큼은 끔찍하게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스승의 매는 아냐를 수마의 영역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다. 아냐가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윌리엄은 (정말로 놀랍게도)두 사람 몫의 아침을 준비했다. 윌리엄은 아침에 구운 청어와 달걀, 빵, 치즈를 주로 먹었으며 아냐에게도 비슷한 양의 음식을 먹였다. 이 시기, 그러니까 아냐가 막 열 네살 생일을 치른 뒤부터 윌리엄의 교육 방침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소의 신장을 다져 만든 파이와 풀떼기로 아냐를 고문하는 대신, 보다 영양가 있고 정상적인 식사로 제자의 노고를 치하했다. 덕분에 아냐는 지난 몇 개월 사이에 키가 10cm는 컸으며, 커다란 두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팔과 다리는 말처럼 튼튼하고 싱그러워졌다. 날이 갈수록 아냐의 몸 바깥으로 부정할 수 없는 여성의 신체적 특질들이 (윌리엄의 표현을 빌리자면)거대한 수두 자국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윌리엄은 정작 무덤덤했다.
대체 이 신사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그가 결국 냉엄한 자연 법칙에 굴복하고 만 걸까? 사실 이것과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냐는 이제 식사 시간마다 스승과 동석하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야기 주제는 보통 윌리엄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인 경우가 많았으나, 아주 가끔 아냐의 교육과 미래에 대해 논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9시에 오신다는 귀중한 손님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 코스가 됐다.
아냐는 청어의 뼈를 포크와 나이프만으로 발라내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오시는 분 이야기 좀 해주세요.”
“언제 물어보나 했다.”
윌리엄은 손수건으로 입가 주변을 슥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아냐, 너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면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신문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 거라고 믿는다...”
“에...브리스튜 가디언이요?”
“뉴 스테이트 맨 말이다. 내가 최근 너에 대한 기대치를 많이 낮춰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렴. 어쨌든 이 신문으로 말하자면 말이다...뉴 스테이트 맨을 구독하지 않는 신사는 결코 교양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단다. 이 신문은 그야말로 지식의 실크로드와 같지. 정치, 국제정치, 경제, 무역 동향, 현대 과학의 추세는 물론, 마법과 주문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 광대한 주제를 아주 깊고 세밀하게 다룬단다. 게다가 지면 뒤에 실리는 칼럼들은 커피 하우스에서도 새치혀로 이름난 사람들의 글만 엄선하니, 너처럼 굼뜨고 게으른 계집애들도 이 신문만 읽으면 순식간에 박식한 신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스승을 흡족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냐가 계속 해서 청어와 씨름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뉴 스테이트 맨이 왜요?”
“들어봐라, 이 뉴 스테이트 맨은 실은 그렇게 역사가 깊은 신문이 아냐. 사실 그게 이 신문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증거지. 발행인을 맡고 있는 신사 중의 신사, 베스커빌 사람 피터 씨는 13년 전에 스테이트 맨을 처음 발행했단다. 처음에는 자유당지지 정론지로 시작했지. 다른 흔해 빠진 군소 신문지들처럼 말야. 그러다가 점점 세력을 불려서, 대학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기자들을 긁어 모아 지금처럼 거대한 신문을 만든 거란다. 피터 씨는 존경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란다. 그는 스콜라를 비롯한 5개의 자유 도시가 우리 쉬림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지. 또 그는 교수들을 존중할 줄 알고, 무엇보다도 우리 마법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열성적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마법사들은 아직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만한 정치적 기반이 부실하지...”
“그 신사 분이 기사로 실어주기만 하면 우리도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에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뉴 스테이트 맨은 이제 신문업계의 거인이란다. 모든 교양있는 사람들이 피터 씨의 말을 추종하고, 정치인들은 행여나 자기 추문이 신문에 실릴까 노심초사하지...그러니 스테이트 맨의 지지성명은 국왕의 인장이나 다를 바 없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피터 씨가 없었다면 마법사들은 진작 광장 교수형대에 목이 매달려 죽었을 게야. 알다시피 대륙의 성직자들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느냐.”
“성직자들이요? 왜요?”
아냐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물론 윌리엄은 그녀를 신실한 교인으로 키우지 않았고, 아냐 역시 지난 14년 간 단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냐는 근본적으로 농민의 딸이었다. 비록 아냐가 아주 어린 시절에 윌리엄의 제자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가난한 농경 사회의 광신적인 기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 유전이란 얼마나 악독하고 끈질긴 각인이란 말인가. 스콜라 사회의 자유분방하고 우상파괴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으면서도, 아냐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교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신 학문의 신성모독적인 소독 과정 만으로는 쉬이 씻겨낼 수 없는 깊은 인두 자국이다.
“이 멍청한 제자 같으니. 눈이 있으면 뜨고, 귀가 있다면 열어야 할 일이다. 교회는 우리를 싫어한단다. 첫째는 우리가 자연의 기계설을 지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왕국의 점성술사나 허가받지 않은 연금술사들이 미신을 퍼뜨리기 때문이지. 특히 대륙의 교회들은 부와 정치적 힘을 이용해 학파의 부흥을 온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지. 그나마 이 다섯 개의 자유 도시에서만 무신론과 마법 연구의 자유를 허락받을 수 있는 거란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이 모두 이 나라로 몰려드는 거고...그리고 그 범 대륙적인 치외 법권의 수립에 스테이트 맨의 자유 성명이 정말 큰 역할을 했지. 이 녀석아, 스콜라가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도시였는 줄 아느냐? 피터 씨가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지원해주지 않았더라면 너나 나나 지금쯤 교수형대에 있었을 거란다.”
“그럼...그럼 제가 마법사가 되고 나면 다섯 도시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게 될 거란 말인가요?”
“환영 받지만 못하면 다행이겠지. 아마 그 이전에 성난 시민들이 널 불태우려 할 거다.”
“세상에, 스승님! 제 삶을 망쳐 놓으신 거잖아요!”
“이 녀석아, 스승한테 그렇게 말대꾸하는 제자가 어디 있니? 그리고 내 장담 하는데,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다섯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절대 다른 지역으로는 여행하고 싶어하지 않을걸. 스콜라는 세상의 부의 절반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들이 곧 세상 전역에서 나오는 것들이지. 우리 왕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미안하지만 왕궁이 있는 버몬트를 제외하고는 전부 늪지거나 똥통이란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고.”
“저는 마법사가 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물론 마법사가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여기는 자유 도시니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조금도 모르겠구나. 마법사가 되면 내 실험도구와 자산을 아무런 세금 없이 상속받을 수 있고, 운이 따르면 교수도 될 수 있을 거다. 더 운이 좋다면 식민지에서 농장을 경영하거나 화물선도 구매할 수 있겠지. 세상에 어떤 여자가 너처럼 자유를 누릴 수 있겠니, 응? 공주라도 되고 싶은 게냐?”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요.”
“백과사전을 읽으려무나.”
아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묽은 소스를 끼얹은 청어 구이가 가련한 등뼈를 반쯤 내보인 채 희멀건 동공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규칙적인 말 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냐는 두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스승을 바라보았다. 손수건으로 턱 주변을 문지르고 있던 윌리엄이 튕겨나듯이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냐! 이것들 당장 다 치우거라!”
윌리엄은 재빨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절도있는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 길다란 복도를 지나 현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의 노련한 신사는 조용히 뒷짐을 진 채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고대하던 정문 종소리가 정확히 세 번 울렸다. 윌리엄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문 밖으로 나갔다.
정문 울타리 너머로 백마 두 마리가 끄는 검은 마차가 보였다. 문 근처에 경비원 대신 달아둔 종 옆에는 남루한 복장의 소년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윌리엄은 훤칠한 걸음 걸이로 철창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누구지?”
“에, 치, 친애하는 베스커빌 사람 피, 피터 선생님을 대신하여-”
윌리엄이 인상을 구기자 소년은 얼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윌리엄은 느닷없이 코 밑을 훑고 지나간 날카로운 가을 바람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소년이 보여준 일련의 동작 만으로도 그는 그 소년의 심리 상태와 양육 환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위축됐군.’
윌리엄은 소년의 자신 없는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을 상기하며 생각했다. 이 소년은 누군가의 전령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 전령 견습생이겠지. 이런 아이들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교육을 받으며 주인 집에서 성장한다. 당연히 이 소년을 비싼 값에 구매한 신사는 아이를 최고의 하인으로 만들어내고 싶어했을 것이고, 아이가 실수하거나 굼뜬 행동을 보일 때마다 정당한 응징을 가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년은 엄하고 됨됨이가 바르며 남을 부지런히 매질할 수 있을 만큼 매사에 철두철미한 한 훌륭한 신사의 간접적 표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윌리엄은 흡족해졌다.
갑자기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하얀 장갑을 양 손에 낀 한 날씬한 신사가 마차에서 내렸다. 신사는 매부리코에,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는데 나이는 윌리엄보다 열 댓살 쯤 더 들어보였다. 검은 정복은 맞춤형인 듯 했고(당연하지만 스콜라 장인이 손수 만든 옷의 가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머리에는 모든 자유 기업가들의 상징인 검은 실크햇이 왕관처럼 씌여져 있었다.
신사는 지팡이로 도보를 탁, 탁 두드리며 동방 설화의 예언자처럼 윌리엄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본의 아니게 선생님을 바깥으로 불러내는 꼴이 되었군요. 저는 이런 대저택을 소유하신 분이라면 마땅히 문지기가 있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사는 모자 챙을 한 손으로 살짝 쥐었다가 뗐다. 그리고 지팡이 끝으로 소년의 뒷꿈치를 찔렀다. 소년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재빨리 신사에게서 비켜섰다.
“제가 바로 베스커빌 사람 피터입니다.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올곧은 지식인들과는 언제든지 마음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윌리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혀가 마비되어 제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는 피터를 보자마자 완전히 그에게 매료되고 말았던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발음과 정중한 예절, 성공한 사업가다운 복장, 자신과 마주한 사람을 자괴감에 빠뜨리는 형용할 수 없는 카리스마까지. 윌리엄은 피터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입자 하나하나를 모조리 자신의 뇌에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음, 선생님?”
“아, 예? 예. 그렇군요. 피터 씨. 저는 윌리엄입니다. 스콜라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그러니까 오랜 전통에 따르면 제가 다른 사람에게 저 자신을 소개할 때는, 스콜라 사람 윌리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겠죠. 아마 저에 대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아닐 수도 있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건 피터 씨가 아직 스콜라라는 도시의 생리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는 이야기겠죠. 어쨌든 저는 마법사입니다. 사실, 협잡꾼들이 판을 치는 이 도시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축에 드는 마법사죠.”
“그러시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문을 열고 저희를 저택 안으로 들여보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제 이야기는 야외에서 나누기에는 조금 길 듯 하군요.”
“물론이죠! 들어오십시오. 저 윌리엄은 피터 씨에게 아무 것도 숨길 게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윌리엄은 피터와 소년을 대동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응접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통과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윌리엄은 심장이 부풀어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막대한 부를 쌓은 훌륭한 신사들이 정원과 인테리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피터는 그런 훌륭한 신사들 중 한 명이었다. 만약 그가 윌리엄의 라임 나무 상태를 트집 잡는다면? 복도에 걸린 싸구려 정물화의 정확한 시세를 꿰뚫어 본다면? 한 순간에 윌리엄의 지적 권위가 땅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기개있는 신사 윌리엄이 사랑하는 조국, 쉬림프 왕국의 멸망보다 더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바로 자신의 흠잡을 데 없는 지성이 도전받는 것이었다. 필자가 여러 번 말한 바 있듯이, 윌리엄이 가장 참을 수 없는 두 부류의 인간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과 자신보다 멍청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피터는 그저 정면을 바라보고 걸을 뿐 주변 경관에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피터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윌리엄은 자신을 뒤따라 오는 피터를 흘긋 바라보며 내심 흡족해했다.
‘저렇게 뚜렷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니, 역시 참된 신사라니까.’
세 사람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탁자 위에는 꽃 무늬 자수가 새겨진 천이 펼쳐져 있었고, 대기 주위에 아련한 향수 냄새가 났다. 아마 아냐가 음식 냄새를 감추기 위해 뿌린 듯 했다. 아냐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고, 그녀의 무릎에는 두꺼운 교과서가 한 권 얹혀져 있었다. 아냐는 전혀 예상 못 한 광경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앙큼한 녀석을 보았나!’ 윌리엄은 제자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 속으로 말이다.
“피터 씨, 아마 약간 당황하셨을 듯 한데 이쪽은 아냐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이자 가장 충직한 조수라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다양한 주문을 부릴 줄 아는 영특한 소녀라지요?”
“대체 누가 그런 근거 없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가씨. 저는 베스커빌 사람 피터라고 합니다. 제가 데려온 이 소년은 모슬리인데, 바다 건너 이국에서 데려온 시종입니다. 참고로 저는 주간지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이 근방에서는 꽤 잘 나가는 신문이지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아냐는 피터가 내민 손을 공손히 감싸쥐며 말을 이었다.
“뉴 스테이트 맨의 발행인이시죠?”
“놀랍군요!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선생님, 스콜라 사람이라면 뉴 스테이트 맨을 모를 리가 없죠. 정치, 사회, 국제 정세와 무역 현황은 물론이고 현대 과학의 추세까지 다루는 우리나라의 보고와 같은 신문이잖아요? 게다가 지면 뒤에 실리는 칼럼은 커피 하우스의 신사들 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식견을 가진 사람들의 글만 엄선하잖아요.”
“세상에, 아가씨는 저를 정말 놀라게 하는군요. 어디서 그런 걸 배우셨습니까? 요즘 학교에서는 그런 걸 가르치나 보죠? 신문 발행인들을 기쁘게 하는 화법 같은 걸?”
“아냐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필요한 지식은 대개 저를 통해 습득하고 있죠.”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걸 기근보다 더한 재앙으로 여기는 윌리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시는군요. 하기야, 윌리엄 선생님 같은 훌륭한 마법사를 스승으로 두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다재다능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그 수녀원 같은 공간에 감금해 두는 것 또한 비극이라 할 수 있겠죠.”
“거기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해 동의하는 바입니다, 피터 씨. 저는 종교인들의 낙관적이고 무지에 순응하는 태도가 장기적으로 아냐에게 굉장히 나쁜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어쨌든 요즘 공립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기껏 해야 성서 외우는 법이나 미사 드리는 순서 같은 거니까요. 그런 걸 배운 여자가 자수나 뜰 줄 아는 농사꾼의 아내들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 제게도 아냐 양의 지능의 절반만 따라오는 제자, 아니 시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슬리는 안타깝게도 그리 영민하지 못한 소년이죠. 대신 잔꾀를 부릴 줄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피터가 응접실 한 켠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에게 눈길을 주며 탄식했다.
“우리 아냐는 언젠가 제 모든 것을 이어 받아야 하니까요. 어지간한 지능으로는 주문 연구의 신묘한 세계에 발끝조차 들일 수 없거든요. 그러므로 너무 낙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신사의 시종이란, 순진하고 체력만 좋으면 되는 존재들 아닙니까?”
“바로 그렇죠. 꼭 모든 사람이 똑똑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우리 세계는 위대한 소수와 평범한 다수의 긴밀하면서도 긴장된 협력관계 속에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테니까요...자유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가치였다면 누가 그걸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피터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지만 윌리엄은, 아! 윌리엄은 안구의 틈새에서 터져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지적이고 품위있는 대화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피터는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온 푸짐한 추수절 성찬이었다. 피터는 육즙 소스를 끼얹은 요크셔 푸딩처럼, 대추와 양파와 함께 버무린 칠면조 고기처럼, 그리고 탐스럽게 살이 오른 가을 사과처럼 풍부하고 시큼하면서도 생그러운 풍미의 지성으로 윌리엄의 노곤한 두뇌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었다.
윌리엄이 초인적인 자제심을 가진 진정한 신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는 진작에 피터에게 달려들어 그 먹음직스러운 귓불을 물어뜯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터가 경쾌하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잡담은 여기서 멈추도록 합시다. 윌리엄 선생님, 아시다시피 노동 대신 지식 탐구를 업으로 삼은 대학의 교양인들과는 달리, 우리 사업가들은 떼 묻은 크라운을 벌기 위해 속세의 진창을 헤집고 들어가야 하거든요. 제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답니다. 사실 제가 오늘 선생님을 만나 뵙고자 했던 건, 선생님이 아주 훌륭하고 신통한 마법사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통한’ 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긴 했지만, 윌리엄은 이 성급한 신문 발행인의 사소한 실수는 너그럽게 용서해 줄 용의가 있었다.
“마법과 관련된 일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모슬리, 그걸 가져오너라.”
모슬리는 소중한 물건처럼 품에 안고 있던 물체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얀 보자기에 감싸인 물건이었는데, 생김새나 두께가 꼭 거대한 판화 같았다.
“이걸 잘 보시기 바랍니다.”
피터가 물건을 감싼 보자기를 벗겨냈다. 예상대로 그것은 얇은 목판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윌리엄과 아냐는 고개를 빼들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둑한 하늘 아래 펼쳐진 민둥산 밑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리넨 옷감으로 짠 고대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몇 명은 논쟁하고 있었고, 다른 몇 명은 머리를 조아리며 중앙의 인물을 숭배하고 있었다. 중앙의 인물은 하얀 천으로 옥색 나신을 가린 사람이었는데, 밝은 갈색 머리칼과 밝은 갈색 수염, 그리고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물감으로 표현한 헤일로가 그의 정수리 바깥으로 팽창하며 주변 경관을 좀먹고 있었다.
“유화입니까?”
윌리엄이 턱을 연신 쓰다듬으며 물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예술에 조예가 있으실 줄 알았습니다. 정확히는 대륙 동쪽의 플러머 왕국에서 가져온 성물입니다. <민둥산을 내려온 독생자의 증거하심>이란 작품이죠. 작가가 누군지도 아십니까? 바로 포드할레 성자 시몬입니다!”
“포드할레 사람 시몬!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압니다. 마법사들은 모두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죠. 아냐, 그렇지?”
“예. 17세기에 태어난 마법사죠...”
“마법사 인물 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더냐? 분명히 탄생 연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을텐데 말이다.”
“물론 그렇지만, 그걸 다 외울 필요는 없잖아요? 어쨌든 100년 전 사람이라구요.”
“인류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100년 전 사람이지, 세상에. 이 녀석아! 네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만든 위대한 스승님들께 약간이라도 존경심을 가져봐라! 그래, 어디 계속해 봐라.”
“포드할레 사람 시몬은 17세기에 태어났죠...플러머 왕국에서 태어났지만 교육은 브레첼에서 받았어요...에, 플로지스톤설에 큰 영감을 받았고, 인간이 불에 타서 재가 되는 이유는 기체 상태의 영혼에 함유된 플로지스톤 입자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어요. 그에 기반해 화형은 인간의 영혼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신의 의지에 반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플러머에서 화형을 금지시키는데 성공했어요. 그 인도적인 공적을 인정 받아 대륙에서 성자로 추대 됐구요. 하지만 과거 연금술을 배우고 학위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플러머 왕국에서 쫓겨나 스콜라에 망명했죠. 말년에는 푸와그라 공화국의 화학자들이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는 바람에 플러머 왕국에서 다시 화형이 부활하는 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죽고 말았어요.”
“그리고 현대의 마법사들이 거기서 얻을 교훈이 있다면?”
“으응...심리적 충격이 심근경색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참 경이로울 정도로 비효율적인 두뇌를 가진 제자로구나. 정답은 검증되지 않은 학설의 섣부른 사회적 적용이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거란다. 플러머 왕국은 비록 미개한 나라이긴 하지만, 점진적으로 정교 분리를 추진해가던 나라였어. 하지만 플로지스톤설의 폐기는 화형 찬성자를 비롯한 극단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활력을 부여했고, 결국 문명의 수레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추진력을 주고 말았지. 시몬은 훌륭한 마법사이자 연금술사였지만 너무 성급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참담한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 거지. 내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종교인 과학자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구나. 그들은 본질적으로 오소독스지.”
피터가 박수를 쳤다.
“훌륭합니다. 두 분, 바로 맞추셨습니다. 그 비운의 성자 포드할레 시몬이 바로 이 유화를 만든 사람입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긴 합니다만 시몬은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지요. 안타깝게도 플러머 교회는 그의 예술적 성취를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덕분에 제가 이 그림을 플러머에서 헐값에 살 수 있었습니다.”
“대단합니다. 피터 씨, 하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안가는군요. 시몬이 재능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들, 진짜 위대한 화가들에 비하면 그의 그림은 가치가 턱없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 그 그림을 구매한 겁니까?”
“하하. 윌리엄 선생님. 신사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이 세상에는 틈새시장이란 게 있습니다. 회화의 가치를 부풀리는 것이 꼭 첨단 기법이나 훌륭한 감성, 뭐, 혹은 화가의 이름값뿐만이 아닙니다. 예술 시장도 엄중한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조율되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희소성인 겁니다. 모든 종교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도시 스콜라에는 우상파괴자와 공화주의자, 왕정복고주의자, 독재자, 과학만능주의자, 무신론자가 도가니처럼 뒤엉켜 살고 있죠. 이들은 모두 호사가이며 야사를 선호한답니다. 성자이자 연금술사였고, 애국자이자 도망자였던 시몬은 그 자체로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인물인 셈이죠. 그가 추락하기 전, 그 명예가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작품들만 모아대는 별종들이 군침을 흘려대며 득달같이 모여들 겁니다. 이런 종류의 시장은 말이죠, 윌리엄 씨. 살짝은 에로틱한 동기가 작용하는 법이죠.”
윌리엄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역사적 인물의 불행이 서린 물건을 탐하는 수집가들이라니. 인간의 숭고한 실패와 불굴의 정신을 흠모하는 윌리엄에게 그런 추잡한 욕망은 불가해한 것이었다. 어쩌면 피터의 말대로 이 정체불명의 야사 수집가들의 지갑을 여는 원동력은 모종의 에로틱한 욕망일지도 몰랐다. 순결한 처녀가 타락하고 성녀가 악마에게 속아 말 정액을 마시는 등의 음탕한 설화를 탐독하고 필사하는 무리도 있지 않은가.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그렇다면 피터 씨, 당신이 저를 찾아온 이유는...?”
“예. 그건 말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플러머 왕국에서 열린 경매에서 샀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그림이 정말로 시몬이 그린 진품이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시몬은 유명 예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인장을 남긴 적이 없고, 플러머 교회도 그를 이단으로 낙인 찍은 이상 이 그림의 진위 여부를 가려주지 않겠죠. 아니, 오히려 태워버리려 할 겁니다.”
“피터 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도 그림에 썩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닙니다. 물론 신사로서 저 역시 예술을 즐기는 편이며, 제법 날카로운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입니다. 아마 이 근방에서 저를 따라올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그림 감정을 업으로 삼는 전문가들에게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전문가들은 이미 이 그림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법의 손을 빌리는 게 그리 비이성적인 일은 아닐 겁니다. 사실, 제가 마법을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닙니다만, 세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건에 담긴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여 오랜 망령을 초혼하거나, 옛날 기억을 다시 불러들이는 마법사들이 존재한다고 말이죠...”
“물건에 서린 내력을 읽는 마법이요? 그런 게 존재한다면 이미 경매장에서 사용하지 않았겠습니까? 유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부자 마법사들이 스콜라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그럼 과거의 영혼을 초혼하는 마법은요?”
“영혼이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피터 씨.”
윌리엄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대답했다. 아마 독자 여러분 중 몇 분은 꽤 놀라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윌리엄이 마법의 영역에서 무지한 밑천을 드러내보인 신사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도륙하는지 지켜봐왔다. 하지만 윌리엄은 피터에게만큼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는 피터에게 마법의 기술적 한계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고 싶어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피터를 낙담시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랑의 마력이란 얼마나 강력한가? 지식의 영역에서만큼은 사나운 검투사와 같았던 윌리엄을 단 한 순간에 헌신적인 인간으로 바꿔놓은 걸 보면 말이다.
“현대 마법 이론은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이 모든 차원이 철저하게 기계적인 원리로 돌아간다는 주장을 기초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마법사들 역시 그 원리에 철저히 종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은 더없이 추상적인 영역이지만, 그것 역시 위대한 자연 기계의 일부인 인간의 관념 속에 있으므로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의 초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은요?”
“영혼도 그렇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영혼을 우리 두뇌의 부드러운 지방질 아래에 숨겨진 기체일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무색 무취의 기체이지요. 오늘날에도 이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우리 인간을 움직인다고 하죠. 그리고 종교학자들 중 몇몇은, 사람이 죽으면 이 기체가 대기 위로 떠올라 천국문에 당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죠. 대신 우리 무신론 마법사들은, 보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대뇌의 일부가 열려 이 기체가 인체 바깥으로 배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기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든 생물이 들숨과 날숨을 쉬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수많은 기체가 우리 폐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요. 자연의 섭리입니다. 순환이죠. 아마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삼키고 배출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과거의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세상에! 그럼 지금 이 응접실 안에도 수천 년 전 죽었던 사람의 영혼이 있다는 거요? 그게 내 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거고?”
“아니란 법이 있겠습니까?”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지금까지 끈질기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모슬리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그는 굉장히 안색이 안좋아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피, 피터 어르신? 갑자기 폐가 안 좋아져서...”
피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림은 여기 놔두고 가라, 모슬리. 그리고 되도록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예,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피터는 모슬리가 완저히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건 정말 난처한 일이로군요, 윌리엄 씨. 그렇다면 마법 역시 제가 겪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기술적으로는, 예.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마법사입니다. 모든 일을 마술 부리듯이 해낼 순 없다구요.”
“스승님은 마술을 부리잖아요.”
“아냐, 낄 데와 안 낄 데를 구분할 줄 아는 것도 예의바른 제자의 소양이란다.”
피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탄에 젖은 목소리를 흘렸다.
“오! 이건 재앙이 될 겁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일 바로 이 그림을 경매에 부칠 생각이었습니다. 거기 모인 신사들과 오컬트 매니아, 마법 애호가들에게 당당히 이 그림의 기원을 설명할 생각이었죠. 유령이든 과거의 기억이든 뭐든 불러내서 말입니다. 이제 거하게 망신을 당할 일만 남았군요! 내가 이렇게 성급하게 일을 처리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윌리엄 선생님...”
윌리엄은 피터의 가느다란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슬픈 청색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몸 안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아니, 보다 과학적으로 기술하자면, 그의 두뇌 속에 잠들어 있던 차가운 영혼 기체가 갑작스럽게 열을 받아 팽창하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불꽃이라면, 사람의 영혼은 한 움큼 플로지스톤 입자와 같아라! 영혼은 무지개빛 꼬리를 남기는 기름띠처럼 삽시간에 자신의 몸을 불 태우며 격렬히 연소한다. 성난 입자들은 두뇌 주름 이곳 저곳을 튕겨 다니며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달구고, 기어코 이성을 함락시키고야 만다. 아둔한 시인들은 이러한 생리적 현상을 두고 ‘운명’이라 말하곤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터 씨.”
윌리엄의 이성이 절규했고, 본능이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무 걱정 말고 내일 경매장이 열리는 곳에서 봅시다. 제가 거기서 이 그림의 진위 여부를 밝혀 드리겠습니다.”
“네? 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법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피터가 손에서 얼굴을 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반대로 얼굴은 활짝 피어 있었다.
“예. 우리가 아주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도시에서 가장 촉망받는 지식인이며, 마법사 사회의 유일한 대변자인 베스커빌 사람 피터의 곤경을 외면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이 터무니없는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마법의 힘으로 시간을 돌리든, 자연의 톱니바퀴를 거스르든, 아니면 이 우주와 차원을 찢어 발겨버리든! 오래 전 분해된 영혼을 재조립해내어 내일 그 경매장에서 직접 초혼해 보이도록 하죠. 내일은 우리 마법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날이 될 겁니다.”
“세상에, 윌리엄 씨! 당신이 바로 대마법사요! 예니체리 제국부터 동방의 수시 열도까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찬양할 겁니다!”
“축하는 나중에 합시다. 피터 씨.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기적에 흥분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습니까? 여기 이 종이에 경매장 주소와 경매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내일 마부를 불러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소? 내일 일이 잘 성사되기만 하면 그림을 팔아 번 돈의 반을 당신에게 드리리다. 그리고 스콜라 사람 윌리엄이 우리 칼럼의 마법사 기고문 란의 영구 고문이 될 겁니다!”
윌리엄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뉴 스테이트 맨의 영구 고문이라니!
윌리엄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피터를 응시했다. 피터 역시 열망에 가득 찬 눈으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내일, 역사가 바뀔 겁니다.”
윌리엄이 말했다.
“당연하지요. 내일 만나 뵙겠소, 내 친구!”
피터는 손을 들어올려 모자 챙을 살짝 쥐었다. 처음 윌리엄을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그때는 성공한 상류층 신사다운 가식과 무관심이 함께 했다면, 지금은 진정한 벗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실려 있었다.
윌리엄은 정원의 라임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서, 피터의 검은 마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응접실 안으로 돌아왔다.
아냐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커다란 눈동자로 스승님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아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저는 이게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스승님이 듣길 원치 않으실 거예요.”
“내 장담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그치지 않으마.”
“스승님은 사랑에 빠졌어요.”
아냐는 얼른 대답했다. 윌리엄은 두 손을 그러모아 입가를 가리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까지 네게서 아주 많은 멍청한 말들을 들어왔지만...이번 만큼은 인정해야겠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가 옳았다. 아냐.”
윌리엄이 고개를 들어 아냐를 응시했다. 아냐는 살짝 어깨를 움찔했다. 3살 반에 이 저택에 온 뒤로 이 충직한 제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승이 이렇게나 가련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네가 그 싸구려 기사도 르망에서 읽곤 하는 남녀의 애욕과는 다르단다...(아냐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움찔했다. 이번에는 아주 큰 동작이었다.)그래, 아냐. 다 알고 있었다. 감히 스승 눈을 속이려 했느냐? 어쨌든 이건 철 없는 처녀애들이 가슴을 졸이는 그런 종류의 천박한 사랑이 아니지. 이것은 보다 고귀한, 순수한 지적 열망, 그리고 유전자 단위에서 발현되는 고귀한 본능에 대한 열망이다...이것은...그 뭐시냐-”
“플라토닉이요.”
“그래! 그거야. 세상에, 이제는 내가 너보다 더 멍청해진 것이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스승님. 그 신사 분은 모르겠지만, 스승님은 사실 잘 생기셨으니까 누구든지 잘 사귀실 수 있을 거예요.”
“아냐, 몇 번을 말하느냐. 내 성적 지향은 확고하게 여자들을 향해 있단다. 슬픈 일이지. 하지만 그게 생물학적 본능이니 어찌할 수는 없지 않느냐. 다만 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을 뿐이란다. 너도 잘 새겨듣거라. 본래 인간은 살가죽 아래엔 모두 똥이나 생산하는 내장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라 하였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은 추악한 몸이 아니라 불멸하는 지성이라는 것이지. 네가 그 푸와그라산 르망에 등장하는 훤칠한 방랑 기사들을 꿈 꾸느냐? 그 사람들도 모두 형체 좋은 살코기 그릇에 담긴 똥덩이일 뿐이란다.”
“예. 그 말은 어렸을 때부터 들었지요.”
“뼈가 되는 격언은 수 천번을 들어도 부족하지 않다. 아, 어쨌든 난 지금 사랑에 눈이 멀어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느냐? 내일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난 어쩌자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던 걸까?”
“그냥 솔직하게 고백하시면 안 되요? 영혼을 부를 방법 따윈 없다구요.”
“미쳤구나, 이 녀석아. 지금 스승을 굴욕과 수치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으려 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방법을 찾아보거나요. 네크로맨시는 실존하는 걸로 알고 있는 걸요? 수은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잖아요.”
“수은 거울상 주문 말하는 거냐? 얘야, 그건 자기 무의식 속에 있던 무작위 이미지를 반영하는 최면술에 불과하단다. 극히 최근에 밝혀진 연구 결과라 아직도 모르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지만 말이다.”
“...어쨌든 설화에도 영혼을 불러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수도승이나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호수의 여인같은...”
“호수의 여인! 또 그 기사 소설 이야기구나! 하여간 서재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너 솔직히 말해봐라, 지금까지 문법 공부는 뒷전이고 계속 소설만 읽고 있었지?”
“아니에요. 정말 연구 목적으로만 읽었던 거예요. 스승님도 말하셨잖아요? 민간 전승은 대개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패턴을 추출하는 것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도출할 수 있다구요. 그것이 고대의 지혜라면서요?”
“포드할레 사람 피터의 탄생연도는 못 외우면서 그건 또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저는 정보의 취사선택에 능하잖아요. 그래서 스승님이 저를 아끼시죠.”
아냐는 능청스럽게 스승을 향해 혀를 내밀며 웃었다. 그리고 윌리엄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재빨리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에는, 꼭 영혼을 정말로 소환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 그림이 진짜 시몬이 그린 거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말 잘했구나, 이 녀석아. 그래서 시몬의 영혼이 필요하다는 것 아니냐. 아무런 흔적도 인장도 남아 있지 않은 작자 미상의 그림을 시몬의 것이라 증명하려면 시몬 그 자신을 증인으로 세워야지.”
“그러니까 지금 그 그림은 완전히 백지 상태잖아요. 마치 민간 설화들처럼요. 거의 모든 소설은 거짓말이지만, 그 이야기들의 패턴에는 확고한 역사적 기반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은 어쨌든 그걸 믿잖아요?”
“지금 대체 무슨 멍청한 말을-”
윌리엄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가, 마침내 다시 찌푸렸다. 그리고 별안간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아냐를 노려보았다.
“맙소사!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사랑스러운 계집애 같으니!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영감을 줬는지 아느냐?!”
윌리엄은 아냐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냐는 윌리엄의 어깨 위로 살짝 빠져나온 두 손을 이용해 가까스로 스승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었다.
“이 영악하고 간교로운 녀석 같으니라구, 생각하는 꼬라지를 보노라니 넌 언젠가 이 나라를 팔아먹거나 구원할 운명을 지녔구나. 아, 우리 사랑하는 제자야. 입이라도 맞춰줄까?”
“어머, 죽어도 싫어요.”
“다행이구나. 그럼 이제 날 방해하지 말아라. 오늘 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으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서재에 있을 예정이다. 점심과 저녁 식사를 가져다 줄 때 말고는 절대 서재에 들어오면 안 된다.”
그림:시몬 체허비즈의 <부활>, 폴란드(1758) 유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PlayXP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