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시인은 오규원이다. 이제는 이 땅에 없으시지만.
하지만 내가 제일로 치는 한국 시인은 서정주다. 나는 싱그러움이 가득한 그의 시를 좋아한다. 미당의 문장은 투명하지만 고답하지 않고, 생에 천착해 있으나 진부하지 않다. 만약 토속물을 다룬 한국 시의 정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미당의 이름을 내놓으련다.
미당의 삶은 시인의 초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친일 행위를 했고, 더 나아가 가미카제를 숭상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권력에 기대어 일신을 보존하려는 시인의 끈적한 욕망은 그 자신의 생산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신익-송정오장 영전에>의 낯 뜨거운 수사를 보고 있노라면 정녕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쓴 그 시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동시에, 나는 미당의 삶이야말로 '욕망하는 시인'의 모습을 가장 잘 투영한다고 생각한다. 미당은 "일제가 수백 년은 더 갈 줄 알았다"며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명했다. 순수하리만치 멍청하고 투명한 동기가 아닌가? 그는 발달한 서구 문명을 조선 사회에 이식하리라는 포부를 품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일본 유학 작가들처럼 조선인들을 혐오하며 자신의 민족적 뿌리를 절단하려 들지도 않았으며, 민족의 자주 독립을 꿈꾸지도 않았다. 미당은 그저 수백 년은 더 갈 일제 하에서 달과 구름과 어린 누이와 늙은 부인과 손톱 깎는 일을 탐하면 족했던 것이다. 그의 관심은 1부터 10까지 모두 그 자신의 몸과 욕망에 향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가 그리도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미당의 시는 민족 계몽을 위한 선전 도구도 아니고 지적 허영을 나타내기 위한 간접적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주변의 사물에 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애착이며, 본질적으로 자기애다.
요즘 <은교> 작가 박범신의 성적 추행/폭행 논란으로 문학계가 다시금 들썩이고 있다.(아직 수면 위로 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한국 예술계는 훨씬 더 추악하고 지저분한 스캔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가히 확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현실에선 이다지도 추레할 수 있을까? 정녕 문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걸까?
그러나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사실, 은교는 그리 아름다운 소설이 아니었다.(물론 나는 여전히 그 소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늙은 몸을 가졌으나 역동성을 욕망하는 한 시인의 독백에 가까운 서신이다. <은교>에서 은교는 시인의 성적 기제에 불을 당기는 기폭제가 될 수는 있어도, 그의 삶의 뮤즈가 되지는 못했다. 은교는 늙은 사람의 세계에선 낯섬과 설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어린, 처녀인, 그리고 객체로써 소비될 운명을 타고난 어설픈 상징물이었다. 이것은 그의 시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시로.
너를 거기
구름 젖은 길가에 두고 떠날 때
나는 매번
류머티즘에 걸린다
나의 젊은 신부여
너는 내 모든 관절에 위치해 있다
그럼 다시. 문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걸까? 시를 짓고 소설을 다듬는 초로의 노력이 사람의 마음을 정제하지는 못하는 걸까?
사실 나는 사람들이 은연 중에 문학을 수양으로, 문학가를 고행자로 치환하는 걸 보며 종종 놀라곤 한다. 작가, 그 중에서도 특히 시인은 욕망에 초연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문학가의 탈선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문학-예술가들의 폐쇄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온갖 추잡한 사건들은 반드시 철저하게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술의 발전을 위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했다. 범죄자들을 은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時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낡은 사람들이/아직도 살고 있다.時에는/아무것도 없다/조금도 근사하지 않는/우리의 生밖에 -오규원, <용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