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A-27크롬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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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02-10 08:06:15 KST | 조회 | 617 |
제목 |
캐나다인에 의한 캐나다 최초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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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하프? 저거 아일랜드 아니냐?
아일랜드 맞음
1866년 6월 1일,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자 미국내전 참전 군인이었던 존 오닐은 천여명의 페이니언 협회 병사들을 이끌고 새벽부터 이리호를 건너 영국령인 포트 이리 근처에 내렸다. 선발대는 주변 기차역을 점거하고 전신선을 끊은 후였다.
병사들 다수가 탈주하긴 했지만 증원 200명을 합쳐 650~800명에 달하는 군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무력으로 캐나다 영토를 점거해 영국에 정치적 위기를 불러 일으키고 아일랜드 봉기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6월 2일, 앨프리드 부커 중령이 이끄는 캐나다 민병대 '퀸즈 온 라이플즈'와 해밀턴 13 자원병대대 총합 약 800여명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접근했다.
이들은 아침 7시에 리지웨이 마을 근처 라임스톤 리지에서 서로 만났고, 오닐은 척후병들을 풀었다.
캐나다인들은 척후병들을 밀어내며 전진했지만 사실 그건 오닐의 함정이었고, 오닐의 뜻대로 캐나다인들이 오닐의 본대 쪽으로 다가왔다.
버티 로드에 도달한 캐나다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붉은 옷을 입은 13대대를 영국 증원군으로 착각해 그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게 후퇴로 번졌고, 그 때 접근한 오닐의 기마척후병을 보고 기병돌격이라 생각해 대형을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기병 돌격 같은 건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캐나다인들을 본 오닐은 착검돌격을 시행했고 캐나다인들은 패주했다.
오닐의 군대는 6명을 잃었고, 캐나다인들은 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부상으로 22명이 더 죽었다. 캐나다인들의 형편없는 훈련도와 빈약한 무장을 생각해보면 남북전쟁 베테랑으로 구성되고, 남북전쟁 잉여물자로 무장한 페이니언 군대와 제대로 싸우기 전에 도망간 게 희생자를 줄여줬다고 할 수 있다.
승리에도 불구 더 많은 영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닐의 군대는 퇴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트 이리에는 존 스터톤 데니스가 지휘하는 소규모의 캐나다 민병대가 진출해 있었다.
처음에 캐나다인들은 후위를 지키던 페이니언 병사 수십을 사로잡았으나 오후에 오닐의 본대가 돌아왔고, 캐나다인들은 압도적인 훈련도와 화력, 수적 우세를 갖춘 적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다.
데니스는 전투 중 민가로 도주해 군복을 버리고 숨었으며, 승리한 오닐의 군대는 다시 배를 타고 뉴욕 주로 되돌아 가 버펄로에서 미 해군에게 투항한다. 이들은 별 처벌 없이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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