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갤러리카페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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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9-10 19:57:09 KST | 조회 | 937 |
제목 |
꺼라위키역사글 vs 디시위키 역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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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페이지 나오는 다른 의견글임
꺼라위키글
디시위키글
꺼라위키에선 대원군 때가 조선의 위기이자 기회였다고 적혀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철종때쯤부터 조선의 근대화는 한참 때를 놓친 후라고 보면 된다. 약... 영, 정조때쯔음은 했어야 된다 본다. 대원군 때 문호개방은 이미 현실성 없는 개소리였다는 뜻이다.
가끔 똥양뽕 맞은 병신들이 서양이 동양을 따라잡은 건 산업화 시기라고 지껄이는데 제1차 산업 혁명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산업혁명은 동서양 격차를 존나 늘린 사건이지 따라잡은 사건이 아니다. 서양은 15세기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가 온 순간부터 동양을 따라잡은 거나 다름없다.
그때 동양은 뭐 했냐고? 다들 쇄국 정책을 펴고 있었다. 명나라는 마카오만 포르투갈에게만 개방했고 청나라 때는 대만에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를 밀어버렸다. 일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와만 제한적으로 교류했다. 그럼 조선은? 하멜이 제주도에서 기술 쪼금 가르쳐주고 간 게 다이다.
어쨌든 일본은 쇄국을 기조로 하긴 했어도 제한적으로나마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끝에 문화가 상당히 융성해졌고 이는 메이지 유신 때 큰 메리트로 작용한다. 하지만 조선은 서양 무역선이 1797년부터 들락날락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80년 간 나라의 문을 걸어잠궜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해봤자 한참 늦었다. 그냥 나라 문 열고 정치체제 좀 바꾼다고 근대화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렇다고 조선이 서양의 존재를 몰랐느냐, 그것도 아니다. 유럽의 존재는 고려시대부터 알려져 있었고 포르투갈의 경우 16세기 초, 영국과 네덜란드 등은 16세기 후반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지봉유설과 광해군일기에는 16세기 후반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로 추정되는 잉글랜드 해적이 조선에서 깽판을 부렸다는 기록도 있고.
걍 성리학이 문제였다. 차라리 하멜 때라도 최대한 조선을 어필시켜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명분론과 규율 때문에 옛날 이야기로 남아버렸고, 결국 수백년의 기회를 못 잡은 조선은 개혁이고 뭐고 처참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단순히 흥선이 병신 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란 것.
일반적으로는 대원군이 단순 유교탈레반새끼라고만 알고 있는데 오히려 당시 기준으로는 상황 판단 제일 잘했던 너구리새끼인 게 팩트다.
쇄국? 요즘 민비 미화하느라 쇄국이 무작정 잘못한 거라 가르치는 거지 당시 기준으로는 세종대왕이나 갓카가 갔어도 무조건 쇄국했을 것다.
과연 대원군이 외국의 선진문물의 가치를 몰랐을까? 전혀 아니다. 그 증거로 흥선의 사진이 남아있다. 당장 얘가 뼛속까지 외국 문물을 반대했다면 사진을 찍었을까? 사진 찍는 양놈의 모가지를 땄겠지.
오히려 외국 선진문물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만약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당시에 쇄국 왜 했냐는 질문은 지금 왜 통일 안하느냐는 질문과 동급으로 철없는 질문이다.
지금당장 통일하면 나라 망하는 게 현실이듯, 그 당시에 완전 문호개방했으면 나라 쳐망하는 게 씹팩트였다.
좆본의 개방과 비교하는 새끼들이 있는데, 당시 조선과 일본의 토종 상공업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오로지 농업 몰빵이었던 좆선과는 달리 갓본은 에도시대 때 토종 상공업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유럽에 자포네스크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래서 일본은 개방해도 유럽과의 무역에서 그렇게 신문물이 쏟아져 수입돼도 일방적으로 손해는 안 보고 그나마 국부를 지켜내는 게 가능해서 안정적인 근대화가 가능했던 거다.
반면에 조선은? 개방하는 순간 그대로 일방적인 딜교로 유럽 신문물 쏟아져 나와서 나라 안의 돈이 외국으로 다 흘러들어가 바로 국가단위로 파산해서 식민지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어디가 더 맞게 잘쓴거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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