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사채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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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1-04 22:07:30 KST | 조회 | 843 |
제목 |
TRPG) 단편소설 '그루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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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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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우! 좀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 여우인간 녀석아! 아무리 잠이 좋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못난이 술레이만의 고함이 대낮부터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뭐 정확히는, 대낮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지만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야영지를 떠난 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걸 보니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오래 자긴 한 모양이군요.
“하우움~ 그래, 어디까지 온 거야?”
“곧 샌드타운이야! 거의 다 왔지만,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타운으로 가는 다리를 서둘러서 건너야 하니까, 그만 쳐자고 도적 떼 놈들이랑 싸울 준비나 좀 해두라고!”
또다시 술레이만의 목소리가 내 귀를 아프게 만듭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술레이만은 항상 저렇습니다. 그렇게까지 큰 문제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소리 지르고, 서두르라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그는 수송 차량 뒤쪽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후열에 있는 캐러밴 행렬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서두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술레이만의 옆에 있던 엘프 소서러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잘나고 고귀하신 엘프들은 어디 숲에서 쳐박혀 있는 일이 많아서, 이런 식으로 사막에서 엘프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여기 계신 엘프께선 이번 캐러밴의 VIP 멤버이기도 한 만큼, 조심히 모셔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거요? 몇 번 정도 캐러밴을 덮치는 사막의 야수들이 나타난 건 이해하지만, 도적 떼와 싸운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이번 행렬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소?”
아차, 잘 생각해보니 제가 출발 전 엘프 형님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게 조금 엉성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캐러밴 여행이라는 건 사막의 도적 떼와 한바탕 싸우겠다는 거랑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보니, 설명을 생략하고 만 거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일상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술레이만은 그 엘프를 뻔히 바라보다가, 제 쪽을 보곤 쯧 하며 혀를 찼습니다. 미안해, 짜식아.
“우리가 어느 길로 가든 꼭 지나가야 하는 다리가 있는데, 그게 도적 떼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보니, 여기만 노리고 습격하는 놈들이 있어 전투가 불가피하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이전에 활개 치던 도적 떼 두목이 죽은 이후로, 도적놈들은 더는 위협적인 놈들이 아니오. 이번처럼 대비만 잘하면 문제 될 거 없소.”
“그런 사실을 이제야 알려주다니! 나는 아주 중요한! 물건을 옮기고 있단 말이오. 천박한 도적놈들이 그걸 손에 넣기라도 하는 순간… 으으, 재앙이나 다름없어! 어떻게든 그 다리를 우회할 수는 없는 거요?”
그 엘프가 우회란 말을 꺼낸 순간, 저와 술레이만은 서로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야 그럴 것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저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우회로로 갔다가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내리쬐는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쌀쌀함이 감돌 정도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술레이만은 평소 저를 향해 소리 지르던 목소리와 다르게, 깐깐한 상인들과 흥정할 때 같은 정중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엘프 친구. 너무 나쁘게 생각 말아주셨으면 하오. 물론 바위산 하나를 끼고 돌아가는 다른 길이 있긴 하오. 워낙 척박한 곳이라 도적들도 그곳은 가지 않지.”
“그럼 왜 그 길로 가지 않소? 이번 여정에선 되도록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고 싶소만.”
술레이만이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제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저 칙칙한 외모의 수염 난 아저씨보단 귀여운 제가 설득을 시도하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요.
“왜냐면… 그곳엔 그루츠랑이 있기 때문이죠!”
제가 그렇게 말하며 캐러밴 수송차 안에서 튀어나오자, 그 엘프는 저를 하찮은 것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습니다.
“그루츠랑? 그건 또 뭐요?”
“코끼리랑 뱀이 합쳐진 듯한 외모를 한 무시무시한 괴물이죠. 으으, 생각만 해도..”
“하! 그런 괴물은 들어본 적 없소. 어디서 거짓 소문을 들은 것은 아니오?”
그 엘프는 물론이고, 저희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캐러밴 멤버들마저 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 거만한 엘프에게 무언가 한마디 해주려는 차에, 웬일로 술레이만 녀석이 저를 옹?호하는듯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코끼리 뱀이라니, 물론 나도 그런 괴물은 안 믿소. 하지만 우리가 지나는 이 루트가 아닌, 그 바위산을 경유하는 루트로 갔다가 돌아온 놈들이 수십 년간 한 놈도 없었소. 생각해 보시오, 엘프 친구. 괴물이 있든 없든, 원인이 뭐든, 그런 위험한 루트로 가야 할 이유가 없소. 차라리 대처 가능한 도적 떼가 낫지 않겠소?”
“뭐,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긴 하다만..”
그 엘프는 더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고민할 것도 없겠다, 술레이만은 예정대로 캐러밴의 행진 속도를 높여나갔습니다. 저도 과거 여우도적단 시절부터 자주 사용하던 전용 단검을 꺼내 손질하며, 도적 떼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뭐- 사실 이해합니다. 그런 요상한 괴물 이야기 따위 가짜라고 믿고 싶어지겠죠. 들어본 적도 없는 걸 갑자기 믿으라고 하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잖아요.
하지만 전, 어릴 적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준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 우회 루트에 있는 엘바하 산으로 모험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여정이 어떻게 참혹하게 끝났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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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모님은 제가 태어나자마자 전쟁에 휘말려 고인이 되어버렸기에, 전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대신해서 저를 키워주셨던 조부모님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죠. 지금은 두 분 다 제 곁을 떠나긴 했지만, 어릴 적 제가 잠자리에 들 때마다 두 분께서는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경쟁하곤 했습니다. 두 분 다 젊은 시절엔 잘나가는 모험가였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는 차고 넘칠 정도였지요.
정말이지 재미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넓은 바다를 작은 배 한 척 만으로 항해했던 이야기, 거대한 용을 만난 이야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들이 가득하던 마을 이야기, 그리고 무시무시한 오크와 홀로 결투를 해야만 했던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어렸던 제가 모험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지금 제가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는 일거리 선별자 일을 하게 된 것에 그분들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하지만, 어릴 적의 저는 동화만 들으면서 얌전히 지냈던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사고뭉치 하우는 아마 제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인 꼬맹이였을 겁니다. 하루는 제가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곳에 들어간 나머지, 할머니께서 매우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좋아했던 사막사과 주스를 금지당할 정도였죠.
그날 제가 사고를 친 것 때문인지, 항상 인자한 태도로 즐겁고 재미난 이야기만 해주시던 할아버지마저도 평소와는 달리 조금 엄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공포스러운 그루츠랑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우야.”
“뭐에요 할아버지, 저는 그냥 잘 거예요.”
“할머니가 많이 화가 나셨단다. 사과할 생각은 없니?”
“됐어요. 맨날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저도 무언가 모험을 떠나고 싶다구요,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요! 전 용의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정작 직접 본 적도 타본 적도 없어요. 저도 그런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그래그래,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 이해하고 말고, 음.”
“할아버지는… 화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그… 위험하니까 들어가지 말라는 동굴에 들어갔는데.”
“뭐, 실은 그 동굴은 위험해서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란다. 너 같은 쪼그만 사고뭉치들이 중요한 물건을 빼 갈까 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거지. 하지만 하우야.”
저는 평소에 인자하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바뀌는 걸 느꼈습니다.
“세상엔 정말로 하지 말라는 걸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단다. 잠자기 전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렴.”
“오늘은 뭔데요? 추운 산에서 커다란 거인 만난 이야기요? 아님, 또 불꽃이 터지는 술 마신 이야기?”
“우리가 매일 보는 사막의 이야기지.”
“매일 보는 사막이요? 여기에 무슨 재미가 있다고요.”
“너는 사막을 그냥 지루하고, 덥기만 한 곳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 사막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곳이란다. 우리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생물이 가득해.”
“저도 알아요! 커~다란 사막 벌레인가 뭔가. 다 잡아먹는다면서요.”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내가 만난 건, 훨씬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단다.”
“대체 뭐였는데요? 제가 본 것 중에 제일 무서운 건, 걸어 다니면서 사람에게 바늘을 쏘는 선인장이었는데.”
“자, 하우야. 잘 들어보렴.”
할아버지는 의자를 당겨 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선,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모험은 원래 재밌지만, 동시에 위험이 가득하단다. 이 할아버지도 어릴 적엔, 너처럼 공포심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 위험을 이겨내고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이, 모험이 가장 재밌어지는 때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중앙 사막은 넓고 위험한 곳이야. 그러니, 젊을 때의 할아버지는 사막에서 가장 즐거운 모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어. 어리석었던 나는 몇몇 모험가들과 함께, 사막에 있는 한 바위산으로 향한 적이 있단다. 그 산 이름이, 어디 보자… 뭐였더라?”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엔 자신의 책을 뒤적거렸습니다.
“그래, 그래! 엘바하 산이었어. 음. 나와 다른 모험가들은 그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보물을 찾아, 산속 아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지. 그렇지만 보물은커녕, 그 산의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존재와 마주치고 말았단다.”
“공포 그 자체가 현신한 것 같은, 그루츠랑이라는 존재를 말이야..”
그렇게 할아버지께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즐겁고 경쾌한 이야기가 아닌 무서운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무섭고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긴장한 채 잠자리에 얌전히 누워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렴, 하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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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어릴 적, 중앙 사막에 있는 바위산인 엘바하 산으로 모험을 떠난 적이 있단다. 이유는.. 단순했단다. 대부분의 모험가가 목표로 삼는 거지. 희귀한 보물 말이야. 그때도 모험의 이유는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단다.
아무튼, 할아버지의 모험 멤버는 다음과 같았어.
-여우인간 로그, 하빈. 할아버지란다. 그때의 난 너처럼 아주 활기찼지.
-오크 용병 바바리안, 우르크. 이 도끼 든 흉포한 놈이 어쩌다 꼈는지 모르겠구나.
-인간 남자 클레릭, 아슈트로. 실력은 괜찮은데 겁쟁이였단다.
-인간 여자 위저드, 멜린드. 잘난 척하는 거에 비하면, 실력은 그저 그랬지.
-인간 용병 파이터. 이름 모름. 과묵한 검사. 어디 북부 출신이었다고 했는데.
-그리고 사막 길잡이 하나. 야흐트. 다고시안 출신 인간. 비겁한 놈이었단다.
조합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합이 전혀 안 맞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지. 돈이나 재화에만 눈이 멀어 뭉치면 이렇게 된단다.
다행히, 제각각의 실력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그렇지 않았으면 애초에 사막을 건너는 것조차 못 했겠지.
길잡이인 야흐트가 성격은 별로였지만 길은 잘 찾아서, 우리 멤버는 어찌어찌 엘바하 산에 무사히 도착했단다. 그래도 이 산의 험난한 지형과 위협적인 생물들 때문에, 하루 만에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 나는 멤버들과 함께 산 중턱쯤에서 야영을 시작했단다.
“야흐트! 네가 말했던 보물이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하겠지? 만약 거짓이면..”
오크 용병인 우르크 녀석은 힘 하나는 믿음직했지만, 난 그가 여정 내내 툴툴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게다가, 오크는 냄새도 영 별로거든.
“이봐이봐, 우르크! 날 못 믿는 거야? 확실하다니까. 그 동굴 안에는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어. 왕가 쪽에서 들은 소문이니까 확실해.”
“그래서, 그 보물이 무엇이라고?”
위저드인 멜린드, 그녀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지.
“정확히는 ‘아흐마다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야. 듣자 하니, 사막의 모래바람을 부릴 수 있게 된다고 하더군. 어쩌다 그런 물건이 이런 산 깊숙한 곳에 묻혀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야흐트의 대답에 멜린드의 표정이 더욱 탐욕스럽게 변했단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그랬지. 그 정도의 힘을 지닌 물건이면, 혼자 사용하든 어딘가에 팔아치우든, 엄청난 가치가 있었을 테니까.
“물론 그 지팡이 말고도, 귀한 보물이나 보석 등이 잔뜩 묻혀있다는 소문이야.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진 몰라도, 어떤 겁쟁이 부자 녀석이 자기 재물을 들고 동굴로 숨어 들어갔다가, 사고나 맹수 때문에 죽어 버린 거겠지 뭐.”
이 세상에 떠다니는 소문은 정말 수도 없이 많단다. 하지만 그중에 가치 있는 소문만을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리고, 그 가치 있는 소문 중에서 100% 진실만이 담긴 소문을 찾아내는 건 더 어려운 일이고.
야흐트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단다. 왜 그런 귀중한 보물이 가득한 동굴에,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를 말이야. 보물이 가득하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듣고, 거기에 눈이 멀어 뒷생각도 없이 모험가들을 고용한 거야.
그리고 그 당시의 나 역시,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깨달을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진 않았단다.
“좋아요. 그럼, 그 동굴에서 손에 넣은 걸 죄다 팔아서, 다 함께 똑같이 나눠 갖는 겁니다. 그게 계약이니까요. 맞죠?”
내 한 마디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어. 하지만 그 중엔 다른 생각을 하는 멤버도 있었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직 알 수가 없었지.
“그럼 여러분, 서둘러서 잠자리에 듭시다. 임시로 만든 야영지라 영 불편하긴 하지만.. 내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자, 그럼..”
클레릭인 아슈트로가 그렇게 말하며 모닥불에 축복을 걸었어. 불길이 더욱 커지며 따듯한 온기로 우리를 감싸자,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더구나. 다들 사막 횡단으로 인한 피로로 쓰러지려 하는 와중에, 파이터 용병 친구만이 말없이 일어서서는 스스로 불침번을 자처했단다.
“산은 위험하다. 누군가는 망을 봐야 한다. 내가 먼저 하지.”
우리는 대충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나자,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어. 사막을 건너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보니, 불편한 야영지였음에도 다들 순식간에 곯아떨어졌지.
이 할아버지 역시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단다.
깨어나 보니 불침번을 시작했던 파이터 친구가 복부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단다. 무언가 야수가 크게 할퀸 듯한 상처였지. 아슈트로가 급하게 클레릭의 치유 주문을 걸고 있더군.
“어떻게 된 겁니까? 습격인가요?!”
내가 다급히 물어보자 그 파이터는 말없이 옆에 쓰러져 있는 야수를 가리키더구나.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새까만 털을 가진 맹수인 사막늑대였어. 놈은 파이터가 가지고 있던 검에 복부를 찔려 죽어가며 꿈틀대고 있었지. 반면에 파이터 친구는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있더군.
“쉿. 한 마리가 아니다.”
나는 급하게 무기를 꺼내 주변을 둘러보았고, 무언가 잔뜩 기척을 느꼈단다. 이것이 이 산에 숨겨진 위험이로구나!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단다.
“불꽃이 필요해요! 그 여자 위저드는 어디 갔습니까?”
“도망쳤다. 그 여자 차례가 되어서 깨우려 했는데, 이 늑대들이 습격해왔다. 나는 그 여자에게 늑대가 달려들기에, 대신 공격을 맞아주다 그만…”
아슈트로의 치유가 어느 정도 통했는지, 다행히도 용병의 피가 멎어 있더구나.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 하나에 멤버 하나는 이탈, 주변엔 야수 떼가 가득. 그야말로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단다.
“흥! 기껏해야 늑대 놈들 아닌가! 사막 하이에나 정도의 위협밖엔 안 되는데!”
우르크는 그렇게 말하며, 바바리안답게 고함을 쳐 늑대들의 시선을 끌어 도발했단다. 내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 막대기에 불을 피워 던지자, 그 야수 놈들의 매서운 눈길이 달빛 아래 잔뜩 번뜩이는 게 보였어. 놈들의 수를 알고 나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단다.
“이봐! 나, 나를 지키는 걸 잊지 말라고, 알겠어? 내가 없으면 보물의 위치고 뭐고…”
길잡이 야흐트는 싸울 줄도 모르니, 겁에 질린 채 당장이라도 도망칠 기세였단다. 놈의 말이 사실이긴 했지만, 솔직히 두 번 다시 같이 일하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단다.
“쫄지 마라. 늑대들은 약해 보이면 공격해 온다. 우리가 더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 파이터 용병은 그렇게 말하며, 땅바닥에서 적당한 돌을 잡아 늑대에게 던졌어. 상처를 입었음에도 어찌나 힘이 좋았는지, 돌팔매질 한 번에 늑대 하나가 비명소리를 내며 쓰러졌단다. 그와 함께, 우르크가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들고 돌진했어.
한밤중에 목숨을 건 혈투가 시작됐고, 나도 정신없이 늑대 떼를 피하며 불붙은 막대기와 단검으로 놈들에게 맞섰단다. 사막늑대 한 마리의 목을 꿰뚫고 나면, 두 마리가 달려들기에 다급히 피하고… 날 포위하는 놈들이 너무 많으면, 불을 질러 내쫓기도 하고… 도와달라는 길잡이 녀석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당장 내 눈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기에 급급했지.
용감한 파이터는 다친 몸을 이끌고도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단다. 우르크는 늑대가 몇 마리가 달려들던 늑대보다 더한 광기로 몇 마리씩 적을 찢어나갔지. 아슈트로는 급하게 기도를 외우더니, 우리에게 보호막 같은 걸 씌우더구나.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고 얼마가 지났을까. 몇 번쯤 죽을 뻔했지만 결국 싸움은 우리 멤버의 승리로 끝이 났고, 유난히 밝았던 달빛 아래엔 사막늑대의 시체만이 가득했단다.
“별거 아니군.”
우루크는 그렇게 말하며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았어. 그의 몸에도 상처가 조금씩 나 있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구나. 오크는 치유력이 강하다나 뭐라나.
“주, 죽을 뻔했네.”
클레릭인 아슈트로마저도 약간의 상처를 입은 와중에, 길잡이 야흐트 녀석만큼은 용케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더구나. 그놈은 겁나서 덜덜 떨던 모습을 보여주던 때는 언제고, 이번엔 늑대 모피를 조금이라도 뜯어먹으려고 시체를 손질하고 있었단다.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사막늑대들이 흉포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목숨 걸고 달려들진 않습니다. 대부분은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나 덩치가 작은 동물을 노리는 일이 더 많지요.”
아슈트로가 그렇게 말하며 늑대의 사체를 보고 있더구나. 나도 궁금증이 도져서, 내 단검으로 목을 꿰뚫었던 늑대의 모습을 세심히 둘러보기로 했지. 그러다 깨달은 건, 이 늑대들이 하나같이 오래 굶주린 것 마냥 말라 있다는 거였어. 파이터 친구 또한 늑대들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있더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사막, 특히 바위산이 척박하다곤 하지만 이 정도로 굶주린 놈들은 처음 본다.”
“나도 모르는 일이야. 그냥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터를 잘못 잡은 걸지도 모르지, 에잇, 멍청한 것들.”
나는 늑대들의 시체를 보며 의문이 가득해졌지만, 야흐트는 늑대 가죽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더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냥 늑대 가죽만 챙기고 모험을 끝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나.
한밤중의 습격에 의문은 남았지만, 우린 해가 뜨자 다시 여정길에 오르기로 했단다. 무엇보다 멤버 한 명이 없어지기도 했으니, 찾을지 말지도 고민해야 했지. 우르크는 사라진 멤버가 있던 자리에 침을 뱉으며 도망친 겁쟁이 따윈 버리고 가자고 했어.
“그런 겁쟁이 여자를 왜 걱정하지? 어차피 찾아낸다 해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혹시 보물상자에 마법으로밖에 풀지 못하는 봉인이 걸려있거나 한다면, 마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요! 그리고 우리 중 그런 사람은- 사라진 멜린드 양 밖에 없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우르크는 흥, 소리만 내며 반박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아슈트로가 멜린드가 남기고 간 짐을 살펴보며 물었지.
“문제는,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방법이 있나요?”
“글쎄, 나는 어디까지나 길잡이지 레인저 같은 전문 추적꾼이 아니다 보니… 에잉, 이럴 줄 알았으면 로그가 아니라 레인저 쪽을 데려올 걸 그랬나.”
나는 야흐트의 그 한 마디가 불쾌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단다. 이런 짜증 나는 놈들은 나중에 귀중품을 슬쩍해서 골탕 먹이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거든.
아무튼 우리 파티에 당면한 문제는, 그 위저드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는 거였지. 그래도 이 할아버지가 도망치는 거 하나는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을 내렸단다.
“제가 도망친다면 산 아래로 갔겠지요. 그편이 더 안전할 테니까. 그러니 아마 멜린드 양도..”
“끄응.. 우리가 가진 식량엔 한계가 있어. 여자 하나 찾는다고 뒤돌아서 산 밑으로 내려갔다가는, 우리도 저 늑대처럼 쫄쫄 굶는 신세가 될 거라고. 이해했나?”
“그럼 결정이 났군.”
파이터가 그렇게 말하자, 모험가 전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기껏해야 며칠 정도 함께한 사이였으니, 딱히 갑자기 없어져도 안타까워할 일이 없었지. 우르크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단다.
결국 멤버 하나가 빠진 채, 다시 야흐트의 안내에 따라 산 깊숙한 곳으로 향했단다.
“정말이지 험난한 곳이군.”
우르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체력 하나는 대단한 오크답게 재빠르게도 바위산을 오르더구나. 파이터 친구도 오크에 뒤지지 않는 속도였고, 나는 중간에서 느려터진 클레릭과 길잡이가 늦춰지지 않게 보조해 주느라 바빴단다. 야흐트는 쓸데없이 많은 짐을 들고 있어서, 한참을 헐떡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었지.
“헉… 헉… 거의 다 왔을 거야. 입구 윗부분에 용이 할퀸 듯한 자국이 있는 동굴이 있을 건데, 그게 목표인 동굴이니까 잘 찾아봐!”
얼마쯤 지났을까, 우리는 야흐트가 말한 동굴 앞에 도착했단다. 말 그대로 괴상한 흉터가 난 듯한 입구가 있는 동굴이었지. 한참 뒤처져 오는 야흐트를 기다려야 했기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신경 쓸 만한 게 없을까 뒤져보기로 했지. 불길할 만큼 야생동물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동물 사체만이 잔뜩 보였단다.
그러다가 문득, 동굴 입구에서 눈에 띄는 걸 발견했지.
생긴 지 얼마 안 된 발자국이었어. 비록 내가 누군가를 추격하거나 사냥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선명해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단다. 인간 발자국이고, 사이즈로 봐선 여자라고.
“이 발자국 말인데요, 혹시…”
“이런 젠장! 그 위저드 여자가 먼저 온 게 틀림없어!”
야흐트가 허겁지겁 나타나서는 그렇게 외쳤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발자국이 확신할만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
“망할 여자 같으니! 여기 있는 보물인 지팡이를 독차지하려고 도망치는 척하며 먼저 온 거야! 젠장, 서둘러야 해!”
야흐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동굴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먼저 들어가지는 않더구나.
“그, 그러니 보물을 빼앗기기 전에 서둘러서 들어가라는 의미야!”
“알았어요 알았어, 거참.”
우리는 그 동굴에 천천히 발을 들였어. 바깥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지기 시작했지. 횃불을 들고 조금씩 걸어가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사막의 열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으스스한 한기가 온몸을 감싸더구나.
으지직.
그 순간, 어딘가에서 무언가 두꺼운 것이 짓이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단다. 아슈트로가 겁을 먹었는지 그의 지팡이에서 빛나던 빛이 일그러지더구나.
“뭐야- 뭐였죠?!”
“뭔가 있군! 클레릭, 제대로 빛을 비춰!”
우르크가 그렇게 말하며 으르렁거렸어. 소리가 났던 쪽으로 아슈트로가 빛을 비춰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단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으니, 우리는 더욱 긴장한 상태로 조금씩 동굴 안으로 들어갔지. 밖에서 보기엔 좁아 보였던 동굴은 안으로 갈수록 더 넓어졌단다.
“사방에 시체 냄새가 가득하다. 바닥엔 뼛조각들이 굴러다니는군. 여기가 정말로 보물이 있는 장소인가? 오히려, 호랑이의 굴에 가까운 것 같다.”
파이터 친구가 그렇게 묻자, 야흐트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어.
“그, 그래. 틀림없어…! 그, 그치만 이렇게까지 동굴이 넓을 거라곤- 거기다 무언가가-”
“흥! 무언가는 무슨. 어차피 그 마법 쓰는 여자가 여기 숨어있는 게 틀림없어. 어서 나와라!”
우르크가 그렇게 말하며 소리 지르자, 또다시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어.
와그작.
“거기군! 우어어어어!!!”
“자, 잠깐, 기다려요!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말리려 했지만, 우르크는 미치광이처럼 함성을 지르더니 순식간에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단다. 우리도 길을 밝히면서 다급히 그를 쫓아가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나타났어.
아니, 정확히는, ‘그것’의 꼬리였지. 거대한 뱀의 꼬리에 가깝다고나 할까?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사이즈였어. 그 거대한 꼬리는 우리의 시야 밖에서 나타나서는, 우르크를 순식간에 붙잡아갔어.
“그와아아아아!!!”
오크인 우르크는 틀림없이 강한 바바리안이었단다. 웬만한 괴물쯤이야 역으로 그가 붙잡았을 거야. 그런 우르크가 고작 꼬리에 붙잡혀 맥없이 끌려가 버렸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물론이고 나머지 멤버들 모두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
“뭐, 뭐야! 뭐였어, 방금 그건?!”
야흐트는 우르크가 사라진 곳을 그대로 응시하며 잔뜩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단다. 나와 파이터 친구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 아슈트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지팡이를 잡고 덜덜 떨고 있었단다.
그리곤 쿵.쿵. 소리를 내며 거대한 것이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소리가, 컴컴한 동굴 안에 무시무시하게 울려 퍼졌단다. 그와 동시에 우르크의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도 점점 멀어져갔어.
“뭘 하나! 어서 그를 구해야 한다!”
파이터의 말에 이 할아버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나는 파이터와 함께 다급하게 우르크의 비명이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단다. 겁먹은 나머지 두 사람은 억지로 이끌고 갈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동굴이 워낙 넓고 어두운 탓도 있어서, 정확한 방향을 알 수가 없었어. 비명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데, 우린 연약한 두 사람을 데리고 있다 보니 늦춰질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이 할아버지가 화톳불을 들고 앞에 장애물이 없는가 확인하려는 순간-
“-우왓?!”
나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단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라졌던 그 위저드 아가씨였지. 아까까지만 해도 겁먹고 움츠려 있던 야흐트는 그녀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하며 달려들었어.
“이, 이 망할 년, 역시 여기 있었어! 아흐마다의 지팡이를 독점하려-”
“쉿!”
나는 불을 비추고 멜린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어. 그녀도 동굴의 괴물 때문인지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절뚝거리고 있었고,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지.
“제발, 제발 조용히 해…! 그 괴물이 알아챌 거란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두려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단다. 한참 과거 일이니 이젠 진상을 알 순 없지만, 당시의 정황상 야흐트의 주장이 맞았을 것 같구나. 팀 내 유일한 위저드인 그녀는 아흐마다의 지팡이가 탐이 났던 모양이야. 우리랑 동행하던 중 기회가 생기자 슬쩍 빠져나와, 혼자 그 지팡이를 차지하려던 게지. 문제는, 이 동굴에 그녀도 예상 못 한 위협이 있었던 거야. 괴물에게 부상을 입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어.
아무튼 멜린드의 겁먹은 한 마디에 모두가 조용해지자, 파이터가 귀에 겨우 들릴만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어.
“이상하군. 우르크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 외에 아무런 소리도.”
정말이었단다. 여우인간인 나는 다른 녀석들보다 청력이 좋았는데도,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봐도 벌레 기어가는 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어.
그 괴물은 지금 어디 있지? 왜 이리 조용한 걸까? 끌려간 우르크는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이 드는 게 많았지만, 나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단다. 성난 야흐트를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어.
“으으, 이젠 못 참아! 지금 정체불명의 괴물 따위 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보물이나 챙겨서 이 망할 곳을 빠져나가자고! 머저리들이랑 동반 자살할 생각은 없어!”
“미, 미쳤어요?! 뭔지도 모를 괴물이 돌아다니는 곳인데..! 저는 더는 못 가요… 보물이고 뭐고 어서 그냥 나가자고요!”
“무슨 소리인가! 팀원을 두고 도망치는 건 있을 수 없다! 우르크를 구해야 한다.”
“클레릭! 그 괴물 놈이 다시 오기 전에 어서 내 다리나 좀 치료해 줘!”
“헛소리하지 마, 멜린드! 너는 우리 멤버에서 퇴출이야! 클레릭한테 치료를 받고 싶으면 나한테 돈을 내고 허락받으라고!”
이런 위급한 상황에, 다들 자기주장을 하느라 바빴지. 괴물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보물을 가지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들의 말싸움을 지켜봐야 했단다. 뭐라도 해야 한다 싶어, 입을 떼려는 그 순간-
그워어어어어-!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 동굴에 가득 찰 정도의 거대한 덩치. 그야말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수가 나타나 우리를 덮쳐왔단다. 그 크기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다가와선, 파이터 친구를 집어삼키려 했지.
다행히 파이터 친구는 지난밤 부상 입은 몸임에도, 재빠르게 그 괴수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었어. 순식간에 괴물의 큰 덩치에 짓밟힐 뻔한 그였지만, 간발의 차로 피하곤 검을 치켜세웠단다.
“으, 으아아아아-!!!”
파이터를 빼곤 다들 패닉에 빠져,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어.
아슈트로는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 위저드인 멜린드는 주문을 외우긴 커녕 다친 다리를 끌고 낑낑대며 빠져나가려 했고, 교활한 야흐트는 어느새인가 혼자 사라져버렸지.
할아버지 말이냐? 할아버지도 별 차이는 없었단다. 손에 단검을 쥐고는 있었지만, 그야말로 드래곤 앞에서 꼬마아이가 장난감 칼을 들고 있는 꼴이었지.
나는 그날 똑똑히 보았단다 하우야. 그 괴물, 그루츠랑의 모습을…
놈은 분명 코끼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 긴 코와 함께 엄청난 상아가 돋아나 있었지. 하지만 입안은 용의 것과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있고, 바실리스크와 같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어. 눈은 이글거리는 악마의 눈을 닮아있었고, 그 눈으로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고르듯이 우리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단다. 그놈의 팔다리는 어떤 기둥보다도 두꺼워 보였고, 거대한 몸통 뒤로는- 수많은 가시가 달린 육중한 뱀의 꼬리가 흐느적대고 있었어.
그리고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재빠르게 다가와선, 순식간에 꼬리로 파이터를 날려버렸단다. 그는 방패를 치켜세웠지만 그대로 동굴 벽으로 나가떨어졌어.
모험에선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좌우하곤 하지. 우르크도 사라진 지금, 우리 팀에서 가장 강한 건 그 파이터였어. 만일 그가 죽으면 우리는 그대로 끝이었지.
때문에-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는 몰라도, 나는 최대한 사거리 밖에서 그루츠랑의 눈을 향해 단검을 던지며 주의를 끌었어.
“아슈트로! 그를.. 그를 치유해요! 빨리!”
“우오오오오!!”
파이터는 있는 힘껏 용기를 쥐어짜 검과 방패를 들고 그 괴물에 맞서 싸웠어. 그런 강함을 가지고도 그 괴물 앞에서는 밀리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런 용감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정말이지 지금도 영광스럽게 느껴진단다.
하지만, 용감함이 뭐든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 용맹한 파이터를 치유해야 할 아슈트로는 우릴 돕기는커녕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단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 몇 번을 외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니. 그곳은 신의 성지가 아닌, 그저 잔뜩 굶주린 야수의 집이었어. 우리는 겁을 상실한 침입자였고.
클레릭이 맨정신으로 치유하지 못하면, 용감한 파이터도 결국 한계가 드러나는 법이었단다. 심지어 밤에는 늑대에게 상처까지 입었었고-
나는 뭐라도 해보려고 단검에 독을 발랐단다. 아무리 덩치 큰 놈이라도 쓰러질 만한 치사량의 독을 말이야. 그루츠랑이 파이터에게 정신이 팔린 순간, 가지고 있는 폭죽을 사방에 던져 그놈의 정신을 빼놓으며, 최대한 약해 보이는 부위에 다가갔어.
“아슈트로!! 제발! 빨리 정신 차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놈의 다리 밑 부분에 재빨리 다가가, 맹독이 담긴 단검을 꽂아 넣었단다!
그어어어어어-!!!!!!
그와 함께 동굴 안에 놈의 비명이 울려 퍼졌어.
독이 통했을까? 통한다 해도 얼마나 걸릴까?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로그라면, 다음 수를 위해 그런 것들을 고려해야 하지. 하지만 그 순간의 난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단다. 왜냐하면, 단검을 꽂자마자 날아 들어온 놈의 꼬리에 제대로 한 방 얻어맞고 그대로 동굴 벽에 꽂혀버렸단다.
쿵.
순식간에 일어난 충격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자, 내 눈앞에는 놈의 무시무시한 두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어. 놈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어.
쿵, 쿵.
나는-
그 순간 죽음이 뭔지 느꼈단다. 전신이 움직이지 않았어. 통증을 느껴야 할 내 몸은 감각이 마비된 채, 다가오는 공포에 얼어붙었어. 그 짧은 순간에 온갖 감정을 느꼈단다. 내 과거. 가족. 사랑. 후회. 그 밖의 것들까지.
놈의 거대한 입이 쩍 하고 벌려지는 순간, 나는 공포감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눈을 감았어. 뾰족한 가시가 돋은 그놈의 기다란 혀가 내 얼굴을 핥아대는데, 난 그저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내 앞의 사신이 목숨을 앗아가려는 순간-
“우어어어어-!!!”
피투성이가 된 파이터가 달려들어 오더니, 그루츠랑 녀석의 몸통에 검을 찔러넣었어. 남아있는 방패로는 놈을 마구 밀치며, 나에게서 최대한 벗어나게 하려 했지.
“하빈! 어서 도망쳐라. 어서!”
그의 한 마디에 나는 온몸에 다시 감각이 돌아왔어. 그와 동시에, 벽에 내리 꽂힌 충격 때문인지 고통스러운 통증이 전신에 퍼졌어. 하지만 괴로워할 틈도 없이 서둘러 움직여야 했지. 그루츠랑은 우리에게 몇 번이나 공격을 당했었지만, 지친 모습 하나 없이 길다란 코를 휘둘러대며 파이터를 바닥으로 몰아세웠어.
“크으으으윽!”
그르르…
“파이터님!”
“어서 가라! 어ㅅ-”
쿵! 으지직…
용맹한 파이터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말을 외치기도 전에, 그루츠랑은 두꺼운 앞발로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으깨버렸단다…
“아, 아아…”
나는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이제 남은 건 고작해야 잔뜩 겁먹은 세 명. 하지만 살기 위해선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어. 나는 그나마 가까이에 있던 클레릭 아슈트로를 붙잡고 가진 연막탄을 모조리 그루츠랑에게 던졌어.
구어어어어어—!!
연기가 자욱해지고, 놈의 성난 울음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어. 놈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아채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보이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어. 나는 계속해서 기도를 외치는 아슈트로를 질질 끌면서, 벽을 짚고 최대한 자리를 벗어나려 애썼어.
“오, 오지 마, 오지 마!! 아아아…!”
내 뒤로 위저드인 멜린드의 비명소리가 들렸어. 하지만 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고, 구해줄 방법도 없었지.
“아아아아악!! 우우우읍- 우으읍-”
살기 위해 쓴 연막탄이지만, 그로 인해 소리만 들리는 건 역으로 공포 그 자체였단다. 그녀의 비명소리가 어디 좁은 곳에 갇힌 것처럼 바뀌었던 걸 보아- 그 괴물 녀석이 그녀를 상반신부터 통째로 집어삼켰던 게 틀림없었어.
오, 미안하구나 하우야. 너무 묘사가 적나라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건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아무튼, 나는 그 이기적인 위저드의 비명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들으며, 동굴 어딘가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밖으로 가는 길인지, 아님 심연 속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도 알 수 없이 말이야.
하지만, 내 필사적인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단다.
쿠궁, 쿠궁, 쿠궁-!
놈이 쫓아오고 있구나. 거대한 발소리와 함께.
나는 그루츠랑의 발소리가 커질 때마다 내 심장 소리도 커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이대로는 더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아슈트로에게 소리쳤어.
“망할 클레릭!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여기에 신 같은 건 없다고요! 그러니 빨리- 아, 아아…!”
또다시- 놈의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혀를 날름대며 누구인지 모를 무언가를 으드득 으드득 씹고 있었지. 하지만 놈의 허기는 전혀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 이대론 끝이다 싶어, 아슈트로를 포기하고 혼자 도망치려던 순간, 그는 필사적으로 신에게 애원하며 기도했어.
“신이시여- 아, 신이시여! 저,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구원해 주십시오!!”
기적이 통한 걸까? 아슈트로의 지팡이는 찬란한 빛을 내며 그루츠랑을 막을 신성 보호막을 만들어냈어. 그러나-
“흐아아아악-!”
놈의 흉측한 상아가, 보호막째로 아슈트로의 배를 꿰뚫었어. 그 가엾은 클레릭의 피가 분수처럼 등 뒤로 뿜어져 나왔고, 그루츠랑의 무시무시한 콧김이 나에게까지 느껴졌지.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단다. 나는 완전히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그저 멀리,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이젠 곁에 남아있는 사람도 없으니, 홀로 젖먹던 힘을 다해 어딘가로 달려 나갔어. 그 악마 같은 눈동자를 피하고 싶어서…
달리고 또 달리다, 더는 걸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나는 상당한 양의 황금이 있는 방을 발견했단다. 그리고 거기엔- 탐욕스러운 표정을 한 야흐트가 있었어. 그는 방에 쌓여있는 재화들을 커다란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
“뭐야, 살아있었나? 뭐 좋아. 서두르라고, 여기 있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서 튀어야 하니까!”
나도 원래라면 그런 보물들에 환장하니까, 그를 돕기 바빴을 거야.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루츠랑의 공포를 눈앞에서 실감했으니, 보물들에 눈 돌아갈 틈이 없었단다.
“야흐트!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다, 다 죽었어요! 전부 다! 그 커다란 괴물 녀석한테!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한다고요!”
“거참, 여기 온 목적을 잊었어? 이 정도 보물이면 당연히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다 죽었으면 오히려 더 챙겨야지! 그래야 본전이라도 챙길 거 아니냐!”
나는 빨리 빠져나가거나 숨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황금 더미에 매료된 지 오래였단다. 아무리 재화가 많다 한들,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거늘…
쿵.
“아… 아아…”
그흐으으….그흐아아아….
“와, 왔어요, 야흐트..! 놈이에요..! 발각되기 전에 빨리 숨어야 해요! 어딘가의 틈이라도 찾아서…”
“제, 젠장.. 놈을 달고 오면 어쩌잔 거야! 지금까지 아주 좋았는데…!”
“망할! 어서 숨기나 해요! 구멍이든 뭐든 찾아봐요!”
황금이 가득한 방에는 다행히 좁은 틈이 있었어. 우리 둘은 비교적 체구가 작은 편에 속해서, 들어가서 숨어 있을 수 있었지. 야흐트가 좁다고 툴툴대긴 했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숨죽인 채 그루츠랑 녀석이 우릴 포기하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지.
쿵.
제발 돌아가라.
쿵.
제발.
그르르르…
나는 덜덜 떨며 한쪽 눈을 뜨고 틈 밖을 슬쩍 보았어. 놈이 우리가 있었던 걸 냄새로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성난 목소리로 황금이 쌓여있는 방을 뒤지더구나.
쾅!
그루츠랑은 우리가 보이지 않자 크게 열이라도 받은 건지, 계속해서 꼬리로 벽과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어. 나는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숨죽인 채 속으로만 비명을 질러야 했지. 그런데 그 순간… 동굴이 흔들리는 충격으로, 야흐트가 가지고 있던 보물 주머니에서 황금 동전 하나가 뚝 떨어졌어. 그리고..
땡그르르…! 툭.
동전은 순식간에 큰 소리를 내며 좁은 틈 밖으로 굴러떨어졌어.
망했다.
나는 순식간에 내 운명을 직감했어. 망할 길잡이 놈이 욕심만 덜 부렸어도… 영리한 그놈은 재빨리 우리가 있는 좁은 틈을 알아채고는, 그 흉측한 눈빛으로 틈 사이를 들여다보았어.
그놈에게 표정이란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흉악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지.
악마! 놈은 악마 그 자체였어..
“젠장! 그, 그래도 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겠지, 어? 그러니-”
쾅!!
“으아아악!!”
엄청난 충격과 함께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어. 놈이 우리가 있는 쪽의 동굴 벽을 들이박고 있던 거야. 나와 야흐트는 잔뜩 겁먹은 채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쾅!!!
“젠장! 대체 뭐야 저놈은! 어째서 하필 저런 놈이 여기에… 나, 나는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이 정도의 보물이면 다고시안에서-”
쾅! 우지직!
우르르르.. 쿵!
야흐트의 목소리는-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루츠랑의 공격으로 벽이 박살 나 버리면서, 놈은 황금이 담긴 주머니와 함께 돌더미에 깔려버렸지.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손에서 주인 잃은 황금만이 굴러떨어졌어.
나 역시 바윗덩이에 깔려버리긴 했지만, 다행인지 뭔지 체구가 작은 덕분에 바위틈 사이에 갇힌 상태로 살아있을 수는 있었단다. 숨쉬기가 빠듯하긴 했지만, 어딘가 짓눌려서 죽을 상황은 아니었지. 한쪽 귀가 바위 사이에 깔려서 뭉개지긴 했지만, 사지도 멀쩡했고 말이야. 하지만 살아남아서 기뻐할 틈은 없었어. 그루츠랑 녀석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고, 나는 바위틈 사이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어. 심지어 아까 전신을 다친 탓인가, 온몸이 부어있는 것 같았어.
이제 다음은 정말로 내 차례인가? 놈이 바위를 헤집고 날 찾아내서 죽일까? 아님, 내가 바위에 으깨져 죽을 때까지 또 몸통으로 공격을-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어딘가에서 사라졌던 우르크의 목소리가 들리더구나. 아무래도 습격을 당했지만 살아있었던 모양이었어. 오크는 치유력 하나는 좋으니까 말이야.
“끝장을 보자, 이 망할 녀석아!!!! 우워어어어!!!!!!!!”
나는 바위 사이 좁은 틈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단다. 그는 피투성이였지만, 광기에 가득 차서 맨주먹으로 그루츠랑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어. 그야말로 야수와 야수의 싸움이었지. 그루츠랑 녀석은 내가 살아있는 걸 알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싸움쟁이 오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고, 격렬한 싸움 소리만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단다.
그리고 그 이후는- 기억하지 못한단다. 바위틈 속의 부족한 산소, 전신의 욱신거리는 통증…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마저 잃어버린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단다.
내가 다시 깨어난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구나.
신이 도왔는지, 아님 그루츠랑 녀석이 날 잊어버린 건지… 그리고 하루가 지난 건지, 아님 며칠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바위틈 사이에 끼여서 살아있었어. 깨어나자마자 전신의 통증이 바로 닥쳐왔지만, 움직일 힘 정도는 회복되어 있었어.
나는 힘겹게 바위틈 사이를 빠져나왔고- 굴러다니는 황금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동굴을 빠져나왔단다. 다행히 놈이 사냥이라도 나간 건지, 동굴 안에서 그놈을 마주치진 않았어. 내가 다급히 빠져나오며 발견한 거라곤, 그저 잔인하게 찢겨 있는 우르크의 시체뿐이었단다.
나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바위산을 내려왔고, 뜨거운 사막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단다. 평소라면 사막마저도 위험하다고 느꼈을 텐데 말이다. 오랫동안 동굴에 갇혀있던 탓인지, 할아버지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
장비를 모두 잃은 채 사막을 횡단하던 나는 그대로 기력을 잃고 쓰러졌단다. 그런데도, 또다시 하늘이 도왔는지… 지나가던 캐러밴에 구조되어 마을까지 돌아올 수 있었어. 이 할아버지가 클레릭은 아니지만, 만일 날 돌봐준 신이 있다면 정말 감사하고 싶구나.
자, 하우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때 만일 내가 거기서 죽었다면, 하우도 여기 없었겠구나. 어쨌든 그렇게 살아남은 나는, 그날 이후로 그 바위산엔 절대로 가지 않았단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그루츠랑의 그 매서운 눈빛을 생각하면 사막에서마저 공포로 얼어붙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단다.
그루츠랑은 아직도 살아있을까? 아직도 그 동굴에서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한 건 많았지만, 그날 이후로 알 방법은 없었단다. 될 수 있으면 모두 잊고 싶었지. 아직도 가끔은 영원히 놈에게 쫓기거나 바위 속에 갇히는 꿈을 꾼단다.
나는 죽어버린 나머지 멤버들의 소식을 유족들에게 전한 후, 마을 이곳저곳에서 그 동굴의 소문을 알아보고 다녔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행자들이나 캐러밴 일원들 사이에선 그곳이 꽤 악명 높은 곳이었던 모양이야. 야흐트 녀석은 그걸 알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쯧쯧.
결국 다들 ‘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걸 하지 말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아무튼, 야흐트와 내 멤버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난 이후, 그 바위산은 더더욱 가지 말아야 할 장소가 되었어.
하우야.
너는 나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후회할 짓은 하지 말렴. 꼭 약속해 주거라.
자, 밤이 늦었구나. 어서 자렴.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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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기까지가 제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날, 저는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 상상 속 그루츠랑은 어릴 적에도 지금도, 제게 있어서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지요.
제가 도적단 시절 사막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할아버지가 말한 바위산을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가까이 가지조차 않았지만) 여전히 거기서 모험가의 실종 또한 계속되고 있고요.
다들 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그루츠랑은 실존합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혀를 날름대면서, 사냥감을 찾고 있겠지요.
“이봐, 하우! 곧 다리 근처야.”
“그래 그래, 술레이만. 도적놈들 수법이야 뻔하지 뭐. 자! 모래 사이까지 잘 지켜보세요, 친구들! 놈들은 모래 색깔을 한 천을 쓰고 숨어있을 거니까요.”
내가 그렇게 소리치자, 캐러밴에서 힘 좀 쓴다는 멤버들이 하나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만해 보이던 엘프 양반도 어디선가 마법 지팡이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보호 주문을 외치며 캐러밴 멤버들에게 걸어주었습니다.
“싫어하는 척하더니 싸움 준비는 확실하시네요. 아직도 우회로로 가지 않아서 불만인가요?”
“아니, 이젠 딱히 상관없소. 왜냐하면- 온갖 장소를 다녔지만, 현지인이 하지 마라, 가지 말라고 하는 건, 안 하고 안 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거든.”
역시, 엘프는 거만하긴 해도 똑똑하네요.
자,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지 말라는 걸 하면서까지 원하는 걸 쟁취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저희 할아버지의 현명한 조언을 귀담아들을 사람인가요?
답은 여러분 모두 다르시겠죠.
하지만 명심하세요, 금기를 넘는다는 건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걸 말이에요.
-’그루츠랑’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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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잡한 삽화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갤러리카페휘님이 제공해 주셨읍니다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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