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XP

서브 메뉴

Page. 1 / 12508 [내 메뉴에 추가]
글쓰기
작성자 아이콘 [사채업자]
작성일 2022-02-20 16:03:54 KST 조회 706
제목
TRPG) 와일드본 단편: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TRPG 글 모음집

https://www.playxp.com/sc2/general/view.php?article_id=5693157 

 

---

 

185년 전.



데머랜드 제국은 염소족들과의 긴 전쟁을 끝냈지만,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제국 병사들 중엔 원인모를 역병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역병의 원인은 수인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지고 있었다.

결국 염소족의 영토를 차지하자, 그들의 분노는 남아있는 수인족들에게 향했다.


수인족들이 반격할 틈도 없이, 데머랜드 반도 곳곳에서 학살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증오에 가득 찬 제국의 병사들에게 포로란 없었다.

그들에게 수인들이란 모조리 박멸해야 할 보균자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수인들은 고향을 떠나, 최초의 강 너머로 향하는 피난길에 올랐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다.




비가 온다. 아래층에서는 분주한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들과 손녀딸이 날 챙겨주겠답시고, 요리를 해주겠다나 뭐라나. 손녀가 클레릭이 되겠다며 황금평원 대성당으로 떠난 게 한참 전 같은 데, 언제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돌아와 주었는지.
그 성당에서 우리 늑대족마저도 사제로 받아주어서, 정말이지 천만다행일 뿐이다.

나는 예전에 고향에서 가져왔던 물건들을 꺼내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문득 먼 옛날에 한 화가가 그려주었던 나와 내 형제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이라 조금 현실과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젊을 적 모습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록 내 방 안은 따듯하지만 밖은 꽤나 쌀쌀할 것이다. 이런 날씨를 반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겠지. 하지만 나에겐 이 비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오늘은-

“할아버지? 일어나 계세요? 요리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가요.”

“그래, 들어오려무나.”

손녀인 이샤가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건강하게 자랐다. 한 명의 클레릭으로써 성장한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는 다라.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제가 도울 건 다 했고, 나머지는 엄마가 하신다네요. 그나저나,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할아버지!”

“그래, 내 나이가 벌써 85살인데도 말이야. 정말이지, 오래도 살았어.”

“그래도 일단 성당에서 준 몸에 좋다는 차를 가져왔으니… 어머, 뭐예요 그 그림은? 두 늑대족?”

“옛날에 한 화가가 그려준 그림이란다. 이 왼편에 더 잘생긴 쪽이 나지.”

“지금이랑 정말 다르네요. 그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내 형제야.”

그 말을 듣자 이샤는 놀랐다는 듯이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전 몰랐어요! 할아버지한테 형제가 있었어요?”

“그래,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쌍둥이 형제였지.”

나는 의자에 앉아 그림을 손에 들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서 있는 두 사람. 그 뒤로 펼쳐져 있는 간략하게 그려진 풍경들. 비록 빛바랜 그림이지만, 그리운 어릴 적 고향의 모습들이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이걸 보니 옛날 일들이 떠오르는구나.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야. 난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잊히지가 않아. 아직도.. 아직도 말이야. 종종 꿈속에서 그 광경을 마주하고는 한단다.”

“그 정도일 줄 몰랐어요. 전… 사실 완벽히 알지 못해요. 우리 와일드본이 고향에서 도망쳐 왔다는 것만 알죠. 그 당시에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 너나 네 아버지는 여기 엠버 요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말이지.”

나는 그림을 책상에 올려놓고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 그칠 일이 없겠지.

“이샤, 이제 너도 많이 자랐으니,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좋겠구나. 우리들, 지금은 와일드본이라 불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고향을 떠나야 했는지 말이야.”

이샤는 내 옆에 앉아 함께 그림을 바라보며, 내 손을 잡고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이샤는 한 번도 내 이야기를 지루해하지 않았다.
이런 늙은이의 말 따위 무시하는 자들도 많지만, 이 착실한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이샤가 무사히 클레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나와 내 형제가 살고 있던 마을은 발덴베르라고 불렸어. 지금은… 데머랜드 제국이 세운 거대한 강제 노동 수용소만이 있는 곳이지.”

“그랬군요… 어떤 곳이었나요?”

“아름다운 마을이었단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풍경이 보여. 내가 어렸던 때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이야… 시원한 바람, 흔들리는 꽃들, 들판에서 뛰노는 아이들까지…”

나는 눈을 감고 어릴 적에 마주했던 풍경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젠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의 흐릿한 모습까지도.

“그런데, 그들이 왔단다. 데머랜드 제국의 병사들이. 나는 고향을 버리고, 쌍둥이 형제와 함께 도망쳐야만 했지…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건 내 고향이 아니란다, 이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내가 이곳으로 피난 올 때 겪었던 일들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이샤.”




“콜록, 콜록.”

침대 위에 하루 종일 누워서 콜록거리기만 하고 있는 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 쉽게 병에 걸리곤 했다. 비교적 건강한 신체가 자랑인 늑대족이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다른 종족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남들이 마을을 위해 각자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혼자 이러고 있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죄책감이 솟아오르며 내 마음마저 병들게 할 것 같았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자기 몸뚱이 하나 책임 못 지고 있으니.

“난… 난 아마 오래 못 살 거야. 틈만 나면 아프고.”

이불을 덮곤 형에게 투덜거렸다. 쌍둥이 형인 다니엘은 나와는 달리 아주 건강했다. 거기다 무언가 숨겨진 혈통을 이어받기라도 한 건지, 성스러운 축복의 힘을 받아 팔라딘이 되질 않나. 내가 우리 가문의 골칫거리라면, 형은 우리 가문의 자랑이다. 그와 나 자신을 하나하나 비교할 때마다 형이 내심 부럽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형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다 좋아질 거야 다비드. 그런 소리 하지 마. 이제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내게 남은 가족은 이제 너뿐이라고.”

다니엘은 날 격려해줬다. 형의 그런 면이 언제나 의지가 되었다. 이런 모자란 날 지지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나갔다 올게. 건너 마을까지 잠깐 다녀올 거야. 일종의 정보 수집이랄까. 요새 주변 마을들 분위기가 썩 좋지 않거든. 데머랜드 제국이 우리 영토까지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대체 왜? 우린 딱히 잘못한 게 없잖아? 염소족 놈들이야 먼저 전쟁을 걸어서 그렇다 쳐도..”

“데머랜드도 제국이 되고 나서는 많이 변했어. 다른 종족들 영토까지 침략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정말 우리 종족들은 너무 걱정이 없어서 탈이야.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써는 인간보다 튼튼하다고 해서, 국가 단위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야. 갔다 올게. 약 잘 챙겨 먹고, 편하게 누워 있어 다비드.”

“콜록, 콜록…! 알았어.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러고 있는 것뿐이네.”

그렇게 5일이 지났다.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예전엔 2주 정도 자리를 비운 적도 있었다. 뭘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형의 생존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아마 정보수집이니 뭐니 하며 산길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나는 어제 쯤에 병세가 사라져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마을 사람들 일을 도왔다. 거기다 근처 숲에서 새 몇 마리와 사슴을 잡아 식량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마을 아이들에게 구운 고기를 나눠주니 좋다며 뼈까지 씹어먹었다.

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언가 비명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나는 가급적 소리를 죽이면서 창문 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이럴 수가. 데머랜드 놈들이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 마을 사람들보다 많은 수의 데머랜드 제국 병사들이 모여있었다.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줄 맞춰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기괴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알신을 숭배하며 역병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머리털을 모조리 민 제국의 병사들. 우리 종족 기준으로 봤을 때, 정말이지 괴상망측한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아라코크라 종족들 마냥 부리가 달린 괴상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살고 있던 로렌조가 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게 보였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장검으로 저항했던 게 틀림없다. 데머랜드의 병사들은 손으로 들 수 있는 작은 대포 같은, 처음 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로렌조를 향해 그 손대포를 조준했고.. 큰 화약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불을 뿜었다. 로렌조는 비명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나는 비명이 나올 뻔해 급히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가엾은 로렌조…

그리고 그들 중 특이한 모자를 쓰고(가려져 있지만, 아마 그도 머리털이라곤 없었을 것이다), 가슴팍에 여러 훈장을 단 남자가 앞으로 나와서는, 소리 증폭 마법을 걸곤 마을 전체에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리히트 에임젤, 데머랜드 제국의 수인척결 위생부대 제4군단 사령관이다. 제국의 위대하신 케실리우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조사를 한 결과, 이 마을은 위생상태 부적합에 의한 청소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너희 늑대족 마을 주민들은 모두 지정한 건물로 모일 것을 명한다. 이것은 부탁이 아닌 명령이다. 불복하는 자는 내 권한에 따라 현장에서 처형하겠다. 여기 쓰러진 녀석처럼 말이지. 숨어있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나와서 질서 있게 명령에 따라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미 로렌조 외에도 죽어있는 주민들이 몇 명 보였다. 그중에는 알고 지냈던 아줌마도 있었다. 망할 자식들…

다니엘 형은 어떻게 된 걸까? 지금이야말로 형이 필요할 때인데. 나는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만일 걸린다면 로렌조와 같은 꼴이 날 것이다. 뭐라도 좋으니 행동을 해야만 했다.

나는 우선 사냥할 때 쓰는 단검 두 자루를 꺼내 품 속에 감췄다. 나는 내 손톱을 쓰기보다는 이 친구들을 애용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대로 숨어있어야 하나? 저 자들 명령을 따라야 하나?

문득 다니엘 형이 해주었던 말이 기억난다. 죽어나간 염소족들 중에는 자비를 바라고 항복했음에도 처형당한 자들이 가득했다고. 형이 했던 말처럼, 저놈들 명령을 들어도 결과가 좋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형은 기억 속에서마저도 나의 도움이 되는구나.

나는 형의 조언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일단은 방구석 어딘가에 숨어있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손에 잡히는 몇 가지 물건만 챙겨서 급하게 짐을 싸놨다. 부모님의 유품, 나와 형이 그려진 그림, 약간의 화폐와 식량…

마을 곳곳에서 비명과 화약 병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나가는 마을 주민들을 도울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콰직!

문짝을 부수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데머랜드 제국 병사였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걸리면, 끝장이야.

“아직 나오지 않은 주민이 있다면 거수하고 나와 명령에 따르도록 하라. 불복 시엔 처형뿐이다!”

다행히 한 놈뿐이었다. 놈은 우리 집을 이곳저곳 뒤지고 물건을 부수며 수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잔꾀를 내기로 했다. 형과 함께 사냥할 때도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어서 나와! 불타 죽고 싶지 않으면!”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움직이며, 작은 물건을 하나 집어 데머랜드 병사 놈의 건너편으로 던졌다. 전통적인 주의 끌기 작전이었다.

“거기 있구나! 얌전히 나오지 못해!”

놈은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고, 조심스럽게 그 방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기회였다. 나는 소리 없이 단검을 뽑고, 살금살금 그의 반들거리는 뒤통수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씩 가까이… 가까이…

“-콜록!”

젠장.

병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던 걸까?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오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데머랜드 병사 놈이 뒤돌아보더니 날 향해 소리 질렀다.

“보균자다-!”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놈은 날 향해 손에 든 무기를 조준하고 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놈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그놈에게서 마지막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커억.. 컥…!”

“한츠? 거기 무슨 일이야!”

“안 돼! 보균자다! 다가가지 마! 쏴, 쏴라! 불태워 버려!”

아뿔싸. 이미 늦었어!
밖에 있던 병사들이 상황을 알아채곤,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짐을 챙겨 단검을 뽑고 몸을 숙인 채, 집에 난 뒷문을 향해 재빨리 달아나야 했다. 병사들이 날 향해 사격을 가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내 몸에 무언가에 맞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공포와 긴장감에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문득 그들 중 누군가가 화염탄을 던져 집에 불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지, 불은 순식간에 옮겨 붙었다. 나는 황급히 뒷문을 열고 숲을 향해 달아나야만 했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집은 이미 활활 불타고 있었고, 수색병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집이.. 젠장!”

나는 놈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을 향해 달아났다.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악-!”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팔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는 걸 멈추진 않았지만, 눈앞이 후들거리고 걸음이 느려졌다. 이대로 끝나고 마는 걸까? 그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다리를 붙잡고 땅 속으로 끌어당기는 걸 느꼈다. 다니엘 형이었다!

“형..?!”

“쉿! 조용히 해! 조용히…!”

형은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위로 풀로 뒤덮인 판을 덮어씌워, 일종의 위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두 사람이 숨어있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 늑대 보균자 녀석, 어디로 간 거야! 갑자기 사라졌어!”

“서둘러서 찾아! 한 방 맞았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거기다 그놈이 한츠를 죽였어! 만일 그 살인자 놈을 우리가 놓친다면 에임젤 님이 크게 화내실 거라고!”

형의 위장이 완벽했던 모양이다. 놈들은 근처를 배회하긴 했지만, 이내 다른 곳으로 넓게 퍼지며 멀어져 갔다.

“후, 한숨 돌렸네. 놈들 말을 들어보니, 한 놈 잡은 모양이야? 대단한데!”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나는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종족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여본 건 처음이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놈들이 우리 집을… 마을을 불태워 버렸어.”

“어쩔 수 없어. 도망쳐야 해. 이곳에서 아주 멀리…”

“형은, 형은 어디 갔었던 거야? 마을이 이 꼴이 나는 상황이었는데… 형이 있었다면…”

“숨어 다니느라 돌아오는 게 늦어져서 정말 미안해, 다비드. 하지만 놈들의 수를 봐. 우리 마을 사람들만으론 무리야. 내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쯤 다 같이 시체가 되어서 뒹굴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잘 들어. 나는 한동안 근처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다 잿더미가 되어있었어. 놈들은 역시 우릴 살려둘 생각이 없어! 우리 늑대족을 포함해서 수인들은 모조리 죽여버리려는 셈인 게 분명해. 이제 답은 하나밖에 없어. 우리가 사는 곳에서 멀리, 멀리 달아나야 해… 제국 녀석들이 쫓아오지 못할 곳까지.”

“우리 이웃들이, 다 저기 있는데…”

그때, 마을 쪽에서 다수의 비명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놈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깡그리 불태우고 있는 거야…! 잔인한 새끼들!”

“세상에, 신이시여… 더 많이 데리고 탈출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게 왔어…”

무력감이 느껴졌다. 내가 알던 친구들이, 친한 사람들이 불타 죽어가고 있는데… 땅에 난 구멍에 숨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다니엘 형의 손은 부들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칼을 들고 제국 병사들에게 돌진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망할! 가자, 다비드.. 더 이상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살아남자. 살아남아야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그래.. 그래. 알겠어.”

다니엘 형은 무언가 강렬한 맹세라도 한 것 같았다. 그의 검이 찬란히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복수심이 그를 더욱 강하게라도 해주는 걸까?

우린 주위를 살펴본 후 위장한 곳에서 빠져나와, 마을이 있던 곳을 뒤돌아봤다. 비명소리는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활활 불타는 건물들 뿐이었다.

나와 형이 살던 곳이었다. 한때 아름답고 빛나던 곳이,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가자! 놈들이 우리까지 불태우기 전에…”

형은 날 끌어당겼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몇 번이고 마을이 있던 곳을 뒤돌아보았다. 우리가 살던 곳, 우리가 추억을 함께한 곳… 나의 고향은 그렇게 하루 만에 사라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우린 발덴 산 이곳저곳을 숨어 다니면서 제국 병사들을 따돌렸고, 식량이 떨어지자 급한 대로 사냥을 하며 굶주림을 이어나가야 했다. 산길을 따라 최초의 강을 향해 나아갔다. 도중에 몇 번인가 죽을 위험에 처한 적도 있지만, 우리 둘 다 무사했다. 정말이지 이곳이 평야가 아닌 산이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동안 데머랜드 제국 병사 두 명을 더 죽였다. 형은 여섯이었다. 때론 그들이 가진 식량을 뺏어먹으며 버텨나갔다.

“이제 우린 미들랜드 평야를 지나야 해. 여기서부터가 문제야. 지금까진 산속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면, 산길에 익숙하지 않은 제국 녀석들을 따돌릴 수 있었지만…”

형의 말이 맞다. 평야는 산과 다르지. 숨을 곳도 마땅치 않고, 지금은 미들랜드 평야 전체가 온전히 제국 영토였다. 곳곳에 숲이 있기도 하지만, 인간 활잡이들이 사냥을 하기도 할 테니 들킬 위험도 컸다. 압도적으로 발덴 산보다는 불리했다.

우리는 일단 평야를 건널 작전을 짜기 전에, 몸을 숨길 곳을 찾아 근처에서 발견한 바위동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동굴 안에 누군가 있었다. 다니엘 형이 먼저 기척을 눈치채고 재빨리 그에게 검을 겨눴다.

“누구야!”

“기다려요! 잠시만!”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타난 건 놀란 표정을 한 인간 남성이었다. 제국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털 하나 없는 놈이었다. 동굴에 숨은 우릴 발견했으니 처치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데머랜드 녀석… 죽어버려!”

“잠깐만! 멈춰요, 멈춰!”

형이 칼을 휘두르려 한 순간, 그 인간의 뒤로 조그만 키를 한 족제비족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데머랜드 녀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형을 말리려 했다.

“이 인간은 좋은 분이에요! 제국 병사들과는 다르다고요!”

“맞아, 검을 거둬. 이 친구는 문제없다고. 우릴 도와주고 있거든.”

옆에는 그 인간에 비하면 비교적 덩치가 큰 고양이족의 남자도 있었다. 아주 끝내주는 갈기를 가진 걸 보니 사자 계열인 모양인데..

형은 일단 그 둘을 보고 검을 거뒀다. 하지만 경계의 태도는 풀지 않았다. 그래도 형과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우린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동굴 입구를 위장하고, 동굴 깊은 곳에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며 천천히 대화를 나눠보았다.

“난 다니엘 루포넬로다. 파이터가 아닌 팔라딘이야. 이쪽은 내 동생인 다비드 루포넬로. 자랑스러운 내 쌍둥이 동생이지. 걸어 다닐 때 기척이 거의 없어서 실력 좋은 로그나 다를 바 없다니까.”

형이 그렇게 말해준 게 고마웠다. 나는 형에 비하면 잘난 것도 없는 놈인데..

“넬리아 치비사이스라고 해요. 딱히 여러분처럼 싸울 줄 아는 건 아니고, 포션이나 약초를 파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급하게 피난 오다가 이 둘과 만나게 됐죠. 간단히 넬이라고 불러주세요.”

족제비족 여성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냥함과 다정함이 느껴졌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쉽게도 옆의 사자 친구를 돕느라, 쓸만한 포션을 다 써버린 모양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넬.”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방긋 웃어주었다. 그냥 나의 감이었지만, 분명 인심 좋은 상인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근엄한 태도로 우릴 지켜보던 고양이족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난 댄 라이언하트라고 한다. 제국 놈들한테서 달아나다가 생긴 상처로 죽을 뻔했는데, 넬이 포션으로 치유해 줬지. 그 이후론 같이 다니고 있고.”

“그렇군, 넬과 댄인가. 그럼 남은 건…”

“저는 헤르빈이라고 합니다. 헤르빈 슈미트. 네, 네, 데머랜드 제국 출신의 인간인 건 맞지요. 데머랜드가 왕국이었을 시절에, 전 왕실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럼 이들을 왜 돕고 있는 거야?”

“당연히 제국이 하는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요. 들어봐요. 제 가족들은 드래곤본 사제들에게 대들었다고 처형당했어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고양이족 친구들도 있었는데, 다, 다 불타 죽었죠.”

헤르빈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후회가 되지만, 제가 그 두 사건 중 하나라도 항의하려 들었다면, 저 또한 처형당했을 거예요.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어요. 황제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뿐이에요.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헤르빈의 말이 이해가 갔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많은 것을 잃었구나.

“언제부턴가 다들 정신이 나가버렸어요. 근데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순 없잖아요. 누군가는 올바른 일을 해야죠.”

“맞아요 헤르빈! 당신 덕분에 우리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어요.”

넬이 그렇게 말하며 그를 옹호했다. 댄 역시 말은 없었지만 공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은 검을 내려놓고 헤르빈에게 악수하자는 듯이 손을 건넸다.

“난 데머랜드 인간들은 모두 미친놈이 된 줄 알았는데 말이야.”

“대부분의 데머랜드 제국 사람들은 모두 수인족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다 죽여야 한다고. 적어도 우린 다른 종족을 그렇게 대하지 말기로 해요, 다니엘.”

형과 헤르빈은 악수를 나눴다. 이들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넬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마 내 표정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지? 강을 건너려면 미들랜드 평야를 건너야 해. 그런데, 가는 길목마다 경비병들이 쫙 깔려 있을 거야. 곳곳에 숲이 있긴 해도 강까지 연결되어 있진 않다고.”

댄이 말을 꺼냈다.

“걱정 마요 댄. 저한테 작전이 있어요. 자, 이걸 입어봐요.”

헤르빈은 가방에서 무언가 검은색의 옷들을 잔뜩 꺼냈다. 위저드, 클레릭이나 입을 법한 천 로브였다. 그것도 발까지 닿을 만큼 상당히 사이즈가 큰. 넬은 로브를 펼쳐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와! 이건 마법사들 로브 아닌가요? 꽤 좋은 옷감을 쓰고 있네요!”

“네, 고위 마법사들 거라서요. 여러분이 다들 종족도 신체 사이즈도 다르긴 해도, 이 커다란 로브를 입고 있으면 몸과 얼굴 일부분이 가려지니 그럴듯하게 인간처럼 보일 수 있어요. 장갑도 끼고, 갈기나 꼬리, 튀어나온 귀를 좀 열심히 숨겨야겠지만.”

“이게 먹힐까?”

형이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전 이 방법을 써서,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총 다섯 명을 강 너머로 보냈어요. 뿔 달린 염소족은 무리긴 했지만.”

헤르빈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간단해요. 저도 같이 로브를 입고 갈 겁니다. 그럼 그럴듯한 인간 마법사 다섯 명 정도로 보일 거예요. 제국에서는 그리 어색한 광경이 아니죠. 밤이면 더더욱 알아보지 못할 거고요.”

헤르빈은 그렇게 말하며 미들랜드 평야의 지도를 펼쳤다. 검문소가 있는 장소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제국의 검문소는 뚫기 쉽진 않지만, 다들 인간이 수인들을 도울 거라고는 생각 못 하더군요. 제가 먼저 얼굴을 보이고 건너가게 해 달라 말하면, 나머지도 인간이라 생각하고 쉽게 들여보내 주더라고요.”

“제국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거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헤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 그렇게 하자고.”

댄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동의했다. 댄이 갈기를 숨기느라 좀 힘들어하긴 했지만, 확실히 헤르빈이 준 로브를 입고 나니 다들 그럴듯해 보였다. 넬은 마치 꼬마 마법사처럼 보였다. 헤르빈은 다시 지도를 꺼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검문소는 총 4개. 그리고 최초의 강에서 배를 얻을만한 장소까지.

“그럼 서둘러서 가자. 소문이 맞다면 수인척결 위생부대는 끈질긴 놈들이야. 산 전체를 불태우며 따라오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형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그렇게 한밤중에 산을 빠져나와, 미들랜드 평야로 향했다. 몇몇은 지팡이를 들어, 수행 중인 클레릭이나 위자드 일행들처럼 보이게 위장했다.

헤르빈의 말이 사실이었다. 며칠 동안 큰 문제없이 평원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으로 검문소 세 곳을 무사히 지나쳤다. 처음에 검문소를 지나갈 때는 들킬 거라는 공포심을 잠재우느라 필사적으로 애를 써야 했지만, 그다음 두 곳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게 정말로 통하다니.

하지만 마지막 검문소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넬리아의 꼬리가 빠져나와있는 걸 들키고 만 것이다.

“보-보균자다!!”

경비병의 외침 소리와 함께 검문소에 비상이 걸렸다. 경비 중이던 놈들이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우린 어쩔 수 없이, 검문소에 있는 병사들을 모조리 처리해야만 했다. 순발력 좋은 다니엘 형이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검문 담당 병사들을 썰어 넘겼다. 댄과 나, 그리고 헤르빈도 가세해서 덤벼드는 병사를 처리해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 팀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리고 적들은 대(對) 수인 병기로 무장한 정예병이 아닌 단순한 경비병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무기라곤 기껏해야 칼이나 창, 활 정도였다.

그리고- 헤르빈은 아무래도 위장이 아닌 진짜 위자드인 모양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마력이 뿜어지자, 대지가 요동치고 흔들리며 적 경비병들이 하나둘 넘어졌다. 자세가 흐트러진 적들은 제대로 된 싸움꾼이 아닌 나에게 있어서도 손쉬운 사냥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댄은 그가 가진 피지컬로 병사들과 맞섰다. 주먹 몇 번으로 병사를 날려버리고, 순식간에 목을 꺾어 죽여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넬리아는 싸우는 방법을 몰랐다. 그녀는 비명을 이리저리 질러대며 덤벼드는 병사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다행히도 다니엘 형이 그녀를 최대한 감싸며 덤벼드는 병사들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맨몸인 아군을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는지, 형은 조금 상처를 입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싸움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검문소 위를 쳐다보았다. 나팔을 불기 직전의 제국 병사가 있었다. 근처의 원군을 부르려는 거야!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들고 있던 단검 하나를 재빨리 그놈을 향해 투척했다.

명중이었다! 단검은 놈의 목에 제대로 꽂혔다. 세상에, 이걸 맞추다니.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 정도면 형도…

“넬? 넬리아!”

다급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느 순간 화살을 맞은 모양이었다. 가슴팍에 깊게 꽂힌 화살, 그리고 그 부위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치명상이었다.

“기- 기다려! 내가 치유해 줄 테니!”

다니엘 형이 기도를 외우며,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넬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형이 몇 번이고 치유를 시도했지만, 죽음이 그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도 검문소 어딘가에 치유 포션 같은 게 없을까 찾아다녔지만, 모조리 허탕이었다.

“미, 미안, 해요…”

그게 넬리아의 마지막 말이었다.

우린 검문소에 있던 병사들을 모조리 처리했다. 그리고 되도록 증거가 남지 않게 정리를 해야 했다. 넬의 시체는 근처 숲 속에 묻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최대한 빠르게 달아나, 강으로 향해야만 했다.

넬리아와 함께한 시간은 기껏해야 4~5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함께했던 그녀는 정말이지 상냥한 친구였다. 절망적인 기분이 들 때 말 한마디만으로 기운 나게 해주는 친구였는데…

“젠장… 제 실수예요. 조금만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헤르빈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니야. 내가 팔라딘으로써 아직 미숙한 게 문제였어.. 내가, 곁에 있었는데도...”

다니엘 형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일처리를 완벽히 하는 형이었기 때문에, 절망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이건 넬의 실수야. 넬이 스스로 조심했어야 해. 덕분에 우리까지 위험해졌잖아. 검문소가 털린 걸 알게 되면, 추격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댄이 무뚝뚝하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울컥하고 화가 나서 그에게 따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넬리아는 예전에 널 구해줬잖아!”

댄은 날 무시하고 그저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다툴 것 같은 상황이 되자, 헤르빈이 소리쳤다.

“그만해요! 우리끼리 서로를 탓해서 어쩌겠어요. 어서 가요, 여러분. 넬리아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순 없어요. 강을 넘어가 살아남아야죠. 그녀도… 그걸 바랄 테니.”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다. 강령술이 있긴 하지만, 그건 진짜로 예전의 그 사람을 되살리는 거라고 할 수 없다. 남아있는 우리는 나아가야만 했다.

분위기 메이커였던 넬리아가 없어지자, 우리는 서로 간에 말이 별로 없어졌다. 그저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최초의 강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가진 식량은 점점 떨어져 가고, 신체에 쌓인 피로도 눈에 띌 정도로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밤, 우리는 드디어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게 대체…”

헤르빈은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강가에는 정예병력으로 보이는 제국 병사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나와 형은 그들의 복장을 보고 이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수인척결 위생부대 제4군단. 우리 마을을 불태운 자들이었다.

“망할, 이 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뭐가 문제였을까? 검문소의 병력들이 사라진 것 때문에 대응 병력이 파견된 걸까? 아님 달아난 우리의 도주 경로를 예측해서 미리 이곳에?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제기랄, 헤르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댄은 헤르빈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자-잠깐만. 저도 예상 못 했어요. 예전에도 해상 경비 병력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어. 근처 숲에서 위장하고 기다리자. 아무리 저놈들이라도 틈이 생기긴 할 거야. 밤에 경비가 약해진 틈을 타 배를 훔쳐서, 빠르게 튀어야만 해.”

일단은 모두 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식량도 떨어졌고, 놈들은 검문소의 어정쩡한 경비병들과 달리 밤에도 철저하게 감시를 서는 정예병력이었다. 우린 쫄쫄 굶은 상태로, 밤에 서로 불침번까지 서가며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만 했다. 댄은 배고픔 때문인지 슬슬 짜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밤이 되었다. 놀랍게도 경비병 하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야말로 최적의 기회였다. 놈들도 포기한 걸까? 아님 어딘가에 숨어있기라도 한 걸까?

“천만다행이군. 운 좋으면 놈들 식량을 좀 털 수 있을지도 몰라. 배고파 죽겠다고!”

댄은 그렇게 말하며, 헤르빈이 말리는데도 혼자 먼저 앞서 나갔다.

“어쩔 수 없어요. 저희도 빨리 가죠!”

헤르빈과 우리 형제는 강 근처에 주둔된 병영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강가에 주둔되어 있는 배가 몇 척인가 보였다. 정말이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다니엘 형은 다섯 명쯤은 탈 수 있을 배를 찾아서는, 배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었다. 나는 먼저 집에서부터 가져온 짐을 배에 던져놓았다. 댄은 어디선가 보급품 몇 개를 챙겨 가져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숨어있던 위생부대의 병사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우리를 포위했다. 순식간이었다.

“망할!”

수는 압도적이었고, 반격할 틈은 없었다. 형이 무언가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무언가 단단한 물건이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일어나.”

차가운 바닷물이 내 얼굴을 강타하는 걸 느꼈다. 나는 뒤통수가 얼얼한 걸 느끼며 깨어났다. 손과 발은 꽁꽁 묶여있었다. 내 앞에는 기절한 형이 마찬가지로 묶여있었다.

틀림없다. 제국 놈들이 우리가 올 걸 알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숨어있다는 걸 누군가 알린 걸까? 아니면 우리가 올 걸 예측하고 미끼를 던져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 헤르빈이 스파이였고, 우릴 일부러 이곳으로 유도한 걸까?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지만, 난 내 앞에 나타난 가증스러운 녀석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졌다. 잊을 수 없는 얼굴과 모자였다. 리히트 에임젤. 수인척결 위생부대 제4군단의 사령관. 우리 마을을 불태운 녀석!

“너희 짐승 놈들은 목표가 손에 잡힐 때가 되면, 멍청할 정도로 시야가 좁아지지.”

놈은 그렇게 말하며 부리 달린 검은 마스크를 쓰곤, 묶여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키우는 개와 다를 바 없어. 먹을 것만 좀 던져주면, 좋다고 와서 헥헥대며 먹어대거든. 그게 너희 수인 놈들의 열등한 본능이야.”

“닥쳐…!”

“어디 보자. 다비드 루포넬로. 맞지? 네 이름은 우리의 협력자 친구가 알려줬어. 흠, 뭐 너희 수인 놈들한테 딱히 이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특히나 넌 살인자에, 보균자이고, 명령 불복종자이니 말이지. 네놈이 마을에서 도망가는 걸 우리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잘도 빠져나갔더군.”

그렇게 말하며 리히트는 피투성이 제복을 나에게 던졌다.

“기억하나? 다비드. 넌 고귀한 데머리안 혈통을 지녔고, 누군가의 아들이며 내 부하였던, 충직하고 용감한 병사, 한츠 슈르트만을 죽였어. 그 외에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이 죽었지. 포악하고, 무자비하며, 인간성을 상실한 짐승 녀석.”

“너도 기억하나 모르겠군. 네가 우리 마을 사람들을 불태워 죽였는데!”

“아니. 그건 청소라고 하는 거야. 네가 한 건 살인이고. 청소, 살인. 청소, 살인. 둘은 완전히 다른 단어지. 책상에 쌓인 먼지를 턴다고 살인이라고 하나?”

“이 쓰레기 자식!”

“뭐 됐어. 더 얘기를 나누다간 이놈한테 병이 옮겠군. 이봐! 그 놈들도 데려와!”

헤르빈과 댄이 밧줄에 묶인 채로, 썰매 끌듯이 끌려오고 있었다. 헤르빈은 몇 대 두들겨 맞기라도 한 건지, 질질 끌릴 때마다 끙끙대고 있었다. 댄은 리히트를 보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듯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 이봐! 나는 살려주기로 했잖아! 내 말대로 이들을 유인해서 잡을 수 있게 도와줬고-”

“댄!? 너였냐?! 우릴 배신한 게!”

다니엘이 어느새 깨어났는지, 댄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댄이 배신자였다니! 좀 무뚝뚝하고 냉정하긴 해도, 최소한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가만히 있으면 결국 우리 전부 굶어 죽었을 테니까! 대책 없는 너희들이랑 같이 저승에 가는 건 사양이라고!”

“그렇다고 동료를 팔아넘겨! 이 망할 자식아!”

리히트는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역시 짐승들은 열등하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한동안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리히트는, 부하에게 손짓과 함께 명령을 내렸다.

“처리해.”

“자, 잠깐! 약속이 다르잖아! 약속이-”

댄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리히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직후- 리히트의 부하가 가진 손대포에서 큰 화약 소리가 뿜어졌다. 댄은 머리에 구멍이 난 채 피를 흘리며 숨을 거뒀다. 비겁한 배신자의 말로였다.

“그, 그래선 안 됩니다, 리히트 사령관… 같은, 같은 생명에게, 이래서는…”

“난 정말이지 놀랐단 말이지. 우리 제국의 인간들 중에 이런 비천한 짐승들하고 붙어먹은 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이들은 짐승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영혼을 지닌 존재입니다. 제발, 리히트 사령관. 눈을 뜨세요, 눈을…!”

“눈을 떠야 하는 건 너지, 헤르빈 슈미트. 맞지? 잠시 조사를 해봤는데, 네 가족들도 너와 똑같은 부류였더군. 정말이지, 왕실의 마법사 가문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자네와 자네 가문은, 우리 제국의 수치 그 자체야. 저 놈들과 똑같이 ‘청소’해야 할 대상이지.
처리해.”

리히트는 또다시 부하에게 손짓하며, 명령을 내렸다. 헤르빈은 나를 쳐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며 말을 꺼냈다.

“다비드, 다니엘..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마세요, 희망을..”

“그만둬!!”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손대포에서는 불이 뿜어지고 있었다. 헤르빈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였다. 형은 분노에 찬 눈길로 리히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들은.. 네놈들은 악마나 다름없어…”

“짐승 놈이 뭐라는 건지. 자, 빨리 이 역병 덩어리들을 마무리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에임젤 사령관님.”

댄과 헤르빈을 쏴 죽인 병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놈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뒤로 잔혹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체념하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려는 순간- 리히트가 말한 ‘역병’이란 단어와 함께 괜찮은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나고 말았다.

“콜록, 콜록! 커어억!”

나는 병사를 향해 최대한 크게 기침하며, 놈과 리히트가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먹혀들었다.

“아, 아악! 노, 놈의 불결한 타액이…! 내 신성한 두피에…!”

“벼, 병사! 나에게 오지 마라! 넌 오염정화장으로 가! 나머지는 다들 나와! 놈들이 있는 임시유치장을 대포로 정화한다!”

이런 멍청한 작전이 먹혀서 다행이었다. 리히트는 부하들과 함께 호다닥 빠져나갔다. 놈들의 병에 대한 공포가 역으로 그들을 달아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이대로라면 포격에 휩쓸려 저승행이 될 테니.

내가 이런 작전을 실행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약간이지만 도적 기술을 몇 개 배운 적이 있다. 덕분에 손에 묶여있는 밧줄은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다만 빠져나갈 타이밍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손톱으로 발에 묶인 밧줄도 풀어내고, 다니엘 형의 밧줄까지 풀기 시작했다.

“다비드! 대체 어떻게…! 역시, 넌 대단해.”

“칭찬은 고마워. 근데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빨리 가자! 저 둘처럼 되기 전에!”

멀리서 포격 소리가 들렸다. 우리 형제는- 간발의 차로 그 건물을 빠져나왔다.

“배, 배를 타야 해! 서둘러!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강가로 향했다. 다행히 아까 찾은 배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가져온 짐도 그대로였다. 소란스러운 틈을 타 우린 배에 올라탔다. 리히트는 우리가 죽어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제 강을 건너는 일만이 남았다.

“제발, 제발..”

나와 형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최초의 강은 꽤나 폭이 넓은 곳이다. 저 너머가 바르데메오 왕국 땅이었지만, 한참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놈들이 살아있어, 살아있다! 도망치고 있다!”

제기랄. 데머랜드 병사 놈들이 알아챈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끈질기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놈들이 건너가지 못하게 해야 해! 다들 불화살을 쏴라! 너희 둘은 화염검과 화염탄을 들고 날 따라와! 배에 올라탄다! 놈들을 정화해야만 해!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리히트는 꽤나 덩치 큰 부하 둘과 함께 커다란 배에 올라탔다. 놈들은 우리 배보다 빠른 속도로 추적해오기 시작했다.

“다비드, 잠깐 혼자 노를 저어줘! 더 힘내서! 내가 보호막을 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화살에 죽고 말 거야!”

“아, 알았어!”

내가 민첩함은 자신이 있어도, 근력은 솔직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만 했다. 뒤로는 화살과 포화가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끝장날 순 없어.

“됐어!”

다니엘의 빛나는 보호막이 나와 배를 감쌌다. 화살이 몇 번 떨어졌지만 튕겨나가는 게 보였다. 우리 둘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으며, 강 건너편을 향해 나아갔다. 절반쯤은 강을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갈길이 한참 남아있었다.

“젠장, 저 찰거머리 같은 놈..!”

다니엘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이럴 수가. 리히트와 그의 부하들이 어느새 코앞까지 근접해 있었다. 어쩐지, 계속 날아오던 화살이 멈췄다 싶었다. 사령관이란 자가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게 아니라 앞장서서 쫓아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광기가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얌전히 정화되어라, 망할 짐승 놈들!”

“우린 짐승이 아니다!”

두 배가 서로 부딪히자, 다니엘이 재빠르게 행동했다. 순식간에 우리 배로 넘어오려는 리히트의 병사 하나를 죽였다. 나는 계속해서 노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의 병사가 우리 배로 건너와선, 화염검을 휘두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형은 보호막으로 막아냈지만, 좁은 배에서 싸우는 탓에 제대로 실력을 못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활활 불태워주마, 개자식아!”

그 병사는 형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고 나를 노렸다. 이 좁은 배 안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 형이 더 빨랐다. 자세를 바로잡고, 놈의 배때지에 칼을 꽂아 강물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폭발과 함께 강렬한 열기를 띈 불길이, 우리를 덮쳤다.

“아, 아아아악!!”

형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 팔에도 불이 붙어있었다. 나는 신음을 내며 급히 강물에 팔을 집어넣어 불을 꺼야만 했다. 하지만 다니엘 형은- 보호막이 사라졌는지 배와 팔 쪽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형의 회색빛 털이 불로 인해 다 타들어가며 끔찍한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안 돼! 혀, 형! 강으로 들어갔다 나와! 빨리!”

“아으윽! 노, 놈을 봐… 놈을!”

리히트! 그놈이었다. 놈이 계속해서 불을 뿜어내는 화염탄을 우릴 향해 던지고 있었다. 운 좋게 몇 번 빗나갔지만, 다시 손에 하나를 쥐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놈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강을 오염시켜선 안 되지, 짐승아! 화염과 함께 네 죽음을 받아들여!!”

그리고 놈은 또다시 화염탄을 던지려고 했다. 설령 내가 피한다 해도 배에 맞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눈과 손이, 더 빨랐다.
목표를 주시하고, 단검을 뽑으면서, 바로 물 흐르듯이 날린다. 이미 한 번 해본 적 있는 일이었다.

“커, 커어억..!”

또다시, 명중이었다. 내 단검은 리히트 녀석의 목에 제대로 꽂혔고, 놈은 생기를 잃으며 강으로 가라앉았다.

풍덩.

비록 내 단검 한 자루를 잃어버리게 됐지만, 상관없었다.

우리 마을과 헤르빈의 복수다. 망할 자식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들의 사령관이 실패한 걸 알자 불화살과 포화가 다시 우릴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더 지체할 틈이 없었다. 형은 그 사이에 강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불이 꺼져있었다. 하지만 배와 팔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괘, 괜찮아? 괜찮아 형!?”

“어서… 어서 가… 노를 저어… 난 다시 보호막을 칠 테니…”

“알겠어!”

형은 일어서서 데머랜드 제국 방향으로부터 나를 지키듯이 보호막을 펼쳤다. 그의 빛나는 보호막이 따스하게 나를 감싸는 걸 느꼈다. 지치고 피곤하고 배고프며, 몸 이곳저곳이 고통스러웠지만, 더는 멈출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배를 이끌고 나아갔다. 노를 젓고, 젓고, 또 저어서..

그리고- 마침내 건너편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에서 무사히 탈출한 것이다.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포격과 불화살도 더 이상 닿지 않고 있었다. 나는 배에서 내리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안심할 수 있었다.

“형… 성공이야! 우리가… 우리가 해냈다고..!”

“다비드.. 그래.. 해냈어.. 해냈어..”

형은 배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화상 때문인지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형을 부축하기 위해-

털썩.

형은, 다니엘은.. 배에서 내림과 동시에, 내 앞에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수많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배와 팔의 화상과, 등의 화살과 관통상들. 이건 누가 봐도 버틸 수 있는 부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튼튼한 팔라딘이라도…
하지만, 내 머리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안 돼! 대체 언제… 언제!? 정신 차려, 형! 다니엘! 도착했어, 도착했다고! 우린 살았단 말이야! 강을 건넜다고…!”

“다비드, 허억… 미안.. ”

안 돼. 안 돼. 어째서. 이제야 목표로 하던 곳에 도착했는데.. 다 왔는데!

“형은 팔라딘이잖아! 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 형은..”

“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아, 다비드… 칼싸움이라면, 쿨럭, 모를까… 보호나, 치유는 말이지… 그다지 잘, 하지… 못해… 그래도, 고기 방패 정도는, 할 수 있었네…”

“기다려, 기다려! 누군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당장 클레릭을 찾아서…”

“다비드..!”

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시야가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잊.. 잊지 마… 어? 우리, 우리의 고향. 쿨럭, 우리가.. 우리가 있던 곳. 우리의 집이, 어디였는지.. 우리의.. 땅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손에서 다니엘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는 내 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형, 형! 정신 차려! 일어나, 다니엘! …아아아-!”


그 후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몸 이곳저곳이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형의 시체를 안아 들고 계속 어딘가로 향했다. 더 이상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

“거기 멈춰라! 여기서부턴 통행금지다!”

나는 공허한 눈으로 눈앞의 성채를 바라보았다. 이게 형이 말했던 ‘엠버 요새’인가. 피난해 오는 염소족들이 몰려오자 그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만든, 불굴의 성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견고해 보이는 요새였다.

“나는 아리우스 엠버, 이 요새의 장군이다. 이 이상 다가오면 불법 침입자로 간주하고 처벌을 내리겠다. 부탁하겠다. 부디 멈춰다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사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저 장군이 무슨 처벌을 내리든, 날 밖에 내버려 두든…
난 세상 어딜 가든 형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고 힘든 탈출도, 먼 타지에서의 생활도, 형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난 형의 시체를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울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의 무력감, 슬픔, 그리고 후회가, 끝도 없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날 엠버 요새 앞에는, 오직 한 명의 외로운 늑대만이 존재했다.




이샤는 내 이야기를 듣고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난 아니었다. 다니엘이 죽은 그날, 나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눈물을 흘렸으니까.

“오늘은 다니엘의 기일이란다, 이샤. 그래서 너희 아빠가 여기 와 준거야.”

“그랬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괜찮아. 그저 신을 믿고 있는 널 보니 그가 떠올랐을 뿐이란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이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으니까.

“나만 남아 늙어간다는 건 정말이지 공허한 기분이었단다. 당시에는 마음속이 허무함으로 가득했었지. 하지만,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어. 다니엘은 죽었지만,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했지. 엠버 장군님이 내 실력을 보곤 날 받아주고, 나처럼 피난을 온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요새와 대륙 곳곳에서 데머랜드 놈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하지만, 너희 아버지나 네가 태어났을 때, 내 공허한 가슴도 조금씩 채워져 갔단다.”

이샤는 말없이 나를 한 번 끌어안아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샤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며 기도했다. 나는 책상에 올려놓은 우리 형제의 그림을 다시 집어 들고, 그림 속 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세상에선 편히 쉬고 있기를, 다니엘.”


고향 잃은 나의 동족들, 와일드본 형제들이여.


부디 잊지 말아 다오.

우리의 고향을, 우리의 집을.

우리 형제들이 살아가던 땅을.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을.

지속적인 허위 신고시 신고자가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고 사유를 입력하십시오:

아이콘 WG완비탄 (2022-02-20 16:25:59 KST)
0↑ ↓0
센스 이미지
대머랜드 뿌셔 ㅠㅠ
아이콘 갤러리카페휘 (2022-02-20 16:33:10 KST)
0↑ ↓0
센스 이미지
ㅠㅠ 개추
아이콘 Slania (2022-02-20 17:06:00 KST)
0↑ ↓0
센스 이미지
힝힝 ㅠㅠ
아이콘 Elendi (2022-02-20 18:24:43 KST)
0↑ ↓0
센스 이미지
10명도 넘는 데머리안들이 죽었어 ㅠㅠ
ScrapGiant (2022-02-20 18:41:51 KST)
0↑ ↓0
센스 이미지를 등록해 주세요
아... 대머리 혐오가 공고에 가득해...
댓글을 등록하려면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로그인 하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롤토체스 TFT - 롤체지지 LoLCHESS.GG
소환사의 협곡부터 칼바람, 우르프까지 - 포로지지 PORO.GG
배그 전적검색은 닥지지(DAK.GG)에서 가능합니다
  • (주)플레이엑스피
  • 대표: 윤석재
  • 사업자등록번호: 406-86-00726

© PlayXP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