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좋은 점을 이야기하자.
그래픽이 아주 멋지다. 캐릭터들의 노출도가 좀 높은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상당히 괜찮다. 캐릭터의 외모에 영향을 미치는 장비 슬롯을 딱 3개로 한정했고, 그 중에서도 아이템 하나로 겉모습이 결정되게 했지만 종족과 성별, 클래스에 따라 디자인 차이가 크기 때문에 다양성이 없지 않다. 애니메이션도 자연스럽다.
조경은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 단연코 군계일학이다. 특히 평야나 나무 없는 산 같이 트인 곳이 매우 잘 되어 있고, 멀리 보이는 풍경들도 장대하고 아름답다.
요즘 유행인 액션 위주의 타겟 없는 게임플레이도 상당히 괜찮다. 파티 플레이에서 좀 혼잡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다.
그럼 나쁜 점.
퀘스트 동선은 생각을 하고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보내는 루트와 C지점로 보내는 루트가 있어서 B를 타서 퀘스트 세트를 완료했더니 좀 먼 곳으로 보내길래 돌아와 C지점 퀘스트를 했다. 근데 C지점 퀘스트가 끝나고 나니 B지점으로 보내더라. 원래대로라면 A에서 C로 보내고 B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
세계 설정은 왜 있나 싶다. 와우처럼 종족별로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도시는 통돼지구이로 유명하다" "어느 종족은 남자가 여자한테 구혼할 때 주먹다짐을 해서 이겨야 한다" "어느 종족은 책을 무지 좋아한다" 하는 아무 뜬금 없는 소리가 간혹 로딩 화면에 자잘하게 한 줄씩 나올 뿐이다. 와우에서 오크의 혼례 절차가 어떤지, 나이트엘프가 책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스톰윈드에서 무슨 음식이 유명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얘길 안 해 주니까. 하지만 오크의 지배자가 현재 누구이며 전에 누구였는지, 나이트엘프의 역사가 어떠한지, 스톰윈드의 왕이 실종되었던 것이 누구 탓인지 등등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 차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설정이 게임에 반영되느냐 아니냐, 다른 하나는 그 설정 자체가 사람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인가 아닌가이다. 테라는 둘 다 후자이다. 와우만 해도 간신히 합격점인데...
스토리는 솔직히 말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게임을 그렇게 만들어 놨다.
액션성 높은, "손맛 좋은" 게임플레이는 칭찬할 만하지만, 게임에서 이를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하다. 퀘스트의 내용은 에누리 없이 90%가 몹을 X마리 죽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중 9% 이상이 특정한 이름을 가진 하나의 몹을 죽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MMORPG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와우만 해도 퀘스트 수행 자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첫 확장팩에서부터 노력을 기울여, 대격변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테라는 퀘스트 수행이 단조롭고 앞서 말했듯 설정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이야기가 발생하지 않으며, 손맛 좋은 게임플레이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전투 한 번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서 퀘스트에서 요구하는 양의 몹들을 죽이다 보면 그야말로 정신이 몽롱하게 된다. 내가 그 몹들을 왜 죽이고 있는지, 퀘스트 텍스트를 읽어 보았다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테라의 퀘스트 텍스트는 재미 없는 책이다. 공연히 길기만 할 뿐 읽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꼼꼼이 읽었더라도 저 연자방아 돌리기식 사냥을 하는 도중에 잊어버리고 말 것 같다.
(몹 사냥의 비중이 공연히 크다는 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와우에서는 레벨업하는 순간이 대개 퀘스트를 보고할 때다. 테라에서는 레벨업하는 순간이 대체로 어느 몹인가를 죽인 직후이다. 경험치 배분이 퀘스트 보상보다 개별 전투 보상에 치중해 있다는 얘기다.)
아직 무료 기간이 남았으니 더 해 보기는 하겠으나, 지금까지의 패턴이 바뀌지 않는 한 유료화되는 순간에 그만둘 것 같다. 게임하는 내내 입에 맴도는 소리가 "그래픽 정말 아깝다"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