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일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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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5-11 10:57:53 KST | 조회 | 6,928 |
제목 |
망각의 어둠 교단(Cult of Forgotten Sha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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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포세이큰
직업: 어둠순찰자, 사제, 죽음의 기사
수도: 언더시티
망각의 어둠 교단은 빛의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현실과 삶에 있어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암흑 에너지(그들은 이것을 "어둠"이라 부릅니다.)를 믿는 집단입니다.
교단에서는 무엇보다 균형을 중시합니다. 어둠의 에너지를 다루는 어둠의 사제는 언제나 자신이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나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은 암흑의 틈에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은 참으로 여러운 일입니다.
교단은 포세이큰의 언더시티 함락과 재단장이 끝난뒤 주교 나탈리 셀린의 가르침이 재발견되면서 창립되었습니다. 어둠의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모두가 포세이큰인 것 역시 아닙니다. 최근 몇년간 포세이큰이 아니며 호드 소속도 아닌 종족의 구성원들이 빠르게 증가하였고 교단을 좀 더 모든 세력에 개방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1차 대전쟁 이후 로데론의 주교였던 나탈리 셀린은 어둠의 문을 통해 밀려와 그들의 성자들을 모독했던 오크 강령사제들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처음에 이 작업은 그 사악한 힘을 사용하는 적에 맞서기 위해 적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교의 연구가 진행되어가며 연구의 방향은 어째서 이러한 에너지가 존재하는가, 어째서 그녀의 눈에 그녀를 둘러싸고 밀려오며 쓸려가는 이런 에너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는가를 해명하기 위한 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녀는 빛과 어둠의 균형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만 사후 그녀의 책은 키린토의 금고 속에 봉인되었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성스러운 빛이나 엘룬의 힘을 끌어옴과 달리 어둠의 사제들은 암흑 에너지를 그들의 목적을 위해 끌어옵니다. 빛이 긍정적인 감정들 곧 희망 용기 편안함을 불러온다고 흔히들 말하는 것과 반대로 어둠은 절망 의심 공황을 불러옵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빛이 불러오는 감정들이 마음에서 온다면 어둠으로 충만해지는 감정들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곧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각의 어둠은 성스러운 빛의 가름침과 전통을 어두운 방향으로 재해석한 신앙이며 포세이큰의 신앙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성한 인본주의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살아서 성스러운 빛의 사제였던 이들은 언데드로 되살아난 뒤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상처받은 이 사제들은 그들 옛 신앙의 자기본위적 신앙을 세웠습니다. 이 철학은 삶과 죽음의 균형에 관한 자기인식을 중심으로 합니다. 성스러운 빛의 많은 가르침과 미덕들이 망각의 어둠에도 남아있습니다만 보다 자기본위적 시각으로 꼬여 있습니다. 시작은 작았습니다만 망각의 어둠은 교세가 확장되었고 특히 실바나스의 어둠순찰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교단은 죽음의 종소리 마을을 중심으로 삼고 언더시티의 군사지구 역시 지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무언가를 통제할만큼 커다랗지는 못합니다.
망각의 어둠은 성스러운 빛 신앙의 어두운 재해석이며 많은 포세이큰들이 그 믿음 속에서 진리를 찾아냈습니다. 포세이큰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고립되고 추방된 느낌을 받던 포세이큰은 교단에 합류함으로써 형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함으로써 그들을 배신하였다 생각한 포세이큰은 빛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빛의 어두운 쌍둥이의 품으로 귀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포세이큰들은 그저 망각의 어둠의 실용성과 가치를 보고 합류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망각의 어둠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신실한 이들은 역시 사제들입니다. 그리고 몇몇 어둠순찰자들도 교단에 합류하기도 합니다.
한때 빛을 따르던 인간에게 언데드의 삶이란 너무나도 가혹하고 혐오스러우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많은 이들이 영혼에 분노와 쓰라림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빛을 섬겼었습니다만, 이제 자신이 영원한 어둠에 둘러쌓여있음을 느낍니다. 이러한 포세이큰들이 망각의 어둠 교단을 설립하였습니다.
생전에 빛을 섬겼던 포세이큰은 신앙을 그들의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바꾸었습니다. 망각의 어둠 교단의 신봉자들은 개인의 행동과 감정이 세계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망각의 어둠은 현실을 빚어냅니다. 개인의 내면에 세계와 연결되는 끈은 없습니다. 그러한 연결은 오로지 포세이큰 스스로가 그의 의지를 세계에 투영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그의 개인적인 힘을 증대시킬수록 그 주변의 세상에 더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강력한 포세이큰의 경우 말 그대로 세상을 빚어낼 수 있습니다. 망각의 어둠의 사제들은 이러한 교의를 신성한 인본주의라 칭합니다.
망각의 어둠 교단은 포세이큰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포세이큰의 봉기와 사회체제 형성과정에서 그들은 강령술사에 대해 반발의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강령술은 노예를 만드는 문화이며 스컬지의 문화이고 이는 새로이 자유를 얻은 언데드들에게는 불쾌하게 여겨졌습니다.
망각의 어둠 교단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조직이 헐겁다는 것입니다. 서너개의 교리가 공존하고 있고 사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망각의 어둠에 신실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합니다. 하나의 도시에 여려 교리와 여러 지도자가 존재합니다. 많은 신봉자들은 다른 이들과 교리 및 그것에 대한 실천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언젠가 극도로 카리스마적인 포세이큰이 나타나면 이러한 분열을 하나로 합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로 뭉친 가르침은 분명히 성스러운 빛의 교단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조직
교단은 경험과 실력에 기초한 위계질서로 이루어져있으나 이는 상당히 풀어져 있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어둠의 사제들이 주교 역할을 하고 수련 사제는 잡일을 합니다. 암흑사제는 넓은 구역에서 일종의 대주교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아직 교단이 확실한 구조를 갖추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조직엔 예외가 많습니다. 빛살해자들은 교단을 위한 암살자 역할을 하며 교단의 적을 척살합니다. 또한 이들은 가능한 경우 성스러운 빛의 신봉자들 역시 척살합니다. 암흑 승천자들은 물리적 세계에서 벗어난 이들이며 물질과 영혼의 틈새에 위치합니다. 이들은 교단을 위한 첩자나 암살자로 활동합니다.
세가지 미덕
망각의 어둠 교단은 세가지 미덕을 강조합니다. 공손함 끈기 그리고 힘입니다.
공손함
세계는 다른이들의 의지의 투영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평가절하하는 이는 곧 자기 주위의 사람들의 개인적인 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변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것일 뿐 아니라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망각의어둠의 추종자라면 마땅히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그의 능력을 갈고닦아야 합니다만 너무 커다란 힘을 너무 빠르게 추구한다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이 커다란 힘을 조급하게 추구합니다. 공손함을 표함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끈기
망각의 어둠의 추종자들은 끈기의 미덕에 더 큰 주안점을 둡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당에 개인이 세계를 바꾸려함은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확고한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만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
힘은 망각의 어둠 교단이 추구하는 세번째 미덕이며 가장 얻기 힘든 미덕입니다. 힘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포세이큰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마주하고 그것을 숙달하려 노력하다 죽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굴복하고 힘을 추구하지 않는 이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으며 홀로 앉아 그의 옛삶을 돌아보기만 할 뿐입니다. 교단에게 있어 스스로의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 포세이큰은 스컬지나 다름없습니다. 힘에 대한 추구엔 주의와 심사숙고 그리고 미묘한 운용이 필요합니다.
또다른 미덕들
망각의 어둠의 몇몇 계파들에서는 힘의 하위 미덕인 죽음을 네번째 미덕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몇몇 추종자들은 연민을 중요한 미덕으로 꼽기도 합니다.
죽음
포세이큰은 스스로의 죽음을 정복하고 뛰어넘을 때의 힘을 얻게 됩니다. 죽음의 힘을 추구함에는 역시나 섬세한 운용이 필요합니다. 포세이큰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해서는 안되며 약자를 죽여서도 안됩니다. 변덕스러운 살해는 포세이큰이 극복하기에 너무 큰 힘을 발생시킬 위험성을 증대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생동물이나 농부를 살해하는 데에 시간과 힘을 쏟는 포세이큰은 진정한 위협이 닥쳤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약자들에게 자비를 보이고 그의 힘을 수련하는 데에 게을리 하는 포세이큰은 약하다는 평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연민
실용을 추구하는 관점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연민을 추구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언데드를 두려워하고 피합니다만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교단은 포세이큰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이 진 짐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심지어 가장 냉혹한 사제들마저 연민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그들의 연민은 오직 다른 포세이큰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만 말이지요.
신성한 인본주의
연민과 동정심을 통하여 세계와 개인 사이에 연결고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안주하지 않고 교단은 좀 더 자기본위적인 사상을 설파합니다. 사제들은 개인은 세계에 영향을 끼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세계가 개인을 중심으로 공전하다고 설파합니다. 그들은 언데드가 무덤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지를 바로잡고 자각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언데드는 그들 스스로를 힘을 길러 그들 주변의 세계에 대한 제어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많은 사제들이 이러한 사상을 신성한 인본주의라 부릅니다.
신성한 인본주의는 개인이 세계를 빚어낼 수 있다는 사상이며, 본질적으로 세계의 모든 지각력 있는 존재들은 세계에 작은 변화들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신과 같다고 봅니다. 신성한 인본주의의 작은 예로는 분위기와 같은 것도 들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빛의 가르침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행복이 세계와의 결합을 통해 확산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성한 인본주의에서는 개인이 분노했다면 그 분노가 그의 주위에도 영향을 끼쳐 분노를 불러일으킨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어딘가 바깥에 있는 하찮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택을 하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서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쉽게 말해 성스러운 빛의 가르침은 세계를 바꿈으로써 당신 주위의 사람들을 바꿀 것을 설파하나 망각의 어둠은 당신의 힘을 사용하여 당신 주위의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계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신화적이고 무엇인지도 모를 연결 따위가 아니라 힘이야말로 핵심입니다.
빛과 어둠의 균형
일반적으로 빛을 혐오하며 그것에 해를 입고 어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운 언데드일지라도 그들은 빛과 어둠에 반드시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빛에 대하여도 배웁니다. 물론 그들이 어둠에서부터 태어났음을 잊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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