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 前 삼풍백화점 사장, 참사 16년만에 첫 인터뷰 [2011.01.19 17:51]
‘용서받지 못할 자’ ‘파렴치범’ ‘살인마’.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7분,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뒤 한 사람에게 쏟아진 단어들은 무시무시했다. 당시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사장 이한상(58)씨.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였던 그를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 그의 인생은 급전직하했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몽골 선교사가 돼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최근 그가 비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12일 서울 양재동 횃불선교센터 내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의 한 강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턱수염을 다듬지 않은 채였다. 수염은 세월의 흐름과 달라진 그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줬다. 사건 이후 언론과의 첫 인터뷰다.
구치소, 어둠 속 빛을 보다
-사고 이전과 이후,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집 근처 교회를 나갔지만 ‘신앙의 사람’은 아니었죠.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게 많았습니다. 부귀영화의 중심에 있었으니까요. 사고와 함께 호화로운 삶은 끝났습니다. 옷 한 벌, 숟가락 하나 제 것이 없는 삶이 시작됐죠.”
-복역 생활은 어땠습니까.
“(벽을 보고 돌아앉으며) 한쪽 벽에 등을 대고 다리를 쭉 뻗으면 닿을 정도로 좁은 방. 사람 얼굴만 한 창문. 불안했죠. 스트레스가 상당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였을까요. 24시간 벽만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펜글씨를 쓰고 소설, 만화책도 읽었습니다.”
-해소가 되던가요.
“전혀요. 마음의 평안을 찾기 힘들더군요. 그때 손에 잡히는 게 있었어요. 성경이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가기 시작했어요. 안 가보셨겠지만 구치소 독방엔 조명이 약합니다. 어쩔 수 없이 성경을 눈 가까이에 대고 읽었죠.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전에 성경을 읽었을 때와 느낌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전이라…. (잠시 말을 멈춘 뒤) 주일예배 말씀 외에는 성경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회사 일이 우선이었어요. 한 달에 한두 번 참석했을까요. 그마저도 지각하기 일쑤였죠.”
그는 어느 날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친 예수의 물음은 심장을 때렸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모든 게 없어진 뒤 하나님은 제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라고 답했습니다.”
“왜 나를 죽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는 달라졌습니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습니다. 처음엔 민망하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사랑고백도 했어요.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기더군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 제가 죄인이면 저만 죽이시지 왜 그 많은 사람까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답은.
“답변을 쉽게 안 주시더군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마음에 주신 단어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무조건, 무작정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출소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업 경력이 아깝다며 작은 회사를 맡기려는 지인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 길이 명확히 보이더군요. ‘세상 것을 다시 좇지 않겠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
-몽골에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2년 7월 출소한 뒤 하나님 뜻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아는 선교사를 만나러 몽골에 갔죠. 기도를 하는데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하라는 뜻이었죠. 한국에 돌아와서 주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출소 후 병상에 계셨던 아버님(고 이준 전 삼풍그룹 회장)도 찾아 몽골행을 알렸습니다.”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당시 헛것을 보시기도 하셨습니다. 흔들어 깨워야 정신이 돌아오시곤 했죠. 쇠약해진 아버지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예수님 믿으십니까’ ‘천국 갈 것을 믿습니까’ 아버지는 ‘믿는다’고 답하셨어요. ‘임종을 못 지켜도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다음날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 회장은 몽골로 가겠다는 아들에게 “그래, 남자는 일을 해야지”라는 말을 건넸다. “‘너는 꼭 복음을 전해야 해’라는 뜻이었어요. 지금도 힘들 때 그 말씀을 떠올립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눈 지 한달 보름 만에 이 회장은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지키진 못했다. “가슴에 묻었다”고 했다.
몽골, 인생 2막
-사고현장에 다시 가본 적이 있습니까.
“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픈 일이라 사건과 관계있는 분들도 가려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분 중에도 그곳에서 돌아가신 분이 많습니다. 그 가족이 ‘이제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그 일…. 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 평안하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출소 후 국내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었나요.
“제겐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소속과 재산이 없었고 사람들은 차가웠습니다. 물의를 일으켰고, 많은 분께 상처를 안겼습니다. 국내 활동, 불가능했죠. 누가 써주겠습니까. 교회도 선교사 파송을 거절할 정도였어요. ‘당신은 나쁜 사람인데 무슨 선교를 하냐.’ 인식을 깨기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그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됐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처음엔 다른 선교사들의 일을 돕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제 경험을 활용해 건물이나 교회를 지을 때 선교사님들을 도왔죠. 지금은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 가는 거리의 헝거르라는 마을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현지인에게 침을 놓아주신다고요.
“스킨십이라 할 수 있죠. 사람들과 유대를 갖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려워요. 30대 초반 침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국에서 체침(體針)을 공부한 분에게 매일 두 시간씩 6개월 동안 배웠습니다. 이곳에서 유용하게 쓸 줄 몰랐죠. 2006년엔 캐나다대체의학협회에서 주는 침술사 자격증도 땄어요. 100점 만점에 82점. 커트라인을 2점 넘겼습니다.”
-현지인의 반응은 어떤가요.
“길가다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요. 육류를 많이 먹어 중풍, 관절염 환자도 많죠. 의료 시설이 없는 그들에게 침술은 큰 힘이 됩니다. 소식을 듣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요.”
비전, 그리고 회복
-선교여건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좋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선교사들이 추방되는 일도 많아졌고요. 2008년부터는 몽골 정부 허가를 받지 않은 외국인이 전도하면 처벌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방식의 선교가 필요하겠군요.
“지난해 하나님께서 옥수수에 대한 비전을 주셨어요. 김순권 옥수수박사가 몽골에 맞는 신종 옥수수 종자를 개발했는데 그걸 몽골에 재배하려 합니다. 몽골은 목축업이 주 산업입니다. 사료로 그만한 게 없습니다. 식량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고요.”
-몽골인의 인식은 어떻습니까.
“아직 옥수수의 효과와 기능을 잘 모릅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가 들여온 선진 문물이 발전의 기틀이 된 한국 사례를 알리고 있어요.”
-옥수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옥수수는 선교의 좋은 도구가 됩니다. 사역하는 중 김 박사님 등을 만났고 선교의 도구이자 식량 문제의 해결책으로 옥수수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할 말이 없지 않은 듯했지만 조심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사고로 상처받은 분들을 생각하면 웃을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니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도 아니잖아요.”
인터뷰 막바지, 그는 조심스럽게 ‘회복’을 이야기했다. 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이 회복되고 치유되기를 기도했다.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 다친 분 숫자를 훨씬 넘는 생명을 구원하고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며 살아가겠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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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국현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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