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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로코코
작성일 2013-10-14 23:28:39 KST 조회 382
제목
아청법 이야기

어느 날 두 신사가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한 명은 옆구리에 아이패드2를 끼고 있는 모던한 옷차림의 신사였고, 다른 한 명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멋쟁이 신사였다. 편의상 이들을 '모던이' 와 '멋쟁이' 라고 부르기로 하자. 모던이는 아이패드2를 작동시켜 효율적인 손놀림으로 능숙하게 기기를 부렸다. 한참 디스플레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느닷없이 화를 냈다.


"이런! 정말 이래서 정치인들이란 놈들은...앞뒤가 꽉꽉 막혔다니까! 아동 및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에도 엄격한 규제를 적용하겠다고 합니다. 믿겨지세요? 우리 정부가 지금 가상의 청소년들을 보호하려고 경찰력을 투입한댑니다!"


모던이는 그렇게 소리치며 옆좌석에 앉아있는 멋쟁이를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던이의 눈동자는 '당신이 예술과 상식을 사랑하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내 주장에 동의해야만 한다.' 라는 확고한 저의를 담고 있었다. 멋쟁이는 모던이를 향해 유순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모던이의 강렬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글쎄요...사실 저는 꽤 괜찮은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구요? 선생님, 이 세상에 성폭행과 추행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또 못되먹은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꼬득여 포르노를 만들어 해외에 팔고 있다구요. 우리 경찰들은 실제로 살아 숨쉬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이런...종이와 CG로 만들어진 이상한 공상 덩어리가 아니라요!"

흥분한 모던이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모던이는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뒤, 다시 정중한 자세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정책은 우리나라의 창조산업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겁니다. 정부 사람들은 제조업과 금융업 규제 완화에는 엄청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그런데 왜 똑같이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창조산업은 숨통을 못조여서 안달인 겁니까?"

"첫째, 난 이 나라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이 오히려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난 현실의 아이들을 지키는 것 만큼 가상의 아이들을 지키는 것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어...선생도 꽉막힌 사람이로군요."

"음. 글쎄요. 저 역시 선생과 제 생각 차이에 넓은 간격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십시오."

멋쟁이는 시선을 저 먼 시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가 회상에 잠길 때마다 버릇처럼 하곤 하는 동작이었다.

"내가 아직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중학생 시절 기억나십니까? 물론 기억 나겠지요. 우주를 창조하지 않고서 애플파이를 만들 수 없듯, 중학생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혹은 중학교를 나오지 못했더라도 모든 남자들은 사내아이였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네...물론이죠. 하지만 그 이야기가 우리의 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중학생이었을때, 저희 반에는 한 고운 소녀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아이 이름은 바다였는데, 그 이름 만큼이나 투명한 자태를 간직한 아이였습니다. 그 애가 자유롭게 뛰어놀때면 비단같은 긴 머릿결이 대기 위를 부유하며 찰랑거렸습니다. 흰 팔과 다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쳤고, 동작 하나하나에 날렵함과 힘이 넘쳤습니다."


멋쟁이의 목소리는 벌써 아련해지고 있었다. 모던이는 마음 속으로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짐짓 왼팔에 찬 손목시계를 훔쳐보았다.


"바다는 제 소년시절의 여신이었습니다."

멋쟁이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 시절 나는 쇳물같은 피로 달궈졌고, 썩 훌륭하지만은 않았던 공교육으로 담금질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 몸 속에서 우러나오는 욕정적인 열기가 가실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현실에서도 꿈 속에서도 오직 바다만을 찾았습니다. 난 분명 겉으로는 수줍고 예의 바른 소년이었지요. 그래서 언제나 꽃처럼 다른 이들을 끌어모으는 바다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 아이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내 욕망은 소년 특유의 탁월한 상상력과 융합해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기적이라구요?"

"나는 훌륭한 관찰자였습니다, 선생님."

멋쟁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바다의 용모, 습관, 말투를 모두 기억 속에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정열과 상상력으로 얼룩진 내 눈동자는 광선처럼 그 아이의 몸을 뚫어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몸을 이루는 조직과 장기, 방금 물 밖으로 끄집어올린 생선처럼 펄떡이는 근육과 아련한 살결, 역동하는 혈관과 입맞춤하는 연인처럼 헐떡이는 심장...나는 입자 하나하나부터 그녀를 다시 창조해냈습니다. 나는 내 상상의 궁전 안에서 현실의 그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바다를 조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허나 자연의 힘이 빚은 그녀와는 전혀 다른 나만의 바다였습니다. 나만의 관념, 나만의 언어로 만든 바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던이는 흠칫 놀랐다. 멋쟁이의 시선에서 죄책감을 읽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길한 욕정의 감각 역시 멋쟁이의 눈을 타고 모던이에게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나의' 바다였습니다. 내가 그녀를 창조했습니다. 현실과는 달리, 내 상상의 궁전 속에서 모든 물리법칙과 인과의 순리는 내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바다' 는 언제나 나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인형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풋풋한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서로를 향한 불타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굶주린 금수처럼 달려드는 거친 연인이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서로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서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서로의 신이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서로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춰섰다. 그러나 두 신사 중 어느 누구도 버스에 올라타지 않았다. 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코너를 돌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멋쟁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분명히 강간범이었습니다. 친구. 가끔 나는 아주 잔인하게 '나의 바다' 를 농락했습니다."

"당신은 어렸잖소!"

"어리다고 형벌을 피해갈 순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나는 바다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분명히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분명히 악의적인 기쁨 또한 느꼈습니다."

"그, 그럼 바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슨 바다 말입니까?"

"두 바다 모두 말입니다!"

"현실의 바다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애는 능력도 좋아서 지금은 수십억을 호가하는 작품을 조각하는 유명한 예술가입니다. '나의 바다' 는 꽃을 피울 기회를 영원히 얻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하 감옥에서 절규하며 평생 자신을 빚어낸 탐욕스러운 조물주의 노리개로 소모 되었습니다."

"그만! 그만! 더 듣고 싶지 않소!"

모던이가 손사레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멋쟁이가 따라 일어서며 따지듯이 물었다.

"뭡니까? 무엇이 그리 불편한 겁니까?"

"불편하다니! 아무 것도 불편하지 않소...그냥, 당신이 기분 나쁜 이야기를 했잖소!"

"기분이 나쁘다구요? 이런, '나의 바다' 는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바다입니다. 그녀는 온전한 정신이 단 한 톨도 깃들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분쇄 당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살아 숨쉬는 바다는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에잇! 그걸 누가 모르오?"

"당연히 당신도 알지! 하지만 당신은 불편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가상의 여자아이가 어떤 탐욕스러운 범죄자의 손아귀에 놓인 채 평생 노예처럼 살아야만 했으니까!"

"그건 그냥 가상의 존재요!"

모던이가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당신 말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가상의 존재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당신이 그...바다인가 뭔가하는 이상한 공상 덩어리에게 무슨 짓을 하건 난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아!"

"좋소. 이제부터 바다의 사지를 하나하나 잘라내 사냥개의 먹이로 주겠소."

"그 무슨!"

모던이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멋쟁이의 멱살을 쥐었다.

"기억하십시오. 선생님."

멋쟁이는 싸늘히 식은 눈동자로 모던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사회적 개념들은 본래 공상의 세계에서 주조된 겁니다. 적어도 원시시대에는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생식기능을 갖춘 여성은 모두 노동력 생산의 의무에 징용되어야만 했습니다."

모던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아귀에 쥔 힘을 풀고 멋쟁이를 속박에서 풀어주었다. 멋쟁이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있습니다. 14살의 청순한 모습 그대로,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며 지금도 절규하고 있습니다."

모던이는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멋쟁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매정히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수풀 뒤에서 경찰 두 명이 튀어나왔다. 경관들은 노련한 전사들처럼 멋쟁이를 포위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경찰이 날렵하게 멋쟁이의 등을 경찰봉으로 가격했다. 멋쟁이의 몸이 휘청거리자, 젊은 경찰이 멋쟁이를 포박했다.

"드디어 잡았군! 아동 성폭행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냐?"

나이 든 경찰이 환호했다. 멋쟁이는 난동을 부리며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젊은 경찰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황한 젊은 경찰이 경찰봉으로 멋쟁이의 머리를 가격하려 하자, 나이 든 경찰이 그의 팔을 급히 낚아채며 소리쳤다.

"정신 빠졌냐? 그러다가 저 안에 갇혀있는 소녀가 다치면 어떡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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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라 (2013-10-14 23:32:09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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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어그로중독자 (2013-10-15 08:59:3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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