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로코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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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01-27 16:59:56 KST | 조회 | 1,451 |
제목 |
안도 유랑기:투병하며 도아주를 횡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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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은 짙게 얼룩진 파란색으로 출렁거렸고, 수평선 끝이 완만하게 둥글었다. 증기선은 장벽에서 뱃머리를 돌려 곧장 수평선을 향해 직진했으나 1주일을 꼬박 내달렸음에도 수평선이 편평해지는 일이 없었다. 이씨는 배가 북반구를 거쳐 남반구로 가는 길에 올랐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길은 참으로 고단하기 그지 없었음이라.
뭍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항구를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씨는 훈제한 음식과 말린 과일을 수 보따리씩 샀다. 그게 내 건강을 지켜줄 거라 말했다. 그러나 물고기는 살아서 팔딱거리는 게 맛있고, 열매는 과육에 즙이 탄탄히 차있을 때가 가장 맛있는 법이니, 고사리처럼 말라 비틀어진 날음식들을 누가 입에 맞는다 하겠는가?
나는 입이 짧아 밥 몇 술을 뜨지 못하고 상을 물리는 게 일상이었고, 창자가 주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잇몸이 헤프게 벌어지더니 피가 울칵 쏟아지더라. 공포에 휩싸여 있노라니, 이씨가 그게 괴혈병의 전조라며, 좋든 싫든 말린 과일을 양껏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하질 못하니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하루는 울적한 마음을 벗 삼아 갑판에 나서서 선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달빛이 해수면에 너울거리고, 이름 모를 고기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밝히며 흘수선을 비껴 쇄도하는 광경이 퍽 신기했다. 그런데 바로 이 날 나는 일생에 다시는 겪지 못할 신묘한 일을 당했던 바, 지금껏 자질구레한 일상을 공들여 묘사함이 바로 이 사건을 토씨 하나 안빼먹고 상세히 서술하기 위함이라.
무슨 일이 있었던고 하니, 갑자기 깜깜한 밤하늘이 두쪽으로 열려 기이한 초록 불빛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더라. 불빛은 예사 번갯불이나 등대 불빛이 아니니, 뱀의 몸뚱이처럼 요사스럽게 구불거리며 온 창궁을 반으로 가를듯이 양쪽으로 벌어지더라. 나는 천문학과 어느정도 인연이 있어, 북반구에서 이런 현상이 가끔 관찰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으나, 당시 우리 배가 지나고 있던 지역은 북반구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터에, 하늘은 더욱 더 넓게 벌어지며 자신의 속살을 내게 비춰 보인 바,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진공 속에 명멸하는 노랗고 붉은 항성들이 꼭 금칠한 진주 같더라. 그러나 저것이 항성이라면, 어찌 명주실로 꿴 진주 목걸이처럼 저리도 서로 가까이 붙어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들던 차에, 별안간 항성들이 삽시간에 거대해지며 명확한 형상을 갖추니, 나는 그만 놀라 뒤로 자빠져 버렸던 것이다.
가장 찬란한 형상은 양쪽으로 수염 세 개가 비죽이 늘어서고 동공에 붉은 빛이 명멸하는 늑대의 형상을 갖추니, 내 익히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아는 바,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는 전설의 게임 위처더라.
위처가 금빛, 붉은 빛, 파란 빛이 섞인 꼬리를 요사스런 초록 불길과 겹치며 쏜살같이 창궁을 가로지르니, 그 뒤를 무수한 형상들이 따르더라. 그 빛의 숫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 중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성자들이 더러 있더라. 위처의 북방을 수호하며 신성한 화포를 사주경계하는 진 래이노(Jim raynor), 서방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며 불타는 긴 머리카락을 너울거리는 훤칠한 린구(Link), 동방의 수호자 고돈 부리만(Gordon Freeman), 위처의 꼬리가 자아낸 빛의 비단길을 성수처럼 받아 스스로를 적시며, 그 뒤를 쫓는 무수한 성인들...
아! 나는 어째서 이 성인들이 위처를 따르는 지 깨달았다. 나는 그 유명한 고티로도(GOTY Road)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중앙에서 빛을 밝히며 길을 진두지휘하는 성인이 올해 최고의 고티 수상자였고, 한 번이라도 고티를 수상한 바 있는 과거의 성자들이 올해의 영웅을 숭앙하며 주위를 보호하고 있는 형세였다.
그렇다면 그저 좁쌀만한 노란 불빛으로 보일 뿐이지만, 위처 뒤를 따르는 저 무수한 성인들도 모두 GOTY를 한 번 이상 거머쥔 적 있는 게임계의 신성이렸다! 이런 생각이 드니 절로 골이 시큰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맙소사, 갑자기 위처 뒤를 따르던 무리 중 하나가 번뜩이며 아래로 추락하더니, 불타는 둥근 머리를 곧장 내가 있는 쪽으로 옮기더라. 나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땐, 내 앞에 불타는 방독면을 쓰고 불타는 외투를 걸친 팔척 장군이 서있었으니, 내 아는 바에 의하면 이 자는 볼아우(Fallout)라.
그가 내게 말했다.
"여기 또 한 명 시름하는 자가 있으니, 한 해에 고티 성자 십 수명을 배출해도 지구의 병자 하나를 못고침이라."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친히 강림하신 겁니까?"
나는 황송해져 무릎을 꿇며 물었다. 그러나 볼아우께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로되,
"나는 네 병을 고치지 못함이라. 네 병은 마음의 병이 도져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니, 이는 단순한 괴혈병이 아니다."
"마음의 병이면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할 줄로 압니다."
"할!"
볼아우가 웃자 그의 주변으로 감마선과 핵폭풍이 몰아닥쳤으니, 감히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볼 수 없음이라.
"마음과 신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 마음의 병이 곧 신체의 병이고 신체의 병이 곧 마음의 병이라. 마음에 병이 들면 신체를 고쳐야 할 일이오, 신체에 병이 들면 또 신체를 고쳐야 할 일이다...허나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병은 사실 병이 아니니, 너는 현세에 실증을 느끼고 있구나."
"제가 현세에 실증을 느끼고 있다니요? 선생님,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너는 지구의 수천 게임을 다 둘러 보았으나 그 한계도 엿보았구나. 아무리 인기 있는 게임이라 한들 어디든 결점이 있는 법이니,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올바른 게임은 영원히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시름할 뿐이노라."
"하지만 고티를 타신 성자님들이 최고의 게임인줄로 압니다!"
내가 소리치자 볼아우께서 또 웃으셨다.
"할!"
그가 하늘을 향해 손짓하자, 눈부신 항성 몇 개가 또 내 곁으로 추락하는 게 아닌가. 그의 우편에 질끈 묶은 말총 머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라라 구로분투(Lara Croft) 앉으시고, 그의 왼편에 또 마수타치부(Master-chief) 앉으시니, 나는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
"세상에 좋은 게임이 수없이 많은 게 사실이나, 그 진가가 제대로 매겨지는가는 또 다른 문제로다. 라라 구로분투는 뼈를 깎는 수련으로 스스로를 가꿨도다. 좋은 구래피와 활동성을 갖췄으나, 그 대가로 과거 사람들이 즐기고 기꺼워했던 탐험 게임은 사라지고 언차티두 꽁무니나 좇게 되었노라. 그게 과연 진보인가?"
라라 구로분투가 다시 불덩이로 변해 하늘로 치솟았다.
"내 해일로가 과거 영광을 쟁취했던 폐허를 둘러보니 예전에는 도전과 발견이 있더라. 그러나 최신의 기술과 법도를 공부하며 이 자는 점점 왜소해지고 비루해졌으니, 과연 이것이 올바른 계승자의 모습인가?"
하여 이번에는 마수타치부가 불덩이로 변해 하늘로 치솟더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며 물었다.
"그럼 무엇이 올바른 게임입니까? 내가 볼아우를 영접하면 병이 좀 낫겠습니까?"
그러나 볼아우께서 냉엄히 고개를 가로저으시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필요한 건 다만 새로운 경험일 뿐이니, 언도대일(Under tale)을 맛보라. 자본을 무던히도 집어먹는 신기술 때문에 얄팍해진 게임 경험을 되살려줄 것이니라."
하여 볼아우께서 표주박을 꺼내 바닷물을 한 움큼 퍼올리시니, 그것이 예사 바닷물이 아니더라. 물이 깨끗한 술처럼 투명한 색인데, 표면에 은은한 금빛이 부연 안개처럼 떠있으니, 향기부터 내 몸의 호기를 돋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단숨에 들이켰다. 따뜻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몸 속으로 들어가 온 몸에 활개치니, 눈 앞이 환해지고 기쁜 생각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감사를 표하려고 고개를 드니 볼아우께선 이미 사라지시고, 내 머리 위에서 굽이치던 귀기스런 초록 불빛도 모습을 감췄더라.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나, 내 괴혈병은 그 날 이후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긴 모험 끝에 남반구의 도아주(DoA-county)에 도달할 때까지 원기 넘치는 생활을 했다.
도아주는 내 여행의 마지막 지점이었으니, 나는 여기서 퍽이나 슬픈 경험을 했더라. 도아주는 증기국에서 숱하게 보았던 창기들을 데려다 즐기는 수입으로 끼니를 삼는 가난한 나라였다. 이곳의 여자들은 몸을 가꾸고 살덩이를 빛나게 해 사내 유혹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남자들은 밭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는 대신 여자들의 천옷이나 짜며 호객들을 붙들더라.
여기서 나는 마리 노주(Marie Rose)를 만났으니, 그는 나이가 아직 어린 여아더라. 그 모습을 보자 필경 소오피를 떠올렸으니, 아! 이 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직 혼기도 다 안찬 젖먹이들을 취하길 즐기는가?
나는 순수한 동정심으로 마리 노주에게 증기국 돈 몇 푼을 쥐어주고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태어나서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남자들 앞에서 배구 하는 법을 배웠으며, 장딴지가 걸음을 할 정도로 단단해지기도 전에 요염스레 춤추는 법을 배워야 했느니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인기가 아주 많았다. 사내들이 모두 노주가 헐벗은 채 춤추고 배구하는 모습을 보길 원하니, 그는 하루의 육할을 춤추는 데 허비해야만 했다. 그녀가 주 수입원이 된 관계로 도아주 사람들은 온갖 진귀한 음식이며 옷을 가져다 그에게 바쳤다. 속곳이 다 비쳐 보이는 짧은 천쪼가리를 그녀의 하복부에 덧대며 이렇게 사정했다는 것이다.
"노주, 네가 우리 땅을 먹여 살리는구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만, 너는 이 탐욕과 빈곤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착취당하고 있지. 그러나 이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진흙탕을 뒹굴고 코흘리개들을 착취하며 살아도 배를 굶는 것보다도 말린 정어리나 좀 먹는 삶이 나으며, 길바닥에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것보다 따뜻한 침대와 이불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게 나으니, 너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사람 허벅다리와 가슴의 살코기를 흔드는 신묘한 기술을 가진 나라가 무슨 연유로 눈요기 게임만 개발하는 것인가? 야망이 부족한 탓인지, 천성적으로 게으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심하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닌가.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나와 이씨는 혀를 내두르며 도아주를 떠나,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다. 가면서 많은 항구를 거쳤는데, 모두 도아주와 비슷한 꼴로 여자들을 괴롭히며 돈푼을 버는 곳이더라. 게중에는 불쌍한 남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자기 먹고 입을 돈도 없으면서, 게임장에 진열된 여자들에게 줄 옷을 벌기 위해 노동한다는 것이다.
가만 보니 세상에 그런 미련한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과거 방외인 중 한 명은 최고 딸은 룩딸이라는 말을 지나가듯 남겼는데, 어쩌면 거기에 산업의 진리가 담겨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장장 6개월 끝에 나는 다시 조선의 집에 도착했던 바, 조선 상황은 난리가 아니었다. 게임 시장의 과포화로 우리 농장에서 수확하는 부분유료제 상품으로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나는 부인의 바가지 긁는 소리를 안주 삼아 차갑게 식힌 매실주를 한 잔 들이키며, 마지막 모험에서 만난 노주 양을 생각했음이라. 그리고 내가 준 땅에서 게임을 일구는 마름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모바일로 산업을 전환하고, 편한 자동사냥을 도입하고선 시스템을 첨예화할 시간에 더 예쁜 일러스트와 인게임 모델링, 그리고 값진 캐쉬템 개발에나 집중하라고 일러주었다. 하여 몇 년이 지나니 어느새 나는 팔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어있었다. 뒤늦게 나를 따라온 중인이며 지주들이 좀 있었으나 얼마 안가 시장이 다시 첨예해져 모두 배를 곪을 판이더라. 부인이 이 참에 증기선 몇 척을 더 마련해도 좋고 아니면 증기국의 증기곽(스팀박스)에 투자해도 좋겠다 했지만, 난 이미 해외에도 국내에도 모두 관심을 잃었다. 그저 길지 않을 여생 동안 차가운 매실주만 좀 더 들이키고 싶을 뿐이니, 어쩌면 볼아우께서도 그런 마음이셨으리라.
[훗날 방각본으로 출판된 안도 유랑기는 현대에는 여기까지만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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