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 설때 공책 펼쳐놓고 가계도도 만들어줄 정도로 열심히였는데
중대장 사령이 뭐냐고 물어보면 개인 공부한다고 구라치고 그랬다
제가 상상하는 미지의 소녀의 가계도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당연히 미친 놈 바라보듯 할게 뻔하잖은가. 생각해보면 나도 그떄 제정신이 아니긴 했던 거 같고...
미네소타의 여인이라고 말하긴 하는데 사실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던 거 같다. 내가 일부러 그녀의 나이를 어리게 설정했던건 사지방에서 구글지도로 미네소타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미국 대학교의 성폭행 문제 관련 다큐 때문이었다
정말 탄식이 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여기서 내 서구 자유주의와 평등의 가치 뭐뭐 이런 거에 대한 환상이 거의 반쯤 깨져나갔던 거 같다. 특히 미국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이 여인은 아직 이 불안전한 미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던 거다. 물론 지구에는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사회가 아직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가장 나은게 북미와 유럽인 건 사실이지만 그쪽 대륙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러니까 미네소타의 여인은 아직 철저한 가정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 설정을 모조리 철회하고 그녀를 8학년으로 강등시켰다. 우리 나이로는 중3쯤 됐을 거다. 그때로부터 2년이 흘렀으니까 아마 17-18살일 거다
어쨌든 중3인 미네소타의 여인은 정말 가능성이 무한했다. 그녀는 현대에 강림한 아폴론의 여성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지능, 창조력, 감성, 육체적 기능, 그리고 심미적인 측면에서까지 모두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범위를 이룩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유전자는 어설픈 자연의 장난질로 랜덤하게 빚은 게 아니라, 실존하는 신이 장인의 손길로 한땀한땀 소중히 만들어낸 걸작이었던 거다. 따라서 세인트폴의 주민들은 그녀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녀의 가족 역시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인생에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역경을 딛고 나왔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또 감출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그들을 더 신비로워 보이게 만들고.
그러니까 이 여인이 걸작이 되려면 단순히 사랑받고 행복하게 자라난 미국 중산층 백인 소녀 정도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에게 고통이 필요했다...어떤 고통을 줘야할까? 그녀의 유아기에 어떤 상실의 경험을 주어야 그녀가 더 투명하고 신비한 성격의 여인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내가 너무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