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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로코코
작성일 2015-10-26 19:11:40 KST 조회 804
제목
셜록홈즈와 망자의 불명예

내 친구 셜록과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그가 스코틀랜드 야드도 골머리를 앓는 온갖 흉악한 범죄 사건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기적을 부릴 때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세세히 기록했다. 하지만 이건 고백해야겠다. 독자들이여, 나는 사랑하는 내 친구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가끔 거짓말을 했고 진실을 은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셜록도 나도 늙었다. 영국은 더 이상 정의로운 전쟁을 하지 않고, 우리도 가슴 뛰는 범죄와의 전쟁 보다는 따뜻한 우유 한 잔과 함께 푸쉬킨의 책을 탐독하는 삶을 더 선호하는 바, 젊은 날의 수치스러운 사건들도 한낱 객기로 치부할 수 있는 도량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이렇게 셜록 홈즈가 치욕을 당해야만 했던, 아주 불명예로운 사건을 공개하고자 한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징조가 온 유럽을 배회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우리가 그리운 베이커 가의 저택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던 때였다. 홈즈는 타임지를 읽던 중이었고, 나는 내 모자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 손님은 검은 망토를 몸에 두르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자기 모습을 최대한 감춘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모자 챙 밑으로 드러난 표정이 심히 곤혹스러워 보였음이라.

 

"셜록 홈즈 선생님 맞으십니까?"

"그렇소. 당신은 무정부주의자로군."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도 감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소문대로군요. 그새 제 손에 묻어있는 흑색화약 흔적 같은 거라도 보신 겁니까?"

"무슨 소리요? 그런 걸 어떻게 눈으로 구분하오? 당연히 당신 망토에 달려있는 뱃지를 봤지."

하여 나 역시 사내의 가슴팍을 주시하니 과연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특유의 마크가 달린 뱃지가 붙어있던 것이다. 역시 홈즈는 대단한 눈썰미를 가졌다.

 

"선생님이라면 이 사건을 해결하실 수 있겠군요...저는 영국 무정부투쟁 조직의 일원입니다. 하지만 저희 조직은 아주 온건합니다...그리고 이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니 믿어주십시오."

이때 내가 사내에게 질문했다.

"아니, 무정부주의자의 말을 어떻게 믿소?"

"걱정 말게, 왓슨. 나는 내 탁월한 두뇌에게 약간의 여흥거리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상대가 무정부주의자든 글래드스턴이든 악마든 아무 상관도 안한다네. 계속 말해 보시오."

 

"네...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데이비드 와트입니다. 저는 사업체를 하나 운영하는 중입니다. 양말 공장인데 새로운 섬유를 들여와서 장사가 아주 잘 되지요. 저희 사업체는 제 형님인 말콤 와트와 저, 그리고 형님의 친구이자 공장 투자자인 윌리엄 터커 세 명이서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윌리엄 터커가 버킹엄셔의 도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죠. 살해당한 겁니다. 그는 근처에 있던 술집에서 나오는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제 형님 말콤 와트가 그와 함께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난 뒤 헤어지던 중 윌리엄 터커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겁니다. 다음 날 형님은 공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대신 우리 공장의 공동 운영자금을 누군가가 모조리 빼돌려 가버렸죠. 저는 무일푼이 됐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형을 범인으로 의심한다는 말이군?"

"네...끔찍하지만, 너무 증거가 명확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희 자금 창구는 세 명의 공장주 중 두 명의 인장이 있으면 열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이 갑자기 돈이 급해졌는데, 혈육인 저는 차마 해하지 못하겠으니 친구를 죽이고 돈을 빼돌린거지요. 저는 형을 찾고 있습니다. 탐정님의 수사 솜씨라면 형의 자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흥미로운 사건이군요. 나중에 연락 드리겠소."

 

사내는 홈즈에게 목례를 하고 허드슨 부인의 배웅을 받아 나갔다. 홈즈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친애하는 왓슨.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명확하지 않나? 이건 자네가 나설 사건도 아닌 거 같군."

"그렇지 않아, 왓슨.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믿지 말게. 특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는 말야. 생각해 보게. 저 사람의 증언에는 한 가지 명확한 오류가 있었어. 만약 저 사내의 형이 돈이 급했다면 말야. 당연히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행하기 전에 우선 도움부터 청하고 보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 말야."

"생각해보니 그렇군. 형이 자기에게 돈을 꾸진 않았는가 여부를 묻지 않은 게 아쉬워지는구만."

"아니...분명 그렇게 공격적으로 질문하면 저 자는 당연히 우리를 속이려들거야. 하지만, 신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네. 자, 왓슨. 이건 내가 읽던 오늘 자 타임지일세."

 

홈즈가 내게 타임지 사회면을 펼쳐주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화약 제조공장 화약 수십 킬로그램이 도난...경찰은 근처 테러 단체 의심>

 

"공교롭게도 이 화약공장 역시 버킹엄셔에 있는 곳이지. 나는 즉각 이런 이론을 만들어 보았네. 그러니까, 형, 형의 친구, 동생으로 이루어진 화기애애한 사업자들이 사실은,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으로 뭉친 테러단체 수장들이라고 가정해 본거지. 이들은 스스로 정체를 숨기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자기네 활동을 은폐하곤 하지. 이렇게 보면 그들의 수익 좋은 양말 공장은 실은 무정부 테러를 위해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선동하는 집회였다고 볼 수 있네. '인재공장' 이랄까? 이들은 가까운 시일에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자 근처 화약 공장에서 화약을 훔치고 폭탄을 제조했네. 하지만 일이 벌어지기 얼마 전, 갑자기 말콤 와트가 윌리엄 터커를 살해한 거야. 서로의 이념 충돌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 중요한 건, 수장들끼리 다툼이 있었다는 거고, 말콤 와트는 거기서 승리해서 무정부단체의 활동 자금을 챙겨 어디론가로 달아났다는 거야. 혼자 남은 저 사내는 미완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 자금을 되찾고 싶어하겠지."

 

세상에! 나는 그야말로 대뇌부터 척수 끝까지 온통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짧은 시간에 그 수많은 아무 관련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시켜 추리를 완성해 내다니. 역시 홈즈는 천재였다.

"정말...엄청난 음모가 런던 지하에 도사리고 있었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홈즈?"

"어떻게 하긴? 스코틀랜드 야드로 가세. 거기서 경찰들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하라고 해야지."

"그게 무슨 일인가?"

"뭐기는. 사람을 때리고 철창에 가두는 거지. 어서 가세. 애국하기 참 좋은 날씨로군 그래."

 

그리하여 우리는 서둘러 스코틀랜드 야드로 갔다. 홈즈는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불러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데이비드 와트를 구속하시오. 그를 마음껏 때리고 욕하고 고문하여 자기 조직을 실토케 하시오. 그리고 대영제국을 구하시오, 경감. 내 오늘은 이 영광을 당신에게 맡기리다."

레스트레이드 경감, 그 무능하고 완고한 경찰은 당연히 뚱한 표정으로 홈즈를 흘겨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홈즈씨? 아무리 당신이라도 여기서 이러면 곤란하오."

"잔말 말고 데이비드 와트를 구속하시오. 이 자는 자기가 양말공장주라고 주장하면서 오늘 내게 사건을 의뢰했는데, 내가 살짝 추리를 해본 결과, 사실 이 사내는 사악한 무정부 테러단체의 수장이었던 거요."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이군. 하지만 그걸 증명할 자료가 어디에 있소?"

 

"며칠 전 버킹엄셔 화약공장에서 운송되던 화약 수십 킬로그램이 도난 당했소. 데이비드 와트는 버킹엄셔에 양말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 그리고 데이비드 와트는 무정부주의 단체 뱃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소. 경감, 당신에게 지성이라는 인류 문명의 은총이 티끌 만큼이라도 깃들었다면, 이 명확한 일련의 증거들을 아주 간단하게 연역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지.."

 

"홈즈씨...나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그러니까, 결국 이것들은 당신이 집 안에 틀어박혀 이것저것 공상한 결과 아닙니까. 이건 수사요. 당신이야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행여나 틀렸으면 입 싹 다물고 있으면 언젠가는 잊혀지겠지만, 우리는 우리 행동 하나하나에 무고한 시민의 삶이 달려 있단 말이오..."

"이래서 내가 경찰들을 신뢰하질 않는 거야. 이렇게 무능해서야 어떻게 범죄와 싸우겠나, 안그래, 왓슨?"

나는 실로 홈즈에게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청 문이 열리더니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달려들었다. 홈즈는 눈부신 속도로 달려가, 특유의 바리츠 무술로 그를 제압했다. 나는 흐느끼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체를 밝혀라, 이 무뢰한 놈아."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너무 두렵습니다."

남자는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제 이름은 말콤 와트입니다. 저는 데이비드 와트의 형이고, 버킹엄 양말공장의 주인입니다. 저는 도박빚이 많았는데...차마 자존심이 상해 동생에게는 돈을 빌리지 못하겠고, 친구에게 제발 인장을 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습니다. 홧김에 그를 죽이고 말았죠...그리고 닥치는대로 돈을 들고 튀었지만, 그 후로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려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벌 주십시오. 이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이 비극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경찰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사건의 사실 관계를 조사했고, 드디어 데이비드 와트가 평범한 양말공장 주인이었고, 그가 몸담고 있는 무정부주의 단체는 아나키즘을 공부하는 친목 단체였다는 걸 밝혀냈다. 그리고 며칠 전 사라진 수십 킬로그램의 화약 건은, 다음 날 타임즈지에서 단순한 오기였다고 밝혀 종결됐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말콤 와트 사건을 해결 지으며, 정말 잔인하게도 언론에 이렇게 말하고 만 것이다.

"친애하는 셜록 홈즈의 번뜩이는 추리 덕분에 우리는 하마터면 어둠 속에 묻힐 뻔한 사건을 종결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섣불리 용의자를 실제 범죄자로 단정 짓지 않는 우리 홈즈 씨의 명예로운 영국적 덕목 덕분입니다. 죄형 법정주의, 합리적인 경찰 수사, 무죄 추정의 원칙...이것이야말로 현대 영국 시민사회가 이룩한 진정한 정의인 겁니다."

 

나는 이 사건을 <망자의 불명예> 라 이름지었지만, 차마 출판을 할 수 없었다. 친구를 존중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 얼마 안되어, 하루는 홈즈가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는 처음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우유를 사러 시장에 들르던 길이었네. 갑자기 경찰 두 명이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잠깐만요, 홈즈 선생님. 어제 타임즈 지를 봤는데, 대부분의 영국 무정부주의자들은 낙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더랍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당신이 우유를 살 때마다 그 사악한 테러리스트들에게 폭탄 원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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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더윈터 (2015-10-26 19:18:57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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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라고 해도 믿을 퀄러리
아이콘 개념의극한 (2015-10-26 20:23:3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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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뭐하면 이렇게 글쓰지
아이콘 그게모양 (2015-10-26 22:00:0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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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콘 오뒤쎄우스 (2015-10-26 22:00:4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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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쓰고 싶다....
아이콘 부차 (2015-10-26 23:09:43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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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홈즈팬으로서 감탄을 금치못하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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